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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Jan 10. 2023

실무자이자 관리자라는 전쟁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이자 편집자이자 디자이너이자 마케터이자...

저는 8년 차 스타트업에 다니고 있습니다. 직무는 에디터이지만, 원고를 쓰는 건 수많은 업무 중 하나입니다. 원고에서 시각화할 부분을 디자이너와 논의하고, 채널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선정된 고객에게 알림 문자를 발송하고, 상품 발송을 위해 물류창고에서 출고를 요청합니다. 필요한 경우 콘텐츠에 광고를 집행하며, 어떤 콘텐츠가 반응이 좋았는지 분석하죠. 때때로 거래처에 세금계산서 발행을 요청하고, 세금계산서 발급을 요청받기도 합니다. 
 
 회사의 업무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사이드 프로젝트와 회사 업무가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둘 사이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더라도, 하나의 프로젝트 전 과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했습니다.  솔직히 회사에서 귀찮다는 이유로 ‘잡무’라 생각한 일조차 버릴 것 하나 없었죠. 만약 회사를 다니면서 독립출판을 추진할 예정이라면, 직무가 무엇이든 도움 받을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 검수원, 배송기사까지


회사에서의 기획 및 제작 업무가 동료들과 조율하는 과정이라면, 독립출판은 혼자 판단하고 여러 사람들과 소통하는 여정입니다. 2020년 9월부터 2022년 2월까지 약 1년 6개월 간 저는 ‘에로십 프로젝트’라는 시리즈를 완성시키는 작가였지만, 3월부터는 교정교열을 보는 편집자였고, 7월부터는 디자이너였습니다. 
 
작가일 때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편집자가 될 때부터는 요구하는 덕목이 달랐습니다. 도무지 꼼꼼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끝까지 오탈자를 잡아내야 했는데요. 몇 번을 봐도 오탈자는 등장했습니다. 이제 다 봤겠거니! 하고 책을 덮을 찰나 옆눈으로 ‘않’이 ‘안’으로 적힌 것을 발견할 때의 서늘함이란. 4월 초로 잡았던 자체 마감은 6월을 훌쩍 넘겼습니다. 
 
출판을 위해 1도 모르는 인디자인을 시작했습니다. 친절과 철두철미함을 겸비한 유튜버 그레이몬스터(GREYMONSTER) 님이 구세주였죠. 필요한 영상을 하나씩 보면서 배움과 실습이 동시에 이뤄졌습니다. 수습 편집 디자이너가 첫 프로젝트를 맡은 상황과 다름없었죠. 인디자인은 체계를 익혀야 하는데, 위계를 이해 못한 채 눈앞의 과제만 해결하려니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육안으로는 똑같은 검정인데 자꾸 “K100으로 설정해 주세요”라는 주문에 어질한 나날이었죠. 확장자도 화소도 문제 없는데 자꾸만 깨지는 바코드에 영문을 몰라 짜증스러웠습니다. 순간의 검색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한 탓에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기능도 여럿입니다. 
 



디자이너로서는 어땠을까요. 종이라곤 모르는 사람이 인쇄소 4곳에 전화를 돌리고 상담을 다니면서 디자이너의 우선 순위에 따라 어떤 것을 밀고 나가고, 어떤 것은 포기해야 하는지 느꼈습니다. 인쇄에 관한 얘기는 앞서 늘어놨으니 생략할게요. (인쇄 상담의 퀄리티는 어떻게 완성되는가) 
 
굿즈의 경우 포토샵은 익숙했지만, 인쇄에는 고려할 요소가 많았습니다. 고혹적 분위기를 내고자 어둡게 제작한 마스킹테이프 시안은 CMYK 수치가 총 300을 벗어나면 곤란하다는 지적을 몇 차례 들어야 했습니다. 결국 초기 디자인을 포기하고 명도를 조절해야 했죠. 총 20개를 주문한 마스킹테이프는 1개가 손실이 나 19개가 도착하고, 설상가상 기획자(저)의 착오로 2차 주문을 넣어야 했어요.
 



그다음엔 상품 MD와 마케터의 영역이었습니다. 텀블벅 상세 페이지와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목업 파일을 작업했습니다. 책 소개를 작성하고, ‘후킹'할 만한 카피를 추출했습니다. 펀딩을 시작한 뒤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타겟에 책을 알리면 좋을지 가늠하고, 다양한 광고 소재를 제작해 책을 홍보했습니다. 그 와중에 오프라인에서의 홍보용으로 QR 코드를 심은 미니 카드를 업체에 의뢰하기도 했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시간과 출퇴근길에는 책의 내용을 표현해줄 본문을 발췌하고, 본문을 재구성한 카드뉴스 원고를 쓰곤 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모니터 앞에 앉아 카드뉴스를 제작했죠. 사전에 오픈 예정 알림을 사용하지 않은 탓에 27일간의 펀딩 기간 내내 전쟁이었죠. 촉각을 다투는 일정 속에서 이틀 걸러 만든 SNS 게시물은 매번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이번엔 겨드랑이 페티쉬 단장 카드를 만들까?’ ‘야하고 로맨틱한 키스 이미지로 책을 소개해보자’, ‘향기에 관한 본문을 활용해 향 관련 댓글 이벤트를 열자. 디자인은 싱그러운 우디향을 닮은 초록색으로 해야지’, ‘섹스에 대한 거짓말은 흥미로운 소재일 테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부분을 가공해 카드뉴스를 만들자’ 등등. 결과적으로 광고 소재 역시 ‘먹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했답니다.




말미에는 책 300부를 수령해 한나절 동안 검수를 했습니다. 파본을 추린 뒤 이튿날 인쇄업체에 로스율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책을 배송하기 위해 공간 낭비와 환경 오염 없는 상자와 포장재를 찾을 땐 물류팀 직원이었고, 리워드별로 물품을 분류하고 포장하는 데에는 내리 4시간이 걸렸죠. 강박적으로 배송지를 확인 후 운송장을 부착할 땐 택배 기사였고요.






출판 내내 전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PM이었지만, 동시에 실무자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회사에서 직간접적으로 해온 업무가 큰 도움이 되었죠. 독립출판, 이미 해본 누군가는 고생길이 훤하니 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정량적 이득을 생각하면 해서 득될 일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인생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 독립출판을 완수하면서 얻은 가르침은 큽니다. 가장 큰 수확은 스스로 역량을 발휘하는 지점과 취약해지는 순간을 알게 됐다는 점입니다. 일정 관리인지, 변수에 대처하는 순발력인지, 낯선 분야 전문가와의 소통인지, 성과가 보이지 않는 상황인지 등 무엇에 힘듦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죠. 그 가운데 다시금 결점을 확인하기도 하고, 스스로 한정지었던 한계도 뚫을 수 있었답니다.
 
누군가 독립출판을 준비한다면, 저는 한껏 응원하고 싶어요. 출판사와의 계약을 통해 책을 출간한다면 한결 수월하겠지만, 혼자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수행하는 일은 본인을 크게 성장시킵니다. 독립출판을 하면서 얻은 깨달음, 여기서 이제 마치겠습니다. 저는 다시 글쓰기의 루틴으로 돌아갈게요. 곧 다시 돌아오기를 기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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