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해 진심을 줬던 당신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해 준 남자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 첫 연애였던 만큼 나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기대가 컸던 탓일까,
아님 단순히 타이밍의 문제였을까,
진과의 연애는 처음부터 삐걱거렸던 것 같다.
진은 직장인이었다. 그리고 나를 만나기 시작할 때쯤 석사과정을 병행하게 되었다. 그는 매일 퇴근하면 다시 대학원으로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강의를 듣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주말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그는 평일에 본업을 하느라 밀려있던 강의를 주말에 몰아서 듣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과제들을 처리하느라 나와 함께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진이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은 '미안해'였다.
그런 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일 때문이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인 걸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진에게 서운하다거나 속상한 건 전혀 아니었다. 그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통설이 내게도 잘 들어맞았을 뿐이다.
진과 4개월을 만나면서 우리가 마주 앉고 식사를 해본 적은 고작 한 번이었다. 그만큼 진은 그의 일상에서 내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가 우리 집 앞에 찾아와 차 안에서 몇 마디를 나누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진은 내게 육체적인 관계를 꾸준히 원해 왔다. 그 공간이 비록 차 안 일지라도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관계를 원했고,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만나서 밥 한 번 먹기 어려운 마당에 데이트는 꿈에도 못 꿨지만 육체적 행위만 오고 가는 이 연애가 정말 건강한 건지에 대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그저 갓 스무 살 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아이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은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픔을 공유하고 정신적 의지가 되어줬던 첫 '남자 어른'이었다. 그는 항상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곤 충고나 해결책 대신 아무 말없이 나를 안아주었다. 가끔은 침묵이 무엇보다도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진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육체적 관계만 이어갈 수밖에 없는 이 연애에서 나는 더 이상 진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몇 번이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는 당신이 좋은지 이제 모르겠다고. 벌써부터 이런 감정이 들기엔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함께한 시간은 그것보다 훨씬 짧아서 이게 사랑인지, 이게 평범한 연애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진은 나를 꼭 안고서 미안하다고 했다. 염치없지만 자신을 계속 좋아해 달라고 했다.
첫 100일이 되었을 때 진은 여느 때와 같이 우리 집 앞에 차를 몰고 왔다. 아마 그도 최선을 다 해 시간을 낸 것일 텐데, 그마저도 거의 자정이 다 된 시간이었다. 이전에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봤던 진의 물음에 나는 원래부터 무엇을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차에 타자 마자 선물 한 보따리를 내게 한 움큼 쥐어줬다. 거기엔 내게 실질적으로 정말 필요했던 것도, 그의 마음이 담긴 것도, 심지어 우리 엄마를 생각해서 준 선물도 있었다. 왜인진 모르겠는데 그냥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미안함과 진심이 너무 와닿아서?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어떻게든 나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애써 웃어 보이는 그가 측은해서? 사랑에 대해 처음으로 복잡한 감정이 들었던 때였다. 이유 없이 울음이 터진 나를 진은 계속해서 달래주었다.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그도 분명 마음이 복잡할 텐데 한 번도 내 앞에서 표정이 일그러진 적이 없었다.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 실제로 진은 평소에도 나를 많이 챙기고, 많이 도와줬다. 그게 언어적인 것이든, 어떠한 행위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100일을 보내고 한 달이 더 지나고 나서야 진은 나를 놓아줬다. 그는 이 관계를 시작하기 전에도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한참 어린 내가 자신 때문에 연애에 있어서 더 행복하고 좋은 기회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시간이 훨씬 지나고 나서야 자각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앞으로 어떤 결과가 생기더라도 일단은 만나 보고 싶다고 한 사람은 나였다. 진과의 만남을 선택한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진과 이별할 땐 분명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더 이상의 마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분명 그랬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아쉽고, 허무하고, 상황이 조금만 더 잘 따라줬다면 하는 생각과, 그에 대한 미안함 등의 복합적인 이유였을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진은 내게 최선을 다 했다. 데이트를 하지 못하더라도 육체적인 관계를 원해왔던 건 지금까지 수많은 연애를 해오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땐 모든 게 처음이었고,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은 육체적인 관계가 연인 사이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진이었어도 같이 밥 먹을 시간조차 없다면, 그저 집 앞에서 얼굴 몇 번 보는 게 최선이었다면, 육체적인 행위를 통해서라도 서로의 감정적인 공유나 사랑을 유지하려고 했을 것이다. 처음 내가 어리석게 생각한 것처럼 단지 내가 어려서, 그런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했다면, 진은 그만큼 나를 만날 때마다 안아주거나 내가 스치듯 말했던 것들까지 신경 써주지 않았을 거다. 매일 피곤에 찌든 상태에서 그 늦은 시간에 굳이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래서 지금은 나도 모르게 진에게 무례했던 그 말들이 후회된다. '오빠는 그냥 내 몸을 원하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을 때 진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도 진은 화를 내긴커녕 그렇게 느끼게 해서 미안하다며 애써 웃어 보였다. 그는 바보였다. 그리고 나도 바보였다.
당신은 내게 미안해하고, 나도 당신에게 미안해했던 그런 연애였다. 그래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진심을 줬던 당신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해 준 남자였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지금도 여전히 미안하고, 고맙다.
이젠 그 바쁜 시간들이 다 지나갔을 텐데, 당신이 그때보다 더 좋은 상황에서 더 좋은 사람과 더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길,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