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나 Mar 20. 2019

회고

비가 오면 생각나는 책, <언어의 정원>을 읽고

13년쯤 흘렀나. 엄마가 편의점을 시작한 후로 설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마다 시골 간 아르바이트생들을 대신해 손님을 맞이한다. 십수 년째 변함없이 우리 편의점에 들르는 단골 아저씨들은 내 얼굴을 보면 명절이 왔구나 싶단다. 내가 명절에 쉬지도 못하고 편의점 일을 돕는 게 수고스럽다고 생각했는지 한 분은 "빨리 시집을 가버려야 편의점에 안 오지 않겠느냐"며 농담을 했다. 글쎄, 집에서 제사상 음식을 준비하거나 네 살 난 조카를 돌보는 것보다 편의점에 나오는 편이 더 낫다고 나는 생각했다. 치열하게 묘안을 생각해내거나 크게 사람과 부딪힐 일 없이 몸만 바삐 움직이면 되니까. 매장 청소나 상품 진열 같이 제때에 해야 할 일들만 해두면 남는 시간 틈틈이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다. 


이번 연휴 편의점에서는 <언어의 정원>을 읽었다. 비가 올 듯 말 듯 흐릿한 월요일에 다 읽어내고도 여운이 남아 한 번을 더 읽고 있는데, 최근에 단골 대열에 합류한 듯한 아저씨가 내 나이를 물었다. 스물여덟이요. 아직도 입에 붙지 않은 내 나이를 말하니 저쪽에선 자연스레 결혼 얘기를 꺼낸다. 너무 당연하게 신랑 될 사람은 됨됨이를 보라는 말을 꺼내는 아저씨의 목소리 위로 문득, 스물여덟이 이렇게 무거운 숫자였나.


미호를 만나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먼저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할 것. 그리고-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후지사와에서 아키즈키가 될 때까지, 그러니까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꼭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얘기할 것.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심사가 뒤틀려서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학교를 빼먹는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런 것을 미호처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또 같이 공원을 산책하고 싶다는 얘기도 하고 싶었다. - p. 30


아직 애니메이션은 보지 못 했지만 책 말미에 적힌 작가 후기나 해설을 보건대, 애니메이션이 '사랑'에 더 초점을 뒀다면 소설은 '성장'에 더 무게를 싣지 않았을까. 부모님까지 모셔서 유학을 만류하는 담임 선생님에게 자신이 피렌체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또박또박 말하는 타카오는 미호에게 보낸 메시지대로 어른이 된 듯하다. 또래 친구들이 그저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할 때 어떤 게 어른의 모습인지 나름대로 정의 내린 그는, 그가 동경하던 미호처럼 이미 어른스러운 면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걸 몰랐을까. 일찍이 철든 타카오가 자신이 나아갈 길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거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내는 모습을 보면 내 어릴 적을 보는 것 같다가도, 스물여덟이 되도록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지기도. 그러다가 얼른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아무튼 흔들림 없이 자신이 생각한 대로 묵묵히 걸어가는 타카오가 부럽다고 느꼈다.


돌아보면 내 성장기는 어른스럽다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크고 작은 선택들로 채워진 듯하다. 위로 열두 살, 열 살 터울이 나는 오빠가 둘이나 있는 늦둥이 딸로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응석받이 막내보다는 듬직한 첫째 딸 느낌이 난다고. 워낙 어릴 때부터 어른들 틈에 자라난 탓인지 말이나 생각, 행동이 딱 애늙은이였단다. 일찍이 스파르타식 학원에도 보내보고 채찍질도 해가며 키웠건만 부모 뜻대로 되는 건 없더라는 걸 두 아들을 거쳐 깨달은 엄마 아빠는 나를 그냥 내버려뒀는데, 오히려 나는 강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컸다고. 딱히 학원도 보내지 않아도 스스로 욕심을 채우려고 공부를 했다. 스무 살에 입학한 학교를 한 학기 만에 때려치우고 두 번째 수능을 치른 것도, 두 번째 학교에 들어가 두 배로 불어난 학자금(첫 번째 학교는 국립대였다. 내가 왜 그렇게 쉽게 때려치웠을까)을 스스로 감당한 것도 순전히 제 뜻이었다. 나중에는 학자금 벌기도 지겹고 대학교도 뭐 별 거 없다는 생각에 재학 3년 만에 쾌속으로 졸업을 해치우곤 내 뜻에 따라 쉴 새 없이 직장을 옮겨 다녔다. 무얼 하든 남에게 기대지 않고 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퍽 어른스러웠나 보다. 


하지만 나는 타카오의 부러움을 산 미호도, 멋지게 어른으로 성장한 타카오도 아니다. 그의 '구두장이' 꿈을 치기 어린 작심삼일로 치부한 쇼우타다.


한때 그가 축구 선수가 될 줄 알았던 것처럼- 내게도 꿈이 아주 뚜렷한 적이 있는데 나는 평생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친구들에 비해 월등하게 그림을 잘 그려서 칭찬을 받았다. 그림 그리기 대회에 빠짐없이 나가서 상을 쓸어 담는 친구가 바로 나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두 오빠가 전부 미대에 진학한 덕에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입시 미술을 시작했다. 사실 중1을 위한 입시 미술반은 없다. 그저 입시 미술학원 안, 색색깔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두른 수험생들 사이에서 나 혼자 취미도 아니고 입시도 아닌 무언가를 그렸던 기억이 난다. 나름 기본기인 선 긋기부터 시작해서 사과, 벽돌, 화분, 찌그러진 종이컵, 럭비공 등 점점 다양한 사물을 그려갔다. 중3은 돼야 예술 고등학교 입시 미술반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보다도 한참 전에 관뒀다. 당시에 돌풍을 일으켰던 인터넷 쇼핑 붐은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던 내게 "미술을 하지 않아도 옷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나는 뭐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는 편이고, 전공을 하지 않아도 옷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 미술을 관둬도 아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1학년쯤 그렸던 그림들.  '미술'이라는 뚜렷한 꿈이 있다는 걸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사실은 다 거짓말이다. 확고하고 뚜렷한 꿈을 갖고 우직하게 나아가던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적당히 그럴싸한 이유를 찾아서는, 심지어 나 스스로까지 속였다. 입시 미술의 문턱 근처에도 가기 전에 꿈을 포기해버린 진짜 이유는 내가 너무 풍경화를 못 그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선생님처럼 투명하고 영롱한 풍경 수채화의 묘미를 살리지 못했다. 더 잘하고 싶어서 붓질을 더할수록 탁해지기만 할 뿐. 더 끈덕지게 연습을 해야 할 시기에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내 믿음이 부서지는 걸 보고는, 다른 사람도 볼까 봐 얼른 묻어버린 셈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당시에는 내 평생의 꿈이었다고 생각했다) 간절하게 원했던 꿈을 너무나도 쉽게 놓아버린 이후로는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물어보는 게 정말 싫었다. 나는 아직 이 세상에 어떤 직업들이, 어떤 일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고작 엄지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은 칸에 내가 장차 커서 어떤 사람이 될 건지 적어 내라니,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이후로 어떤 직업을 가질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범한 직장인으로 책상에 앉아만 있는 일은 못 할 것 같고, 뭔가 전 세계를 누비며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자라온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어떤 일인지 모르겠어서 반기문 총장이 책을 낼 땐 외교관을 꿈꾸기도 하고, TV 프로그램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볼 땐 뭐 저런 걸 만들어내는 어떤 일을 꿈꾸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학교에서는 잊을 만하면 끈질기게도 내 장래 희망을 물어보는 탓에 '기자'를 동경하게 됐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상상하는 그 어떤 것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또 내가 잘할 것 같은 최적의 직업이 기자가 아닐까 생각하고 적어냈던 게 내 꿈이 됐다. 기자를 꿈꾼 덕에 실제로 기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잠시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는데, 기왕이면 언론사에서 일을 하자는 생각에 2년 동안 신문사 뉴미디어 부서에서 기사 쓰는 일을 했다. 외부에서는 나를 기자님이라고 불러도 내부에서는 그저 공채를 거치지 않은 계약직일 뿐이었지만, 기사를 쓰는 일은 즐겁고 적성에도 맞았다. 그래서 졸업하고 1년 정도는 소위 말하는 언론 고시에 도전해 기자들이 인정하는 진짜 기자가 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경험 삼아 몇몇 언론사에서 2차 전형(논술)을 봤는데, 결론은 졸업도 하기 전에 포기해버렸다. 기자 생활을 잘할 자신은 있는데 언론 고시 문턱을 넘을 자신은 없어서. 주변에는 "언론 완전 사양 산업이야. 내 눈으로 봤잖아" 하는 식으로 둘러대고는.


당시엔 찬밥 신세였던 디지털 부서에 계약직까지 서러운 일이 많았지만 내 직장생활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다.


스물여덟이나 되어버린 지금의 나는- 어릴 적 내가 "아무튼 책상에 앉아만 있는 건 절대 못 할 것 같다"던 평범한 사무직. 생각보다 책상에만 앉아 있는 일을 업무 시간을 연장해가면서 까지 훌륭하게도 수행하고 있다. 막상 축구 특기로 대학에 들어갔더니 날고 기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 틈에 부모님도 이혼하시고 가장 노릇을 해야겠으니 영업직을 택한 쇼오타와 똑같이. 나의 경우엔 스타트업을 택했다. 훗날 창업을 하고 싶다거나,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거창한 꿈 때문이 아니라. 가산점을 준다는 한국사나 매경 테스트 같은 것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며 피 말리고 싶지 않아서, 3년 반 경력이 있는 내게 스타트업은 비교적 간단하게 면접만 보면 되기 때문에. 교활하게도 덕분에 공백기 없이 무난하게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첫 직장, 마케터로서는 첫출발, 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콘텐츠'라는 경력의 연장선상. 나는 주니어 시기에 훌륭하게 기반을 닦아서 특정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돌아보면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장래 희망이 뭔지 적어 제출하라고 강요하는 학교도 없는데 내 스스로를 재촉했던 것 같다. 너 나중에 뭐 될래? 지금 얼른 네 꿈을 정해야 해, 하고. 반면에 스타트업에서는 이것도 저것도 경계 없이 닥치는 대로 하는 제너럴리스트로 무엇이든 얕고 넓게, 뭐든 적당히 해내는 게 중요했다. 스페셜리스트를 꿈꾸는 내게 더 절망적이었던 건, 난 아직 내가 어느 분야로 길을 좁히고 싶은지 여전히 모르겠는 와중에 제너럴리스트로서 역할을 너무 탁월하게 해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저 요즘 빅데이터나 AI가 대세인 흐름이 보이니까, 나도 이 전도유망한 산업에 무언가 내 역량을 엮어볼 요량으로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한시라도 제너럴리스트로 이 귀한 주니어 시절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마음에 첫 스타트업을 10개월 만에 관두고, 내 주력 분야인 '콘텐츠'와 희망 분야인 '데이터'를 함께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은 회사로 이직을 결심했다. 이런 조급한 심정을 전부 토로하고 이직하겠다는 말을 들은 팀장은 "네가 콘텐츠를 뽑아내는 재능을 스스로 과소평가하는 것 같다"며 "데이터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네가 가진 것에 좀 더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팀장의 조언에 감사했지만, 내 선택이 틀리지 않길- 결국은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곳은 입사 2개월 만에 퇴사를 결심했다. ㅎㅎ..


지금은 스타트업 속의 스타트업(신사업팀)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커리어를 쌓으면서 언젠가 큰 획을 긋고 싶은 내 다부진 꿈을 재촉한 건 아마도 "이십 대 후반의 여성"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결혼을 해야 하고, 아이도 낳고는 싶은데- 그럼 그전에 최소한의 어떤 선까지는 내가 올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하지만 나는 참 간사하게도 현실적인 인간이다. 지금 내 처지에 스페셜리스트가 문제가 아니다. 졸업하자마자 경력 사항을 10개월-2개월로 연속 단타를 친 탓에 당분간은 얌전히 직장에 붙어있기로 했다. 지금은 신사업팀에서 전례 없이 더 넓은 업무 스콥을 감당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다. 그동안 내가 거쳐간 꿈들은, 정말 내 욕망이었을까. 아직도 내 장래희망 칸은 채우지 못한 채, 스물여덟이라는 나이가 떠오를 때마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당장에라도 무언가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또다시 맹목적으로 꿈을 꿔야만 할 것 같다. 얼른 꿈을 이룬 어른이 되어야 할 것만 같다. 타카오에게 나는 미호일까, 쇼우타일까.

작가의 이전글 마음 놓고 망치는 용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