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질문 일기 13화

그날까지 줄곧 외롭기를.

그러니 그날까지 줄곧 외롭기를 바란다.

by 이린
61.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제일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


새벽바다를 보고 싶다.


바다는 밤보다 새벽이 더 인상적이었다. 20대 초반에 친구들과 부산여행을 갔을 때였는데, 여행 이튿날 숙소에서 같이 한 방을 썼던 친구와 수다를 떨다 보니 잠이 다 달아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벽 두 시에 잠옷 차림 그대로 밖을 나왔다. 숙소 바로 앞이 해운대 해수욕장이어서 바다까지 몇 걸음도 되지 않았다. 그 시간에도 사람이 한 두 명 정도는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파도 소리만이 가득했다.


왜인지 낮이나 밤에 보았던 포말보다 새벽에 본 것이 더 빛나 보였다. 해가 떠있을 때 바다는 윤슬이 가장 예쁘지만 새벽에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온전한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날 버킷리스트 한 가지를 이뤘다.





"새벽바다 보면서 검정치마 노래 감상하기"




새벽의 바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분위기는 검정치마의 음악인 것 같다. 인적이 드물고 캄캄한 바닷가를 배경으로 검정치마의 노래와 파도소리가 맞물리는 그 순간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62. 남들의 시선이 두렵게 느껴진 적이 있나요?


한때 나에 대한 기대가 꺾여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을 두려워했었다. 타인이 멋대로 꾸며놓은 '나'라는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노력했다. 이건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의 관계가 두터운지를 판단하기도 전에, 상대가 기대하는 나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 같다. 내게 실망하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무서워했으니까. 나는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내 주변인들로부터 채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기꺼이 그들이 원하는 내가 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기대가 부서지고 실망하는 과정을 거쳐야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무의식 속에서 내 입맛대로 그려 온 모습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오롯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젠 그 과정이 모든 관계에서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63. 만일 내일 내가 죽는다면 누구에게 찾아가 당신 덕에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나요?


내 곁에 있어준 모든 이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당신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덜 불쌍한 인생이었다고. 사실 어쩌면 나는 당신들과 함께 할 때만큼은 행복했던 거였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전에 작성했던 39번의 답변을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전달하기엔 하루가 너무 짧다. 그래서 꼭 편지로라도 당신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동안 얼마나 고마웠고, 덕분에 얼마나 벅차고 행복했는지.



64. 과거와 미래 둘 중 하나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현재를 살 거다.


과거가 어떻든, 그로 인해 내가 어떤 현재를 살고 어떤 미래를 가지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인생이 덜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바꾸는 것도, 미래를 미리 알아보는 것도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감당해야 하고 어떤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상관없다. 무엇이든 그에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일이 그렇게 흘러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면 된다. 결과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현재를 살고, 곧 뒤 따라 올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65.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저번 주에 엄마가 아르바이트 끝나면 차비를 줄 테니 택시를 타고 잠시 병원에 다녀오라고 했다. 아빠가 간암 진단을 받고서부터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종합 병원에 말이다. 엄마는 고집이 세서 당신이 직접 듣거나 알아보지 않으면 남이 하는 말을 절대 믿지 않을 때가 많다. 아직도 엄마는 아빠가 시한부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가 보다. 담당의와 추가 상담을 예약했는데 당신은 피곤해서 가기가 힘드니 내가 대신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가서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보라고 했다. 정말 앞으로 3개월에서 6개월밖에 남지 않은 것인지, 그 정도로 현재 암세포가 많이 전이된 상태인 건지, 수술을 해도 가망이 없는 건지 등을 물어보랜다. 말은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것을 물어보라는데 듣고 보니 다 당신이 물어보고 싶은 것이지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난 궁금한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걱정되고 궁금하면 직접 가면 될 것을 왜 내 시간마저 뺏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 내내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창문을 열었다. 나는 고작 그 몇 마디 질문을 하러 내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 자체가 끔찍이도 싫었다. 그것도 아빠 때문에. 나는 오히려 당신이 하루라도 빨리 내 인생에서 사라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막상 병원에 갔더니 환자의 신분증만 챙겨 와서는 환자 없이 보호자가 대신 진료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꼭 이런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뭐 하나를 제대로 하는 법이 없다. 내가 오기 전에 몇 번이고 물어봤지만 엄마는 아빠의 신분증만 잘 챙겨가면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대리 진료 동의서를 작성하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떼고 나서야 겨우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아빠 말이 다 맞았다. 의사가 하는 말과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앞으로 남은 건 3개월에서 6개월, 지금은 폐와 뼈 등 몸 곳곳에 암세포가 전이된 4기 상태, 수술을 해도 복수가 차오를 수 있고 나을 수 있는 방도가 없다. 그저 앞으로 남은 시간을 최대한 편하게 보내는 것이 최선이란다. 환자가 보호자들이 걱정할까 봐 말을 잘 안 하려고 하셨다는 의사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당신이 뭔데, 바깥에선 가족을 위하는 가장인 척을 하는 거지?


토악질 나오게 위선적이다. 역겨웠다. 병원에서 아빠의 신분증을 보여드려야 할 때마다 신분증에 있는 아빠의 얼굴 사진만 봐도 화가 났다. 나는 이런 당신 때문에 또 내 시간을 버렸다. 멍청하게 그런 당신을 걱정하는 엄마도 싫다. 오히려 서로를 방생하지 않고 평생 사랑했으니 다행인 걸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이런 사람들 때문에 피해 보는 사람이 더는 생기면 안 된다. 그동안 피해받은 사람들과 나와 언니로도 족하다.


당신이 죽는다면 내가 감당해야 할 일들은 지금보다 더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그날이 얼른 오기를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나는 당신이 죽는다고 해서 연민을 품는다거나, 남은 시간 동안 살갑게 대하면서 곁에 있어줄 생각이 죽어도 없다. 그러니 그날까지 줄곧 외롭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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