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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Nov 20. 2021

넌 결코 나처럼 사랑하지 못할 거야

사랑, 힘의 부등호를 기꺼이 끌어안기

사랑, 힘의 부등호를 기꺼이 끌어안기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화이트>를 보고 읽는다면 훨씬 이해가 수월합니다.



맘 가는 사람에게 1/N은 없다


에로티시즘과 가장 밀접한 단어는 뭐가 있을까요. 바로 ‘밀당’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아직 어색한, 그 서툰 정열의 불길에서 상대를 향한 마음은 자그마한 바람에도 저항하듯 타오르기도, 한없이 뜨거운 온풍에도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가라앉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인풋에 비례하는 아웃풋이라곤 기대하기 힘든 변화무쌍한 나날이죠.


이때의 밀당은 한정된 관심을 요리조리 할당하는 전술보다는, 없는 자원 있는 자원 다 끌어서 배팅하는 도박에 가깝습니다. 선뜻 다가갔다가 금세 뒷걸음질 치는 통에 벌어지는 엎치락뒤치락이죠. 요는, 상대가 좋으면 눈앞의 손실이나 이득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당장의 손실은 상대를 붙들어두는 구실이 될 수도 있죠. “오늘 제가 밥 살 테니까, 담에 술 사 주세요”가 된다, 이 말입니다. 현찰 거래과는 아주 거리가 먼, 어음 거래죠.


얻어먹은 음식이나 잠시 맡긴 물건이 다음번 만남을 기약하는 매개가 됩니다. 그건 와인 바에서 나눠 먹은 보틀 값일 수도, 상대에게 빌려준 장갑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맘에 없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냉철한 정신을 바탕으로 효율을 추구하죠. 만남은 중간 지점에서, 저녁 값은 N분의 1로 돌아가는 길에 저녁값을 부칩니다. 괜한 빌미를 남겼다간 일이 번거로워지니까요.


사랑을 시작할 때 모두가 거치는 분별없는 열정의 단계. 밀당이 에로틱한 열정이 표현되는 방식이라면, 분배는 에로틱한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입니다. 그건 마치 너무나 공명정대해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과 같죠. 그런 의미에서 사랑과 공평함은 무관하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가 있는데요. 바로 폴란드 영화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화이트>입니다.

영화 <화이트> 포스터, 네이버영화




넌 결코 나처럼 널 사랑할 수 없을 거야


이 영화는 사랑과 권력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이제 막 결혼한 카롤과 도미니크.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롤은 관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미니크에게 이혼당하죠. 아내를 따라 프랑스에 온 그는 처음 프랑스에 왔을 때처럼 혼자가 됩니다. 손에 들린 건 여행 가방 1개뿐. 발기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쇠약한 육체까지. 그의 절망은 가늠하기 어렵죠.


둘 사이에는 힘의 추가 맞춰진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수라고 여겨지는 대등함이 성립된 적이 없죠. 눈부신 외모에 든든한 경제력, 모국의 편안함을 등에 업은 프랑스인 여성 도미니크와 외모도 뒤쳐지고, 제 이름으로 된 계좌 하나 없으며 불어도 서툰 폴란드인 남성 카롤 사이에는 엇비슷한 평등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들 사이에 힘의 균형이 이뤄진 순간은 서로의 권력 차를 받아들이기로 서약한 결혼식 때뿐입니다.

영화 <화이트>, 네이버영화


도미니크는 왜 카롤과 결혼했던 걸까요. 도미니크는 어쩌면 그에게 성적 만족을 기대한 건 아니었을까요. 그녀가 원한 스펙이 오로지 <잠자리에서 자신과 맞먹을 수 있는 섹슈얼 에너지>였다면, 그의 부진한 잠자리 능력은 이혼 사유로 충분합니다. 나머지 분야는 모두 그녀 쪽으로 기울지언정 섹스만큼은 자신과 맞수가 되어주길 바란 거죠. 결혼에 따라붙는 수많은 조건을 고려하면, 그게 성이라고 해서 파렴치하게 보긴 어렵습니다.


이미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두 사람. 도미니크는 카롤과 어두컴컴한 자신의 가게에서 정사를 시도합니다. 그의 성기를 막 삽입하지만 금세 낙담하죠. 도미니크는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라고. 냉혹한 심판자의 얼굴로 변한 그녀의 대사입니다. 연이어 그녀는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해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라고 덧붙이죠.


무슨 헛소리일까요. 하지만 저는 막연히 그녀의 말을 이해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는 갑의 위치에서 카롤에게 자신이 가진 자원을 온전히 이양하려고  겁니다. 스포일러를 더해볼까요. 도미니크에게 처참히 버림받은 카롤은 폴란드로 돌아가 자신의 업을 살려 미용사로 재기합니다. 사업소득에 이어 보디가드를 사이드 잡으로, 또 부동산에 투자해 불로소득까지 막대한 재산을 모으죠.


처절한 복수였을까요, 사랑을 되찾으려는 눈물 어린 노력이었을까요. 그는 도미니크 앞으로 상속을 약속하고 죽음을 위장합니다. 장례식장에는 눈물을 훔치는 도미니크가 나타나죠. 장례식 후 호텔로 돌아간 그녀는 살아있는 카롤과 재회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미니크와 카롤은 그제야 온전히 섹스를 하죠. 이후 카롤이 자리를 비운 새 경찰이 들이닥치고, 도미니크는 남편을 죽인 혐의로 체포됩니다.


어떻게 도미니크는 죽음을 위장한, 살아있는 남편에게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었던 걸까요. 추측하건대 도미니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카롤이 그제야 ‘자신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걸 가졌어도 기꺼이 한 여인만을 바라는 남자가 됐다고 본 거죠. 오로지 잠자리에서 사랑해주길 바랐던 자신처럼요. 비로소 그가 갑이 사랑하는 방식을 이해하게 됐다고 여겼겠죠.




에로틱 러브, 기꺼이 내어주고 착취하기


사랑에도 갑을이 있습니다. 아니, 사랑이야말로 권력 차가 다른 어떤 관계보다 큰 관계입니다. 적어도 친구 같은 연애를 한 번도 하지 못한 저로서는, 그러니까 에로스적 에너지가 가득 찬 연애만을 해온 저로서는 언제나 역전이 가능한 권력관계에 놓여왔죠. 한 쌍의 연인은 사랑이라는 통치체제를 수용합니다. 그 안에 힘의 중심축은 분명히 존재하죠. 통치자가 바뀌는 혁명은 쉼 없이 일어날 수 있지만, 체제 자체가 무너지진 않습니다.


사랑과 권력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여전히 의아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우정이 사람 간 대등한 힘의 균형 속에 싹트는 격려의 친밀감이라면, 사랑, 그중에서도 에로틱한 사랑은 대등함에 관심이 없습니다. 에로틱 러브에서 상대는 나와 경쟁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기꺼이 내가 가진 것을 내어주거나 흡수할 대상입니다. 통념과 달리 을은 을대로 약한 자의 위치에서 취할 것이 있고요.


물론 한쪽으로 기울어진 판에서도 일부 분야는 경쟁의 영역에 놓입니다. 갑도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자신과 힘을 겨뤄줄 상대를 원하죠. 도미니크에겐 그게 잠자리였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카롤은 도미니크와는 다른 인간이었습니다. 그에겐 자존심이 너무나 중요했으니까요. 그가 결혼 이후 발기불능에 빠져버린 것이나, 제 계략대로 움직인 도미니크를 보고 다시 육체적 기력을 회복한 것이 이를 증명하죠.


영화 <화이트>, 네이버영화


에로틱한 사랑은 한쪽으로 꺾인 힘의 부등호를 견딥니다. 저는 에로티시즘이 바로 그 지점에서 본질적으로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문학작품 속 낭만적 사랑이 신분이나 계급차를 반복해온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권력 차가 벌어질수록 연인이 지닌 낭만성은 강화됩니다. 갑은 가진 것을 을에게 양도하고, 을은 갑의 것을 탐욕스레 빨아들입니다. 여기에 평등 따윈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체제를 승인한 두 사람의 결과적 협력만이 존재하죠.


누가 누구에게 아깝다, 라는 건 사랑의 울타리 바깥에서 경쟁의 언어만을 취하는 세간의 판단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그 꺾인 부등호만큼 더 깊이 사랑할 테니까요.

한 쌍의 연인은 모든 것을 겨루는 힘의 논리에서 탈주한 채 자기들만의 언어로 힘의 부등호를 끌어안은 공모자들입니다. 당신은 당신과 연인 중 누가 더 우월한가요. 혹은 당신은 그에게 무엇을 착취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공고하게 기울어진 부등호와 라이벌인 구역을 나눠보세요. 우리에겐 아주 다채로운 저울들이 존재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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