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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May 08. 2021

리얼돌에 섹스가 웬 말이야

분별 없는 세상에 띄우는 냉소적 에세이

섹스는 언제부터 배설욕이 되었을까


최근 리얼돌이 화제입니다. 여성의 외관을 본뜬 인형이 남성의 성욕을 충족하는 물건으로 대두되면서 이슈가 되었는데요. 사람들은 리얼돌과 리얼돌 판매자와 소비자들에게 ‘그깟 성욕 하나 자제 못 하고 역겹다’고 말합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욕은 원래 끔찍하고 역겨운 무언가로 취급받았다는 겁니다. 한편 성욕에 따라붙는 단어는 항상 '해소'였는데요. 이는 제때 풀어줘야 하는 무언가를 연상시킵니다. 곧 해소되지 못한 성욕은 사회악을 만든다는 시각이 팽배하죠. 


성욕은 참아야 하는데 동시에 해소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위치에 놓입니다. 그야말로 옴짝달짝 할 수 없는 처지죠. 속된 말로 '마려운데 참는다'는 느낌이 어울립니다. 섹스가 언제부터 똥을 연상시키는 배설욕에 가깝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섹스를 흥분과 사정의 일련의 과정으로만 본다면, 과연 그럴지도 모릅니다. 성욕이 욕구라면 앞서 말한 배설욕이나 식욕처럼 해결법이 명확합니다. 비우거나, 채우면 끝이니까요. 하지만 성욕은 바로 그 측면에서 욕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영화 <돈 존> (2013), 네이버영화


성욕이 3대 욕구니 어쩌니 하는 얘기는 그만.


성욕은 욕망에 가깝습니다. 분명 자연은 종의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성적 욕구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섹스는 이 번식의 밑그림을 바탕으로 인간 심리와 문화가 빚어낸 총체적 욕망입니다. 섹스를 원하는 마음에는 누군가의 오나홀 혹은 딜도로서 쾌감이라는 에너지를 교환하려는 욕구 외에도 타인이 나를 갈망하길 바라는 욕망, 심리적 위안으로서 타인에게 안기고 싶은 욕망, 혹은 사회적으로 억제된 폭력성을 드러내거나 복종하고 싶은 욕망 등이 어우러져 있죠. 그건 흥분과 오르가즘이 기민하게 연동된 남성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런 면에서 리얼돌에 하는 자위는 결코 섹스가 될 수 없습니다. 딜도에게 욕망이 없듯 리얼돌에는 욕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삽입하기를, 혹은 자신을 품어주기를 바라지 않죠. 그 물건들은 완전한 객체입니다. 아무리 그게 인간의 형상을 띤다 한들 말이죠. 리얼돌은 상대의 욕구를 수용하지도, 인정하지도, 승인하지도 않습니다. 리얼돌을 문제 삼으려면, ‘그들에게 성적 동의를 얻어야 하는지’ 논의가 필요할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자위를 허락받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환상에는 죄가 없는데요


자우림의 ‘idol’이란 노래를 잠깐 보고 가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유치한 감상에 빠지는 게 아니야 /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이라는 것쯤 누구보다 잘 알아 / 그래도 나는 꿈을 꾸잖아 이상한 이 세상에서도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흘기는 네가 난 더 불쌍해’라는 가사입니다. 화자는 환상과 현실에 대한 분별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쇼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맘껏 사랑합니다.  


리얼돌에 대한 관심은 아이돌에 빠지는 심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환상’이라는 단어가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리얼돌은 상대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맘 놓고 하는 사정을 구현한 오브제입니다. 아이돌에 대한 애정 역시 상대의 리액션은 중요치 않죠. 내 페이스대로 흥분하고 가버려도 리얼돌은 화내지 않습니다. 아이돌 역시 시도 때도 없이 호출당해도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이미지를 소비하라고 제공하죠. 리얼돌에 잘못은 없습니다. 오로지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분별없는 사람이 문제죠.


영화 <엑스 마키나> (2015), 네이버영화


달콤한 데 빠지는 게 뭐가 나쁘단 건지
헛된 망상에 빠지는 게 뭐가 나쁜지
-자우림 <idol>     


만약 어떤 이성애자 여성이 드라마 속 남성 캐릭터와 현실을 비교하며 “요즘 남자들은 00도 안 하고, 00도 부족해!”라고 외친다면, 현실 감각이 결여돼 있다고 지적할 겁니다. 마찬가지로 부러질듯한 허리에 가슴이 터질 듯한 어떤 리얼돌을 두고, 한국 여성들의 몸매를 지적하는 남성이 있다면, 이 역시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고 꼬집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측은지심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리얼돌이나 로맨스 드라마를 소비한다고 현실과 환상을 구분 못하는 게 아니죠. 

 

환상에게는 환상의 자리를 허락해야 합니다. 드라마 속 로맨스에 죄가 없는 만큼 성욕에 대한 판타지에도 죄가 없습니다. 인간은 현실만으로 살아갈 수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환상은 인간의 결핍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우는 강한 생명력을 지녔습니다. 머릿속에서는 수간을 하든, 한기가 느껴지는 메카닉한 로봇에 사정을 하든, 왕자님이 나타나 구겨진 외모에 성격도 구김살 가득한 당신을 구조해 신분상승을 이룩하든 상관없습니다. 다 판타지일 뿐입니다.     






내게 무해한 자위 기구


혹시 리얼돌 관련 기사에 '이제 어제 필요없네' 같은 댓글을 본 적이 있는지요. 그 흔한 댓글이 맞는 말이 되려면, 자위와 섹스에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손으로 하는 자위든 여성과 나누는 섹스든 다르지 않아야 하죠. 곧 자신의 성욕은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명함으로써 리얼돌을 여자의 대체품으로 삼을 수 있겠죠. 그들의 섹스에는 타인이 자신을 욕망하길 바라는 욕망 따윈 들어설 틈이 없습니다.      


영화 <셰임>(2013), daum 영화


섹스는 볼트와 너트의 조임이 아니야.     


인간 여성과의 교류에 지쳐버려서, 섹스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섹스가 일종의 대화임을 생각하면, 분명 섹스는 피로한 일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공간을 내어주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일입니다.그럼에도 우리는 섹스를 합니다. 솔직히 섹스를 성기를 결합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요. 섹스는 단순히 물리적 결합 외에도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안정감과 자신의 매력에 대한 확인, 에너지를 억압하거나 해방하려는 심리가 물감으로 마구 덧칠한 캔버스와 같습니다.     


많은 남성들은 여성에게서 인정욕구와 외로움을 충족하길 바랍니다. 여성도 강도가 다를뿐 마찬가지고요. 인간은 타인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성적 끌림이 있는 상대와 맨몸을 섞고,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과정은 분명 인형이 줄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한시적일지언정 쓸쓸함도 덜어주죠. 마음까지 통하는 상대라면 지속적인 형태의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존감을 깎고, 외로움을 배가하고, 배신하는 것도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리얼돌은 내게 무해한 자위기구죠.     





네 애인이면 괜찮냐고요?      


누군가는 물을 겁니다. '네 애인이 리얼돌을 사면 괜찮느냐'고요. 이게 건전한 논쟁이 가능한 질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답하자면 리얼돌을 구매하는 남성과 교제하고 싶진 않습니다. 말 그대로 마음이 거부하는 감성적인 이유라 설명은 포기하겠습니다. 그의 자취방에 놀러갔더니 160cm 신장의 여성을 본뜬 실리콘이 앉아 있는 모양이 영 탐탁친 않은 것 같습니다. 머리론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딱 그 경우죠.    


A는 여유가 된다면 리얼돌을 살 의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왜 굳이 ‘그따위’ 모양이어야 하냐고 묻자 “취향이니까”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거북함을 억누르고 세상 열린 인터뷰어의 마음가짐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리얼돌은 ‘구현된 판타지’일 뿐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확인했죠. 남녀인 우리 사이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만큼의 거리가 있다는 걸요.  

    

영화 <그녀> (2014), 네이버영화


진짜 감정을 감당 못하는 게 좀 짠하긴 하네.
-영화 <그녀>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어떤 남성이 리얼돌을 산다고 그 자체로 그를 여성을 오나홀 취급하는 사람이라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리얼돌은 자위기구니까요. 저는 자위기구와 인간을 구분할 수 있고, 그들도 둘을 구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레짐작 상대방의 지위를 깎고 싶진 않아요. 계속 강조했듯 환상은 환상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미저리> 속 애니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가장 천하게 취급받는 성욕과 판타지를 옹호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긴 글을 쓴 건 일부 사람들의 비약적인 상상력을 비판하고자 함이었죠. 환상이 현실의 우리를 해칠 거라는, 그 믿음 말이에요. 언제나, 상상력이 문제입니다. 인공 반려자를 흉내내는 기만적인 리얼돌이 시장에 나오지 않는 한은요. 아직은 시기상조인 걱정이라고 봅니다. 





최후의 남자를 찾아서    

 

성욕이 욕구로 전락한 세상에는 자위만 존재합니다. 바이브레이터든 리얼돌이든 죄다 ‘반려기구’의 이름을 붙인 채 인간의 자리를 넘봅니다. 마케팅 용어로는 인정하지만, 진심은 아니길 바랍니다. 저는 사람들이 욕망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이 동물과 신과 구분되는 것은 욕망 때문이니까요. 인간을 나약하고도 괴팍하게 만들면서 때로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하는 핵심이니까요. 우린 모두 외롭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습니다. 그건 어떤 섬세한 기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인간의 존재조건입니다.      


섹스가 죽어가는 세상. 저는 최후의 남자를 찾으러 도망칠 겁니다. 연인의 성욕을 자극하는 건 리얼돌이 아닌 제가 되고 싶습니다. 당연히 상대는 자위와 섹스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겠죠. 사랑에 대한 판타지도 있는 남자일 겁니다. 그를 위해서는 기꺼이 콜걸이 될 수 있죠. 그게 유일한 제 환상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들은 환상에서만, 현실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투쟁과 타협으로 판타지와 현실을 조율해 나갑니다. 그게 한 쌍의 연인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이죠.


섹스와 자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 영국의 미래학자 이안 피어슨은 2050년이면 인간 대 인간의 섹스보다 로봇과의 섹스가 더 많아질 거라 전망했습니다. 주체성이 결여된 로봇에의 자위가 어떻게 섹스가 될 수 있는지 따져묻고 싶네요. 모두가 장난감과의 자위를 섹스라고 착각하는 시대라니. 섹스의 종말이 머지않았다는 예고가 계속 들려옵니다. 지금, 당신의 ‘섹스’는 안녕한가요? 


영화 <클로저>(2005), 네이버영화


이전 11화 “네가 끝내주는 섹스를 못 해봐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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