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질문 일기 12화

조금씩 옅어지는

그래도 조금씩은, 아주 조금씩은 옅어지고 있다고 믿는 중이다.

by 이린
56. 돈이 생긴다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얼마가 생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은 어느 정도 모아두는 게 가장 가치 있을 것 같다. 취업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슬슬 돈 공부를 해보려고 하는 거라 아직 돈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돈은 돈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돈을 굴릴 수 있으려면 우선 모아 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돈으로 더 큰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선 시드머니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발판이더랬다.


나는 어릴 적부터 당기의 즉각적인 쾌락보단 앞으로 내게 닥칠 수 있는 일들이나 영향들을 반사적으로 생각하곤 했다. 당장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될 수 있는 대로 묵혀두는 것도 나의 습관 중 하나였다. 부모님께 들은 바로는 내가 혼자 밥을 먹을 수 있게 됐을 즈음부터 무조건 싫어하는 음식들을 먼저 먹고서 좋아하는 음식을 나중에 먹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짝을 고를 때도 이미 나와 친분이 두텁거나 편한 친구들보단 말을 거의 섞어보지 못한 친구들을 선택해서 친해지려고 했던 것 같다. 고작 십 대가 되기도 전이었던 아주 어렸을 때이긴 하지만, 당시에 친한 친구와 짝을 하지 못했거나 반 배정이 갈라졌다고 울고 불고 하는 어린아이들을 그들과 똑같이 어렸던 나는 전혀 이해하질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 아르바이트를 해오면서 거지 같은 순간들이 정말 많았다. 다양한 사회 경험도 좋지만 그만큼 성격도 버리고 인류애도 상실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당장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순간에도 수입이 그대로 끊겨버리면 나는 생활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 아르바이트가 확정될 때까지 무작정 버티곤 했다.


내 마음의 병이 이토록 커질 때까지 가정에서 그렇게 시달리면서도 내가 진작에 맨몸으로 뛰쳐나오지 않았던 것 또한 겁이 많아서 그랬던 게 아니다. 나는 항상 때를 기다려왔다. 그리고 이제야 그 순간에 거의 다다른 것 같다. 아주 작은 선택이라 할지라도 서투른 판단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파장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항상 때를 기다린다.


돈을 쓸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갖고 싶어 했던 걸 얻는데 소비를 해버릴지, 아님 묵혀둘지를 고민하는 순간들이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돈뿐만 아니라 그 무엇이든 결정의 순간 앞에서는 현명한 판단력으로 시기적절한 때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57. 어떤 사람이 부러워요?


첫째는, 사랑이 가득한 사람. 특히 받은 사랑이 가득한 사람.

그런 사람은 확 티가 난다. 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에 기인한 그 사람만의 매력과 사랑스러움이 뚜렷하다.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흉내 낼 수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오랫동안 열심히 해봐서 안다. 오로지 노력만으로 사랑받지 못한 과거를 숨기고 괜찮은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진짜 사랑받고 자란 사람들의 그 특유의 분위기와 당당함은 절대 따라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질투하는 것은 아니다. 동경일 뿐이다. 그래서 그냥 나는 나대로, 그들과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둘째는,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

그런데 솔직히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비율로 따졌을 때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내가 보기엔 풍족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 같은 사람들도 돈 걱정을 한다. 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또 다른 사람들도 돈 걱정을 한다. 걱정의 이유나 스케일이 다를 뿐이지 누구나 돈에 대한 걱정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부러워하는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건,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것을 걱정 안 해도 되는 사람. 그런 범주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는, 투명한 사람. 즉, 밖에서의 자신과 실제 자신의 차이가 별로 없는 사람.

사실 이것도 요즘 같은 세상에서 그러기 힘든 게 맞다. 그래서 부러운 걸 수도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연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나도 항상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가끔은 나다운 게 무엇인지,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이건 아직도 계속 고민 중인 문제지만, 그 다양한 모습들 모두가 나의 일부라는 것이 제일 정답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58.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나요?


아마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이지 않을까 싶다. 평생을 안고 갈 수도 있다. 오히려 이것보단 공부가 더 쉽다고 느껴진다. 그래도 원래는 '아니요'라는 말이 즉각적으로 나왔다면 지금은 잘 모르겠다는 게 내 대답이다.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한 대답이 나올 텐데, 질문의 대상이 내가 되는 순간 답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래서 세뇌가 무서운 건가 보다. 너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라거나, 사랑한다는 말보단 너는 애가 왜 그 모양이냐든가 비정상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들어왔다. 남도 아닌 부모라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매일 듣는다는 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상처였던 것 같다.


누구보다도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가해자는 가족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덕분에 아이의 자아가 형성되는 것을 도와줘야 하는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도, 그 책임감의 무게 또한 이른 나이에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아이에 대한 생각은 없지만, 만약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나는 나의 부모와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랑이 가득한 아이로 자라게 해주고 싶다. 내가 받지 못한 사랑까지 아이에게 전부 눌러 담아 채울 것이다.


지금은 알고 있다. 당시의 어렸던 나는, 그리고 지금의 나 또한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그저 운이 안 좋아서, 올바른 가정을 가지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걸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잘 알게 되었다. 만약 내가 정말 어떤 하나라도 비정상적인 사람이었다면 지금 내 곁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20년이 넘도록 지겹게 들어온 그 말들이 나를 사랑하는 데는 끝까지 걸림돌이 되나 보다. 그 말들과 기억들을 완전히 지워내는데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조금씩은, 아주 조금씩은 옅어지고 있다고 믿는 중이다.



59. 오늘 몸 상태는 어떤가요?


항상 똑같다. 매일 피곤하다. 나는 개운하게 자는 법을 모른다. 자다 깨지 않고 한 번에 푹 자본 적이 없다. 이제는 이런 생활도 익숙해져서 나는 매일 피곤함을 당연하게 짊어진 채로 하루를 보낸다. 아무리 피곤해도 해야 할 일들은 반드시 해내야만 나의 하루를 끝낼 수 있다.


나는 뭐든 나중의 여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미리 마무리를 해놓는 편이다. 그리고 가끔씩은 오늘처럼 그동안 충전하지 못했던 잠을 몰아서 자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완전히 회복되진 않더라도 조금은 살만해지는 느낌이다.



60.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헬프(The Help)>


이 영화는 1960년대에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백인들의 집에서 일하는 흑인 가정부들이 인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돕고 싶어 하는 백인 작가와 함께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책을 만들어가는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영화의 색감이 따뜻하고, 인종차별에 대응하며 서로를 위하고 지키려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 깊은 영화였다.


"You is kind, You is smart, You is important."

"넌 친절하고, 넌 똑똑하고, 넌 소중한 사람이야."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이다. 문법이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이 대사는 영화의 주인공인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이 자신이 돌보는 백인 아이에게 매일같이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전달하기 쉽도록 그렇게 말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이른 나이에 아이를 가지고 산후 우울증에 시달려 자신의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에이블린은 매일 아이에게 이 말을 해주면서 아이가 똑같이 읊을 수 있게 했다. 너는 정말 소중하고 멋진 사람이니 꼭 기억해야 한다고.


아마도 이게 내가 어렸을 때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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