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 Feb 25. 2024

하루에 하나씩 망하자

나의 첫 프랑스 스타트업


2023.10.06



지난주부터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복잡한 프로젝트가 맡겨져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현재 데이터 팀에서 가장 복잡하고 난잡한 DAG를 최적화해야 하는데, 관련된 코드의 양이 매우 많고, 다양한 비즈니스 로직이 실타래처럼 얽혀있어서 처음에는 그 복잡함에 압도당했다. 따라서 지난주는 얽히고설킨 코드를 낱낱이 분해하고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답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가 주체성을 갖고 최적의 해답을 팀장한테 제시해야 하는 열린 결말의 과제이기 때문에 매우 난해했다. 




무던한 성격의 여느 엔지니어, 개발자들과는 달리 이런 상황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항상 생기고, 최종 결론을 알지 못한 채로 거듭 시행착오를 거치며 bottom-up 방식으로 개발해 나가는)이 꽤나 버겁다. 지난주, 배울 점이 많은 데이터 아키텍트 T가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줬는데, 이 조언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고 덕분에 과거에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던 갈등 상황들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즘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지금 당장 너보고 무언가를 완벽하게 만들어내라고 하지 않는데, 정작 너 스스로가 과도한 푸시를 하는 것 같다. 70퍼센트만 해도 좋고, 실수해도 좋고, 모르면 사람들한테 물어보거나 도움을 청해도 좋아. 가끔 너를 보면 실수하는 게 두려워서 시행착오를 하지 않고 순간 마비되어 버리는 것 같다. 실패해도 좋으니 그냥 해라. 망설이지 말고.



우리의 일은 미리 정답을 100퍼센트 알고 해 나가는 게 아니야. 대부분 어떻게 될지 그 끝은 모르지만, 작은 규모의 시도들을 빠르게 거듭하면서 아래서부터 위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나가는 거야. 시작도 전부터 큰 그림을 전부 다 이해하고 시작하려고 하면 정작 그 자체에 압도되어 출발도 못하게 될 거야. 스트레스를 받거나 막히는 점이 생기면 그때그때 피드백을 줘도 돼. 어려운 점이 있어도 그걸 스스로 간직한 채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러지 말고. Autonomy를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게 혼자 끙끙거리며 일하라는 것은 아니야."





안전지대를 벗어나기 전까지 나는 남들에게 부족하고 헤매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었다. 확실한 게 좋고 예측 가능한 바운더리 안에서 상황이 흘러가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이번주 월요일부터 마인드를 바꿔버렸다. 




하루에 하나씩 망하자




뭔 말이냐, 6개월 수습기간이 끝나면 나는 잘린다고 그냥 생각하고, 실패해도 좋다고 스스로를 허락하고, 그전에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시행착오를 한다. 뭘 흠잡을 데 없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나는 그저 하루에 하나씩 다방면으로 알짜배기 내실을 기를 수 있는 것들 / 30 평생 해보지 않던 짓들을 도장 깨기 하듯이 해나간다. 가령, 



(1) 결말을 모르는 모호한 상태에서도 일단 시작하기

(2) 하루에 하나씩 망치기 (e.g. aws dev 계정 놀이터 삼아서 실험한 것들 깃헙 PR 하기)

(3) Bonjour! Bon Appétit! Bonne soirée! 웃으면서 먼저 외치기

(4) 플젝 중간중간 동료들의 피드백을 받고 반영을 해서 '의견 고마웠다, 이렇게 반영했다' - 알리기

(5) 내가 생각하는 최적의 효율적인 방식이 아닐지라도 그냥 의견 반영해서 실행하기

(6) 일하는 거 가시적으로 알게 하기

(7) 버거우면 그때그때 부드러운 방식으로 의견 전달하기

(8) 회의 때 질문 최소한 1개씩 하기

(9) 하루에 한 사람한테 먼저 불어로 커피챗 신청하거나 스몰톡하기 (업무랑 관련 없어도 ok)

(10) 혼자 출근해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철판 깔고 점심 같이 먹기!






하루에 하나씩 망하자 마인드로 이번주를 살았다. 평소에 돌다리 두들기느라 망설이던 깃헙 pr 도 망하거나 말거나 과감하게 했고, 근엄하신 backend 팀장님한테 먼저 불어로 메시지 보내서 미팅 잡고 모르는 거 20분 동안 여쭤보고, 사수 A한테 어떤 포인트에서 스트레스받았는지 부드럽게 의사 전달해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도움도 받았고, 갓 결혼한 프랑스인 동료를 축하하기 위해 아침부터 통통한 노란색 꽃다발 사서 회사에서 증정하고, 애프터워크에서도 대화 중간중간 끼어서 내가 관심 있는 주제로도 많이 얘기했고, 시스템 무너지거나 말거나 걱정하지 않고 과감하게 스크립트 바꿔서 먼저 제안해 버렸다. 




목요일 퇴근 직전에 A와 T가 이번주의 발전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해줘서 뿌듯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번 회사에서는 비록 일은 어렵지만 그만큼 매일매일 배우는 것들이 많고, 즉각적으로 생산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멋진 동료들이 많아서 감사하다. 망치면 어떡하지... 이 생각에 정작 현재가 마비된 사람이라면...



씨발 망해도 좋아!









이전 08화 긍정적 스트레스와 삽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