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눈이 내렸다

<골목길 추억>

그날 눈이 내렸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한 건 진작 물어보는 건데 삼십 년이 지난 일이 쉽게 기억날 리 없다.

나도 실은 그날의 기억이 현실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날 서설이 내렸다.

소리도 없이 하얗게 내리는 눈.

세상의 흔적이 다 없어지는 줄 알았다.

소리가 잦아들었다.

검푸른 적막이 소리 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군불 피우지 못한 부뚜막이란 차갑고 습한 법이지만 그날 그 시간에 내린 눈 덕분에 그다지 춥지 않았다.

대신 마음이 지독히도 시렸다.

그날 엄마는 무엇을 생각하며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했을까.

나처럼 그해 바로 전 해의 그날 일을 떠올리고 있었을까?

"외할머니..." 숨죽여 불러 보았다.

너무나 내성적이었던 나는 전 해의 그날, 수업시간에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쉬는 시간에 잠시 나가 눈을 맞았다.

집에 가기 바로 전 수업시간이 되어서야 추워진 몸 탓에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었으나 선생님을 무서워해서 말도 못 하고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말았다.

하얀 토끼 체육복이었다.

다행인지 하교 길 내내 질척한 진눈깨비가 내려 몸을 다 적셨다.

집에 가자마자 아무도 모르게 속옷을 갈아 입고 빨래통에 대충 넣었다.

서울에서 팍팍한 직장생활을 하다가 주말이 되어서야 한 달에 한두 번 내려가던 게 고작이던 때가 있었다.

거실에 배를 깔고 엎드려 치악산 하얀 봉우리를 보며 엄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억은 항상 찾는 곳이 있는 모양이지...

눈을 바라보니 국민학교 삼 학년 때의, 아까의 실례했던 일이 문득 생각나 꺼내 보았다.

엄마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시더니 이윽고 말을 이으셨다.

"외할머니가 그런 일로 나무라지 말라셨단다."

그때의 그러한 눈이 내리면 기억의 끈이 좀 더 연장되어 이제는 포근한 기억이 살며시 피어오른다.

처음의 그날 그곳에서 내린 눈이 딱 그랬다.

그때에는 알 수 없었지만 외할머니의 포근함에 나는 폭 안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전학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실수로 쏟았던 쌀을 그해 그곳에 가서 처음 키운 암탉에게 주었지만 입에 맞지 않았는지 먹지 않았다.

댓돌 밑에 몰래 쓸어 넣었지만 애당초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쌀을 버린 걸 들켜 버리고 나서는 몹시 맞았다.

그리고는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동생도 울었다.

서러운 눈물이, 울음이,

앞집이 그대로 보이게 바싹 마른 울타리 사이사이로, 그 너메의 돌담 사이로 다 새어 나갔다.

그 댁에 사시던 친구의 고모와 아주머니가 다녀가셨다.

무어라 무어라 다독이시고는 밤이 늦게 되어서야 돌아가셨다.

공부를 열심히 하려 했지만 낮 동안에 도와야 하는 집안일, 땔감 해 오는 것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사정을 뒤늦게 들었던 친구가 톱을 가지고 자기네 산에서 몇 짐이나 해다 주었다.

그때야 비로소 청솔가지 매운 내 대신에 참나무 구수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꼬꼬'라고 불렀던 암탉은 본바탕이 예쁜 갈색에다가 군데군데 붉은빛이 얼룩얼룩 예뻤다.

눈도 까맣게 초롱초롱해서 낮 동안에 꾸벅꾸벅 조는 여느 집 닭 하고는 좀 달랐다.

애지중지 키우는 동안 어느 날 아침 알을 낳았다. 아주 작은 알이었다.

초란이라고 했다.

처음 낳은 알.

물 선 곳에서의 우리 가족에게 작지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일부러 느끼려고 해야 겨우 느낄 만큼 미지근한 정도의 따뜻함을 간직했던 그 알을, 꼬꼬를 안아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덤불에 빠졌는지 어떤 짐승이 채어갔는지-사라지기 전까지 꼬꼬는 우리에게 한 가족이었다.

삶에 대한 배신감은 그런 데서 오지나 않는 걸까?

그 아픔이 엉뚱한 곳으로 분출되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그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듯이 내리던 때에 엄마는 혹여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말없이 굳게 입을 다문 채 뚫어져라 내어다 보는 눈 속에 묻어 버리고나 있지는 않았을까?

그날 눈이 그렇게 내리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짐을 다시 꾸렸다.

일부러 묻어 버린 것을 다시 꺼내 보내는 것은 많은 용기가 필요할 일일 것 같다.

그날, 눈이 소리도 없이 쏟아지는 때,

문도 없는 대문 밖 저 너메,

사방산 골짜기가 다 메워지도록 눈이 소복이 쌓이던 그날,

엄마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한 동안 물어보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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