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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Jul 18. 2021

5억년을 초월한 화가의 상상력

호쿠사이는 분명 N 유형이었을 거야

환상에 현실을 부비면


'지나가다 전 애인을 만나면 어떡하지'

'지구에 외계인이 내려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MBTI 붐이 한창일 때, 한 유튜브 채널에서는 세상을 인식하는 S-N 유형의 상상력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현실 기반 상상력과 초월적 요소가 더해진 상상력의 차이라는데요. 전 N 유형이지만 차이가 확 와닿진 않았습니다. 길거리든 지구든 현실이 배경인 건 똑같으니까요. 무엇보다 모름지기 환상이란 현실과 비현실적 요소가 버무려질 때 빛을 발하는 법. 물리적 제약을 부수는 상상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가만 앉아있다가 회사를 뛰쳐나가는 상상만큼 짜릿한 게 없듯이요.


하지만 상상력이 금세 바닥을 드러내는 분야가 있는데요. 바로 섹스입니다. 희한하게 야한 상상에는 현실이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현실에 전혀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면 좋을 텐데, 늘상 접하는 음식이나 사물, 상황에 엉뚱한 발상을 더한 것이 성적인 상상의 8할을 차지합니다. 곧 N이고 S고 나눌 것도 없이 상상력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뭐한 진부함이 가득하죠.


youtube ‘이십세들’ “넌 너무 생각이 많아” 상황별 S와 N의 차이 편



야한 상상이 거기서 거기인 이유


문득 생각합니다. 섹스라는 영역 특성상 굳이 현실을 떠난 상상은 필요치 않은 것이 아닐까, 하고요. 이미 섹스는 그 자체로 미지의 것입니다. 우린 대화를 통해 타인의 삶을 스케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먼 사이라도 SNS만 보면 얼추 그의 일상을 그려볼 수 있죠. 산소조차 희박한 우주여행조차 최신 뉴스와 과학 책을 읽으면 어느 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대를 무대로 한 둘만의 섹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리기 힘듭니다.


성이란 내가 겪어온 것이 전부입니다. 보고 들을 창구가 없으니 따라  것도, 가늠할 것도 없습니다. (야동은 연기이니 별개로 하겠습니다) 설사 타인의 섹스에 대해 안다한들  삶에 적용하긴 쉽지 않습니다.  몸은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만의 것이며, 함께  사람 역시  다른 사람입니다.  


아직 살을 섞지 않은, 관심 있는 상대와 살을 섞는 설정만으로 상상력은 많은 에너지를 요합니다. 눈앞의 그와 뒹구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옷의 투명도를 낮추는 작업이 필요하죠. 고차원적인 상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 아닐까요. 현실의 장막을 걷어내는 작업부터 넘어야 할 산이 가득하니까요.



 

상상력이 미천한 걸 어쩌겠어요

 

최근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이색적인 곳을 찾아보겠다고 간 전통술 양조장에서 술독을 보았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형태였는데, 술을 얻는 주둥이가 도톰한 몽우리처럼 잡혀 있었죠. 금세 남성의 성기가 떠올랐습니다. 동행인에게 말했더니 혀를 차더군요. 연상작용이 끊이질 않는 뇌를 차단하지 않고서야 저도 별 수 없었습니다. 그쪽으로 뉴런이 활성화되는 걸 어쩌겠어요.


일상에서 제눈에 조금이라도 음란한 기색이 보이는 사물을 보면 야한 상상을 합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야수 같은 무언가를 빚어내면 양심에서 자유로울 텐데 그렇지 못하죠. 성적 대상화가 짙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기 딱 좋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속상하기도 해요. 미천한 상상력이 부끄러워서요.


행위 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상은 윤리적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당하는 대상이거나 괴롭히는 주체이니까요. ‘건강한 섹스라고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죠. 완전한 존중과 동의, 안전함은 상상 속에 없습니다.  하는 행동은 상상의 영역에 데리고  필요가 는 걸요. 설사 실제 섹스에 상상을 끌고 온들 설정이라는 틀이 존재합니다. 결국 상상은 오롯이 상상으로 남죠.


@Dainis Graveris, unsplash



말 잘 듣는 유능한 촉수


제 성적 상상에는 가학과 피학이 너무 맵지 않은 수준으로 버무려져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상상 속 기이한 생물들도빼놓을 수 없는데요. 난생처음 고수를 맛봤을 때 ‘도대체 이게 무슨 맛이야?’라고 느낀 감상처럼, 누군가에게는 대체 뭐가 야한지 모르겠는 엉뚱한 모양의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슬라임처럼 말랑하지만 근육질인 촉수는 제 상상 속 단골 주인공입니다.

 

촉수물은 유독 일본에서 발달한 장르인데요. 최근에는 정말 주체에게 폭력적인 양상으로 번져 왔습니다. 거의 압살 당하는 쪽에 가깝죠. 하지만 촉수물(tentacle)의 원형은 폭력적인 개념보다는 단순한 욕망에 기원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촉수물을 '손 안 대고 자위하기'에 정점을 찍은 장르로 보거든요.


제가 보는 이상적 촉수물이란 피학적으로 보여도 실제 전권은 주체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촉수는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주체의 성욕을 충족시켜주는 유기체입니다. 명령엔 순응하되 기대를 뛰어넘은 유능함으로 주체를 조련해야 하죠. 분명 지휘 아래 있지만, 뛰어난 핑거링으로 그 흔한 대사인 '마음대로 해줘'를 내뱉게 하는 대상인 겁니다.





<문어와 해녀>, 기꺼움에 가까운 쾌락


촉수물을 언급하면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그림 <문어와 해녀(어부 아내의 꿈)>가 떠오릅니다. 문어와 부대끼는 인간 여성이 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에도 시대에 인기 있던 타마토리 이야기를 모티프로 합니다. 주인공은 바다의 용왕에게 진주를 도난당한 후지와라 가문을 도우려는 해녀. 그녀는 가문에 진주를 되찾아주고자 용왕의 성에 들어가지만, 문어 등 용왕의 군대에 쫓겨 도망치지만 끝내 죽고 말죠.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도 이 그림이 등장합니다. 영화 속에서 문어는 히데코의 이모를 죽게 하고, 히데코의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대상으로 묘사됩니다. 실제 박찬욱 감독은 호쿠사이의 그림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제 게도 이 그림은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폭력성보다는 익살이 넘치는 변태적인 그림이라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Hokusai, The Dream of the Fisherman's Wife(1814) @en.wikipedia
영화 <아가씨>(2016), 네이버영화

 제눈에 비친 해녀와 문어의 관계는 <아가씨> 속 관점과는 다릅니다. 해녀가 문어에게 공격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 문어는 용왕과 주종 관계라는 점에서 둘입니다. 먼저 그림 속 해녀는 안마의자에 몸을 던지듯 문어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양손으로 문어 다리를 집어 뜯어도 모자랄 판에 문어 다리를 완고하게 잡은 두 손에는 어쩐지 기꺼움도 느껴지죠.


둘째로 문어는 이야기상 용왕의 명령에 충실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인지 문어는 임무 수행에 혈안이 된 성실한 노동자처럼 보입니다. 해녀의 음순을 훑는 문어에게는 일념에 가까운 사명감이 느껴지죠. 눈을 희번덕하게 뜬 해녀와는 표정이 사뭇 다릅니다. 본디 많은 폭력적인 그림이 주체가 ‘느끼는 것 마냥’ 묘사한다고도 지적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런 시각에도 불구하고 묘한 흥분과 웃음을 유발하는 그림입니다.





5억년의 시차를 뛰어넘은 상상력


과연 호쿠사이의 <문어와 해녀> 일상에 환상을 버무린 그림입니다. 문어는 실존하는 데다가 밥상에도 올라오는 친숙한 생물이죠. 한편 진화론적 관점에서 문어와 인간은 무려 5억년  분기점을 맞고 서로 다른 형태로 진화했습니다. 5억년  분화한 생물과 교미 비슷한  하다니. 거대한 시차 앞에서 인간의 상상력이란 어디까지인지 새삼 체감하게 됩니다.


최근 읽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SF소설 <블러드 차일드>에도 문어를 닮은 존재가 나오는데요. 인간-테란을 통해 종족을 번식하는 틀릭이 바로 그것이죠. 틀릭이 인간-테란의 몸을 숙주 삼아 자신들의 알을 착상시킨다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작가는 인간-테란이 틀릭의 알을 출산하는 모습을 충격적으로 묘사하는 한편, 둘을 공생 관계로 표현함으로써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틀릭은 커다란 머리에 체절을 지닌 유연한 팔을 가진 생물로, 거미나 문어를 연상시킵니다. 인간-테란의 시선에서 틀릭은 다음과 같이 그려집니다. ‘갈비뼈,  척추, 머리뼈, 그리고  체절마다 달린  쌍씩 달린 수족뼈까지. 그러나 그렇게 몸을 비틀어 던졌다가 떨어지는 방식으로 달릴 때면 뼈가 없어 보일  아니라, 물속에 가는 생물처럼 보였다(p.24)’라고요.1)  금세 틀릭의 에로틱한 작에 빠져들었습니다.





Matteo Vella, @unsplash

결국 상상력도  현실에 기반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연인과의 잠자리에도 상상력은 풍부할수록 좋다는   의견입니다. 그리고 문어나 문어를 닮은 촉수를 소환하는   괜찮은 선택입니다. 인간과는 다른 생물종의 신체적 조건과 습성은 야릇한 영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정 인물이 아니니 거북스럽지도 않고요.


문어는 5 개에 달하는 신경세포  무려 66% 팔다리에 퍼져 있는데요. 빨판에는 미각 수용체도 있습니다.  그림  해녀가 누리는 핑거링은 인간이 해주는 것과는 비교도   겁니다. 문어는 그녀의 변화하는 체액까지 맛보며 애무할 테니까요. 이런 상상을 염두하는 것만으로 연인과의 잠자리는 다채로워질 겁니다. 역시 상상력은 섹스를 풍요롭게 하는 거름입니다.





*인용자료

옥타비아 버틀러 <블러드 차일드>, 비채, 이수현 옮김(2016)


*참고자료

*표지

Masaaki Komori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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