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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I Mar 15. 2021

재료호더의 변명

정수련의 단련일기


온갖 재료들로 가득찬 작업실 책상. 어지럽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좋아진다.


작업실을 같이 쓰던 친구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다. “재료 호더” 

털실, 천 조각, 솔방울, 나뭇가지, 돌멩이, 조개, 씨글래스같은 온갖 재료들을 작업실에 착착 쌓아두는 나를 보더니 “언니, 재료 호더같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호더’라고 하는 말이 붙은 단어가 대부분 부정적인 단어가 많아서 친구는 말을 내뱉고는 잠시 걱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다람쥐 같은 습성을 잘 표현하는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이 되어 마음에 들었다. 재료를 가지고 있으면 각 재료가 언젠가는 쓸모 있고 예쁜 것으로 바뀔 것을 기대하며 쌓아져 있는 것만 봐도 뿌듯하다. 고무줄이 늘어나 쓸 수 없는 머리끈에 붙어있는 비즈나, 그 옛날 상하이에서 사 왔던 이제는 사용하지 않을 가방의 끈에 달린 구슬들을 보면 차마 쓰레기통으로 넣지 못하고 하나하나 분해해서 통에 담아둔다. 비즈나 구슬은 쓸모를 다해 분해가 되었어도 그 자체로 반짝반짝 예뻐서 모여 있는 것을 보는 것도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재료를 모으는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바다나 산에 다녀오며 내 생각이 났다면서 나뭇가지와 솔방울을 가져와 선물이라고 건넨다.


각종 재료와 물건을 오랫동안 모아두는 습관을 지니고 있으면서 나는 오랫동안 내가 정리를 잘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못 견뎌서 청소하는 것과, 물건을 각각의 용도대로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것을 나이가 한참 들고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먼지가 보이면 닦는 사람이지, 온갖 물건들을 카테고라이징하여 보기 좋게 정리하고 재배치하는 데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란 걸 깨달은 건 박연습과 함께 작업실을 쓰면서부터였다. 박연습은 디자인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각종 서류와 책, 문구류 같은 것들을 주기적으로 정리하고 재배치하곤 했다. 책상 배치도 요리조리 바꿔보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공간을 쓰는 법을 계속 궁리했다. 그에 반해 나는 트레이 하나 사서 다 보이게 털실을 쌓아두고, 책상에도 이 구석, 저 구석에 각종 물건을 쌓아두기만 했다. 박연습이 재배치한 공간을 함께 쓰면서, 같은 공간도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공간이 되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학생 시절의 나는 한 번 침대와 책상의 위치를 정하면 다시 재배치할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 번 서랍 속에 그 자리를 정해두면 몇 년 동안 그 물건의 자리는 계속 그 자리다. 회사 자리도 마찬가지다. 잦은 조직개편과 사무실 내 이동으로 짐을 최대한 줄이려고 하기는 하지만 뜨개동호회의 실무더기와 나의 자질구레한 짐들을 모으면 6박스는 나온다. 몇 박스는 다음번 이사의 효율을 위해 풀지도 않고 상자째로 둔다. 회사 동료와 유난히 자리가 깨끗한 동료에 관해서 얘기하다가 대단한 깨달음인 양 “나 사실은 정리를 못 하는 사람이었더라구요.” 라고 얘기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걸 이제 알았어요? 책상만 봐도 알겠구먼.” 그렇구나, 나만 몰랐구나.


단련일기의 이번 주제가 “비움”이라서 실 정리도 어느 정도 해보긴 했지만 정리하기와 나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요즘은 화상으로 친구들과도 수다를 자주 떨게 되는데, 내 공간을 보며 친구가 “언니는 아늑한 맥시멀리스트”라고 했다. 이 별명 또한 마음에 든다. 미니멀리스트가 되지 못할 바엔 공간을 아늑하게 꾸미고 싶다. 그렇다면 무엇을 비울까, 생각해보니 [정리하려는] 마음을 비워볼까 싶다. 그렇다고 정말 “호더”처럼 모든 것을 쌓아두겠다는 다짐 같은 것은 아니고, 꼭 정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보려고 한다. 오히려 서랍 속에 오래 잠들어있던 재료들의 쓸모를 찾아 다시 재탄생시키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해 보는 건 어떨지. 몇 년 전부터 여행에서 주워온 솔방울, 구슬, 조개를 하나씩 낚싯줄에 꿰어 모빌을 만들어 ‘여행의 조각들'이라고 이름을 지어 창가에 걸어두기도 하고, 선물하기도 했다. 작업실에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도 나의 재료들을 꺼내어 모빌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곤 하는데 반응이 좋다. 무언가를 만드는 속도가 재료가 쌓이는 속도보다 확실히 더 느리지만 천천히, 나만의 방식대로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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