분명 슬픈 건 아닌데 왜 이리 찝찝하고 기분이 더러운지 그제야 알겠더라.
51.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야 고생했다. 드디어 대학도 곧 졸업이네. 심지어 수석이라 졸업식 때 상도 받는다며? 정말 고생 많았다. 정말로. 역시 뭐든 열심히만 하면 결과는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어 있나 보다. 얼마나 고생했을까. 학교도 먼데 기숙사 들어갈 돈도 없어서 4년 내내 왕복 4시간 통학하고, 가뜩이나 공대라서 과제는 좀 많았냐고. 시험범위도 장난 아니었지, 3학년 되고서는 전공 5개씩 듣고 시험 기간 때는 잠도 하루에 겨우 3시간 잘까 말까 했었잖아. 남들이 너보고 다 독하다 그래도 넌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 원래 너는 목표가 생기면 훨씬 집요해지니까. 너 막학기 남기고 1년 휴학했을 때도 거의 안 쉬었잖아. 대게는 좀 쉬려고 하는 휴학을 너는 취업 준비 좀 미리 해보겠다고 돈은 돈대로 벌면서 교육이며, 자격증이며 엄청 바쁘게 살았잖아. 그래서 이번에 이모들 만났을 때 이모들이 널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젠 좀 쉬어도 된다고, 잠깐이라도 숨 좀 돌리고 마음 좀 내려놓고 살라고. 넌 집에서도 편히 마음 둘 곳 하나 없는 애니까 이모들이 정말 많이 신경 쓰시잖아. 그래도 네 성격에 그걸 듣겠니. 그냥 하던 대로 해. 아프지만 마라. 제발 병원 좀 그만 가.
왜 꼭 한 가지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크게 뒤 따라올까. 마치 너는 조금이라도 행복에 가까운 감정들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듯이 말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일까. 사실 오늘 듣게 된 아빠의 시한부 소식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헷갈리더라. 처음 그 얘길 들었을 땐 역시나 슬프진 않았어. 그와 함께 사는 동안 몇 번이고 상상을 해봤거든. 만약 당신이 죽게 된다면 나는 슬플까? 과연 내게 그만한 정이라도 남아있을까? 역시나 아니더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인간도 참 불쌍하지. 살아 있을 땐 아무도 반기지 않고, 죽음 앞에선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으니 말이야. 얼마나 고독하고 안타까운 인생이야. 그래도 뭐 어쩌겠어. 다 자업자득인걸.
일반적인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 들으면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랑 우리 언니가 아빠의 시한부 소식에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장례비를 걱정하는 거였어. 그리고 앞으로 엄마는 누가 책임지지, 집세나 생활비 같은 건 어쩌지. 결국엔 이 모든 걸 내가 다 떠안아야 하는 건가? 당신은 기어코 이렇게 또 한 번 내 발목을 잡는구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평범하길 바랐잖아 우리는. 그 평범함을 위해서 죽어라 달렸는데 결국엔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거나 다름이 없었지.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에 머무르고, 잠깐이라도 멈춰서 숨 좀 돌리려 하면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평범함과는 재빠르게 멀어지는 거야. 그럼에도 나는 항상 되뇌었어. 이번에도 분명 길이 있겠지. 어떻게든 되겠지. 절대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지금껏 그래왔듯 나는 또 한 번 역경을 이겨내고 더 강해지겠지.
그렇게 앞 날의 어둡고 캄캄한 문제들을 뒤로하고 또 한 가지 떠올렸던 건, 이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한 명은 줄어들겠구나였어. 잔인하지. 근데 이게 정말 잔인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부모인데 내가 너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걸까? 아니. 수천 번을 생각해 봐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내 결론이야.
나에겐 매일같이 아빠 욕을 해대고 온갖 저주를 퍼부었던 엄마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한참을 울더라. 한없이 나약한 사람이란 건 진작에 알았지만 그래도 너무 쉽게 무너지더라. 둘이서 그렇게 울고 있는데 나는 그게 그저 한 편의 시트콤 같기만 했어. 그래서 나 혼자 멀뚱멀뚱하고 서 있었어. 나도 내가 놀랍더라. 이렇게까지 아무런 감정이 안 생길 수가 있구나. 난 정말 이 인간들한테 질릴 대로 질려있었구나. 엄마가 한참을 울다가 자신은 아빠 없이 못 산다면서 같이 따라가겠다고 통곡을 하는 걸 보고선 나는 또 한 번 깨달았어. 정말 여전히,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당신들은 내가 안중에도 없구나. 끝까지 자식보단 본인들이 우선인 사람들이구나. 나는 내 평생을 단 한 번도 나를 낳아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볼 수 없는 운명이구나. 분명 슬픈 건 아닌데 왜 이리 찝찝하고 기분이 더러운지 그제야 알겠더라. 그건 '허무함'이었어.
정말 하루 종일 생각해 봤는데, 아직도 이 감정을 더 정확하게 형언할 수가 없는 것 같아. 그냥 참, 허무해. 모든 것들이. 삶이라는 게 정말, 너무 덧없고 허무하다 그치.
52. 당신이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것이 궁금해요.
찾는 것은 딱히 없다. 보통 그런 건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엄격히 일시적인 거라 생각해서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살이 찢길 듯한 추위가 지나갈 때까지 내가 입고 있는 옷가지들을 더 꽉 부둥켜안은 채로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버티고 버텨서 겨우 눈보라가 끝났을 때쯤엔 잘못된 힘 조절 탓에 갈비뼈 몇 개가 으스러져 불편한 소리를 낸다. 어찌 됐건, 무언가로부터 버틴다는 것은 내 몸 어느 한 군데가 조금이나마 고장 나야 끝을 보인다.
지독한 추위 앞에 무너지지 않으려 나는 잔뜩 몸을 웅크린다. 그리곤 생각한다. 이런 순간마다 나를 버티게 하는 몇 가지의 행복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또 떠올린다. 차라리 눈덩이들에 내 몸을 맡기고 영원히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그 기억들을 더 자주 더듬어 본다. 살아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여기서 잠들면 그동안 내가 무너졌다 다시 일어나고, 끝없이 달렸던 그 순간들이 너무 불쌍해질 거다. 이 눈보라가 그치고, 그다음엔 또 얼마나 매서운 추위가 나를 괴롭힐지 알 수 없다. 그땐 몇 개의 갈비뼈가 더 부러질지 모른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나는 오늘도 내 의지와 정신력을 믿어 본다.
53. 내년 1월 1일에 하고 싶은 것은?
매년 1월 1일을 함께 하는 친구들과 또 같이 보낼 것 같다. 서로 애인이 있어도 우리는 무언의 약속처럼 매년을 함께 해왔다. 술집이나 광장에서 새해 카운트 다운을 하고, 갓 스무 살들의 치기 어린 객기를 구경하면서 서로의 흑역사를 줄줄이 읊어댄다. 올해는 술 좀 줄이자는 지키지 못할 약속들을 늘어놓으며 새해부터 술병이 점차 쌓여가는 것을 보고는 뻔뻔스럽게 웃어넘긴다. 징글징글한 우리의 이 관계성은 정말 평범하고도 평화롭고, 소중하다.
앞으로 해가 갈수록 우리는 또 어떤 사람으로 변해 있고,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눌까. 뭐가 됐든 그때도 곁에 있는 사람이 너희라면 정말 든든하고 편할 것 같다.
54. 좋아하는 노래 가사 한 줄만 적어보세요.
나와 함께 파도를 등지고 모래성을 지켜줄 수 있나요
55. 무엇이 가장 그리운가요?
현실적인 걱정 하나 없이 옆에 친구들만 있으면 세상 두려울 것 없었던 그 시절. 그들과 있을 때만큼은 마음 편하게 웃고 즐기는 게 가능했던 나의 학창 시절. 당시는 집만 벗어난다면 그 어떤 걱정거리도 두려움도 없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친구들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짊어지고 책임져야 할지 아무것도 모른 채 편하게 웃을 수 있을 때였다. 그래서 그때만큼은 집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잠깐이나마 행복이라는 걸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시절에도 또래의 친구들보단 찌들을 대로 찌들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지금에 비하면 한없이 순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보다는 훨씬 때 묻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희망을 가득 품고서 정말 멋진 어른이 되겠다는 목표가 머지않다고 느꼈었다. 이십 대 중반을 달리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 허덕이는데. 나는 순수함으로 희망을 마음껏 부르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