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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불불헛뛰

세상은 뻥일지도 몰라, 사랑이 없다면

스님과 구걸과 신해철의 <그대에게>를 들으며

by 궁금한 민지

망설임 없이 살피기: 세상은 진짜


서울행 1호선. 나인 투 씩스의 직장인을 한 트럭 실어보낸 오전 10시. 전철은 한산하다. 책을 펼친다. 구걸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복되는 문장이 멈춘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스님이 서 있다. 그에게 무언가 건네고 있다. 감사합니다, 란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앉는다. 스님은 그에게 묻는다. 잠은 어디서 자요? 그 순간 내 안에서 뭔가 일어났다. 아, 세상은 진짜구나.


Taiki Ishikawa @unsplash




좋은 사람 말고, 자아를 잊으세요


임지은과 니키 리의 대담집 <애정행각>. 두 사람은 말한다. ‘가짜 다정’을 멈춰야 한다고. 여기서 다정이란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동 양식. 목표란 아마도 좋은 사람 되기. 동방예의지국에 유교 사상이 사골까지 우러나는 한국인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뭐, 그게 어떤가? 나는 그들의 주장에 절반만 동의한다. 다정함을 강조하는 세태는 퍽퍽한 인생을, 다정함을 연기하는 사람은 실상 텅 빈 내면을 감추려는 제스처일 뿐이라지만, 내면과 외면은 투과성 높은 화선지다. 속 빈 강정이라도 다정한 표현이 진짜 다정을 낳을 수 있는 걸. 모든 표현은 흉내다. 태초에 우리는 그렇게 사랑의 언어를 획득했다.




인생을 만끽하기: 복숭아를 먹으며 한눈을 팔아요


<최성운의 사고실험>에 등장한 유태오는 삶을 감각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1] 그는 언젠가 선배 최민식을 만난 일화를 소환한다. 선배 최민식은 ‘먹고 노는 게 우리 일인데 어쩌겠느냐’고 했다. 배우의 일이란 곧 ‘삶을 만끽하기’. 오감도, 감정도, 고통도, 즐거움도 온전히 경험해서 배역이 왔을 때 쏟아붓는 일. 넉 달 전, 벚꽃이 흐드러진 부천의 장미공원에 가서 적었던 문장을 떠올린다. 주변의 아름다움에 한눈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세상의 많은 문제는 수그러들지 않을까, 했던. 뒤돌아 보지 않고 멈추지 않고 남들과 비교할 새에 내 맘을 빼앗아가는 것들에 한껏 맘을 다 줘 버린다면.




거침 없이 응원하기: 사랑을 말하는 오른손, 사랑을 행동하는 왼손


B와 파경 위기를 거치고 감정을 쓸어내리던 나날. 2주째 이어진 면접 일정이 끝나는 날이었다. 면접을 끝내고 미용실에 가서 새치 염색을 했다. 신속한 손놀림의 미용사 선생님은 해가 땅에 닿기 전 시술을 끝냈다. 아직 해가 떠 있다니! 귀가하기 아쉬운 맘에 집에서 10분가량 떨어진 코인 노래방으로 향했다. 평소 곧잘 부르는 김윤아와 GD의 ‘officially missing you’와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불렀다. B와 만나면서 자주 듣게 된 신해철이 떠올랐다. ‘그대에게’ 불러야지. 땅밑에서 솟구치는 장조 음계는 몸 안팎에 쌓인 감정의 때를 파워 수압으로 씻어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나는 그대 숨결을 느낄 수 있어요.’ 이상하다.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 더는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쯤엔 신해철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나 왜 이래? 노래방을 나올 때쯤엔 코를 훌쩍거리며 친구에게 카톡을 했다. ‘막곡으로 그대에게 부르다가 울컥함 졸라 웃김 ㅋㅋㅋㅋㅋ’


음악을 들어보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하는 순간부터 반주가 바뀐다. 무한동력을 가동하는 듯한 왼손 반주다. 나는 눈물을 비웃음으로 덮어버리는 연약한 어른이다. 비웃음은 간사한 어른의 것이더라도, 눈물은 외려 성숙함의 증거다. 그러니까 정직한 내면아이는 알았던 거다. 누군가가 ‘그대를 포기할 순 없어요’ 라고 말해주기를. 내면에는 무한한 사랑의 폭격을 그리워하던 내가 있었다.


신해철의 노래는 지금껏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매트리스 같다. 촘촘하고 첨예하게 돌아가는 왼손 반주는 매트리스의 뼈대. 어느 누구도 지쳐 드러누워 삶을 포기하도록 두지 않는,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용 에어매트.


나는 아마 다음번에도 힘들 때면 노래를 부를 것 같다. 철든 어른 흉내 내는 자아는 못 터뜨리는, 중요한 감정을 열어줄 테니까. 그땐 직격탄으로 들을 수 있을 거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더라도 내 손을 놓지 말아줘’ 라는 외침을.



신해철의 ‘그대에게’는 아버지 몰래 대학가요제에 나가려고 했던 신해철이 이불 뒤집어 쓰고 멜로디언 불어가며 만든 곡이다.[2] 처음엔 무려 10분 넘는 대곡을 만들려다가 숨차서 접었다지. 몸만 부푼 어른의 눈물샘을 한 방에 터뜨리는 노래. 누군가를 응원하려면 궤도를 이탈하더라도 숨찰 때까지 밀어붙이는 패기가 있어야 하나 보다.

1988년 제12회 MBC 대학가요제의 무한궤도(신해철) - '그대에게' 무대



사랑이라는 언어를 번역하기


사랑을 말하는 때의 느낌을 감지한다. 오전 8시, 눈뜨자마자 거는 전화에서 하는 ‘사랑해’는 하루 잘 보내라는 뜻. 오후 4시, 낮잠 자다가 말고 보내는 ‘사랑해’는 네가 무엇을 하든 긍정한다는 뜻. 저녁 8시에 전하는 ‘사랑해’는 선선해진 밤공기와 걷고 싶은 상대로 당신이 생각난다는 뜻. 자정이 다가온 시각 3분 남짓한 짧은 통화 속 ‘사랑해’는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사랑해’라는, 상대를 향한 일관성 있는 애정의 표현. 만남이 있었던 날이라면 ‘오늘도 즐거웠어’라는 표현으로도 치환되는.


이찬혁이 정규 2집 앨범 [에로스(EROS)]로 돌아왔다. KBS 열린음악회에서 치른 컴백 무대 ‘멸종위기사랑’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었다. ‘사랑해’ ‘정말로’와 ‘사랑의’ ‘종말론’ 사이 어디쯤으로 들리는 가사는 뒤이은 ‘아무도 안 믿었던’을 만나며 양갈래의 메시지를 강화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고백을 믿지 않는 것과 사랑의 종말론을 믿지 않는 것의 간극. 사랑을 믿지 않는 것과 사랑의 종말론을 믿지 않는 것. 사랑을 믿는다는 것과 사랑의 종말을 믿는다는 것.


이찬혁 (LEE CHANHYUK) - '멸종위기사랑' M/V


좋아 보이는 커플이 대체 뭔데


최근에 본 셀린 송의 신작 <머티리얼리스트>에는 160억 원 자산가 신-보이와 진하게 사랑했고 통장에 300만 원도 없는 전-남친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 루시가 나온다.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신-보이 해리는 말한다. “우리는 멋진 커플이 될 거예요.” 멋지다는 말에서 제3자의 관조적 시선이 묻어난다. 언젠가 친구와 부부 사장님이 운영하던 카페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린다. “저렇게 같이 일하는 거 좋아 보인다. 근데, ‘좋아 보인다’는 건 뭘까?” 좋아 보이는 커플. 해리와 루시는 사람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커플’이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좋아 보이는 커플은 한병철 철학자 식으로 말하자면 시각적 부침을, 내면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매끄러운 비주얼에 가깝겠다. ‘좋아 보인다’라는 말엔 실체가 없으니 ‘좋다’라는 말로 넘어가자. ‘좋다’라는 표현은 다채로운 느낌과 욕구를 뭉뚱그린다. 사랑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고, 상대의 모든 액션을 응원하고, 아름다운 그림과 맛있는 음식과 산뜻한 공기를 같이 누리고 싶다는 나의 바람과 오늘 하루도 살아내느라 고생한 상대에게 보내는 꾸준한 격려로 말이다.


루시는 자신이 매칭을 성사시킨 고객의 결혼식에서 예식을 앞두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고객을 바라본다. 고객은 루시에게 말한다. 결혼하려는 이유가 너무 치졸하다고. 루시는 그 치졸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고객은 말한다. 언니를 질투했다고, 언니보다 더 나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었다고. 루시는 말한다. 그 남자가 당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군요.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도 그렇지만 상당히 멍청하다. 커플의 ‘좋아 보이는’ 모습에 꿈뻑 넘어간다. 좋아 보인다는 게 뭔데. 물론 루시가 펜트하우스에 사는 해리와 결혼한다면 길바닥에서 주차비 몇 달러 아끼겠다고 기념일에 예약해둔 레스토랑을 두고 존과 했던 실랑이를 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 몇 달러 아끼자고 씨름하지 않는 것은 분명 ‘좋은’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는 가난함이 만드는 필연적 이슈라기 보다는, <우선순위에 따른 상황 판단의 차이에서 오는 이슈>라는 해석이 더 진실에 가깝다.


남들 눈에 좋아 보이는 커플은 서로에게 무엇을 줄까. ‘좋아 보이는 커플’이라는 타이틀의 획득은 그들의 관계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게 필요한 거다. 뭐가 좋은지, 뭐가 좋아 보이는지에 대한 정확한 풀이 말이다. ‘좋다’라는, 품질을 판단하는 어휘 대신 필요한 건 그 설명이다. 어떤 커플의 무엇이 좋아 보이는지 말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도달한다. 나는 그들 커플의 사정 무엇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지난해 부천 아트벙커B39에서 상영한 장영해 작가의 단편 영화 <Generation>에 대한 작가의 언급이 힌트가 될 수 있겠다. 장영해 작가는 말한다.[3] 진짜 사람을 찍는 일과 AI로 이미지를 만드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AI가 만든 이미지는 결과물을 확대해도 포착할 대상이 없다. 거대 이미지를 학습해 만든 결과물은 사람의 피부 표피 하나, 사물의 긁힌 흔적을 재현할 수 없다. 전체를 모사할 게 아니라면, 줌-인 할 수 없는 것이다.


‘잠은 어디서 자요’는 한 사람을 향한 아주 꼼꼼한 안부 인사. 그 한 마디가 없는 세상은 완전히 가짜가 아닐까. 그날 스님의 말을 듣고 난 나는 세상을 가라로 살아온 느낌이었다. 23년 가을, 유튜브 요정재형 채널에 나온 이효리는 말한다.[4] 자신의 꿈은 <진짜 사랑하는 것>이라고. “내 필요에 의해서 그런 거 말고, 의지하는 거 말고. 모두를 진짜 사랑하는 거.” 이어오는 말. 불가능일 수도 있을 거 같아.

Youtube 요정재형에 출연한 이효리


나의 필요와 의지하고 싶은 욕구를 걷어낸 사랑. 진짜 사랑을 했던 순간은 인생 전체에서 몇 분이나 될까. 결백하지 못함을 바로 시인한다. 2022년 봄을 채웠던 <나의 해방일지> 엔딩을 이제야 조금 이해한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스러워지는 존재. 조건 없는 사랑으로 가득 찬 볕 든 세상을. 이찬혁이 ‘멸종위기사랑’을 발표한 세상을 줌-인 해 본다. 당신 눈에는 뭐가 보이는지?


세상은 내게 완전한 뻥이거나 진짜가 돼 버렸다.







[1] 배우 유태오가 말하는 자신만의 ‘벽’을 넘어선 방법, Youtube 최성운의 사고실험, 2025.4.29

[2] 20억 빚 신해철 "<그대에게> 이불 속에서 작곡", 데일리안, 2008.7.17

[3] 말하자면 장영해의 장르는 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2024.9.27

[4] 오은영 박사님 여기 좀 보세요! Youtube 요정재형, 2023.10.22


표제 이미지,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스틸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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