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추억>
깔깔거리고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뒷방 창문을 향해 들어오는 걸 보니 아마 잠(蠶)순이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시골에 내려갔다고 하더니 잘 돌아왔는지 궁금했다.
평소보다 많은 반찬에 밥이 더 들어갈 법도 한데 먹는 시늉이 시원치 않았다.
"왜, 입맛이 없니?"
엄마가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뭔 이야깃거리를 가져왔을지 궁금해서 말씀을 못 듣고 있다가 결국, 짠 오빠한테 꼴밤을 한 대 맞았다.
"아, 왜?"
눈으로 흘기는 나를 보며 짠 오빠가 혀를 쏙 내밀었다.
엄마가 대신 짠 오빠 어깨를 툭 치셨다.
"엄마, 이거 잠(蠶) 순이 좀 갖다 준다."
밥을 한 그릇만 얼른 비우고는 맛있는 반찬을 담아서 잠(蠶) 순이네로 향했다.
잠(蠶) 순이는 충청도인지 전라도인지 그께 어느 지역에 산다고 했는데 일 때문에 홀로 서울에 와 있었는데 나와 친해지고 나서는 우리 집 뒷집에 쪽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잠 순이 이름은 원래 점순이였는데 평소 잠이 많은 데다가 깨어 있는 동안 말을 하게 되면 굵고 짙은 눈썹이 함께 따라 움직여서 마치 다 큰 누에가 이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아서 누에 잠(蠶)자를 써서 잠(蠶)순이라고 불렀다.
골목을 돌아가는 길이 즐거웠다.
반찬을 담은 보따리를 흔들다가 다시 품에 꼬옥 안았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 '삐그덕' 문을 열고 들어서니 떠들썩한 소리가 마당에 가득했다.
햇살이 담을 타고 넘어 들어와 포근했다.
방문을 여는데도 웃고 떠드느라 알지 못했다.
몇몇 친구들이 빙 둘러앉아 얘기를 듣고 있었다.
"삼순이 왔구나. 어여와. 재미난 얘기는 이제 시작이여."
반찬을 받아 들고 한쪽으로 치우더니 나를 옆에 앉혔다.
"너는 뭐한다고 이제 왔냐?" 옆에 있던 친구가 얘기했다.
"얼마나 배꼽 빠졌다고."
나는 이른 저녁 먹느라고 늦었다고 또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와서 잠(蠶)순이가 온 걸 알고 궁금해하다가 꼴밤 맞은 이야기까지 다 했다.
잠(蠶)순이가 고생 많았다며 내 볼따구니를 어루만졌다.
평소에 볼이 빨개지는 얼굴이 귀엽다며 자주 만져주던 손이 따뜻했다.
"내가 이번에 시골을 갔잖냐?"
잠순이의 재미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잠(蠶)순이가 이번에 시골을 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식구들 모두 어딘가에를 다녀오셔야 한다며 저녁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이른 아침을 자시고는 길을 나셨다고 했다.
아침을 먹고 나니 그다지 할 일도 없던 터라, 무얼 할까 하다가 마당에 널어 말리고 있는 빨간 팥이 보였다고 했다.
멍석에 널어놓은 팥 빛깔이 참으로 곱더란다.
그렇게 팥을 보는데 문득 팥죽을 먹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기도 하고 늦은 밤이면 돌아올 가족들에게 좋은 간식거리가 될 것 같아서 팥죽을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본 적은 많았는데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어서 얼마나 해야 할지 몰랐던 통이 큰 우리 잠(蠶)순이는 물초롱으로 하나를 물에 불리고는 가마솥에 들이붓고 삶기 시작했다고 했다.
탁탁, 나무 튀는 소리가 정겹고 불내음도 구수했다고 했다.
가마솥뚜껑이 우렁우렁 소리를 내서 들썩거려서 뚜껑을 열어보니 불어난 팥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했다.
불을 빼내어도 꿀럭꿀럭 끓어 넘치는 걸 아까의 물초롱에 담다 보니 어느새 반이 다 찼는데도 가마솥엔 붉은팥이 버글버글 끓었다고 했다.
겁이 더럭 나서 끓어오르는 걸 쇠죽바가지로 몇 번 퍼내고 나니 그제야 양이 맞더라고 했다.
남는 걸 어쩌다 싶다가 너무 많이 끓인 걸 들키면 혼날 것 같기에 어쩔까 하다가 한 번도 하늘을 본 적 없는 짐승, 돼지에게 갖다 주기로 했다고 했다.
돼지우리에 가서 퍼 담은 팥죽을 우르르 쏟아내니 꿀꿀거리며 달려들어 잘도 퍼 먹더란다.
그런데, 그 잘 먹던 돼지가 갑자기 뜨거운 음식이 들어가서인지 돌연 죽어버리더라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큰 재산으로 키우는 돼지가 죽어버렸으니 이건 큰일 중에 큰일이었다.
밤이 다 되어서 돌아온 식구들에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얘기를 다 하고 난 뒤에는 엄청나게 혼났다고 했다.
외동이라고 금이야 옥이야 크던 잠순이도 그때는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어쨌든 죽어 버린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다음 날, 돼지를 잡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싸게 팔고는 남은 고기를 저녁에 먹게 되었는데
잠순이는 오랜만에 먹는 고기가 참 맛도 좋으면서도 자기 때문에 죽은 게 불쌍해서 입으로는 웃고 눈으로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얘기 통에 쓰러져서 꺽꺽 거리며 웃는 애도 있었고 눈물 흘리는 애도 있었다.
나는 볼이 더 빨개졌다.
또래들이 모여 앉은 방안이 잠순이이 재미난 얘기로 훈훈했다.
그 얘기 뒤로도 잠순이는 여러 가지 얘기를 재미나게 해 주었다.
오늘처럼 동지가 되어 붉은 팥죽을 끓여서 먹게 되면 그때 얘기해 주던 우리 친구 잠순이가 생각나게 된다.
주전자 물 폴폴 끓는 난로 옆에서 다시 한번 잠순이 얘기를 들어 봤으면...
서로 살아 있기만 하다면 언젠가는 만난다는 게 인생이라니 기다려 볼 밖에...
그리고 동짓날은 해마다 찾아올 테니 이로써 괜찮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오늘, 날이 참 포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