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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Feb 05. 2022

러브 유, 이프 아이 데어.

기대 없이, 두려움도 없이*

영화 <러브  이프  데어>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난 모르겠고, 너가 보기엔 어떤데


“나 너 좋아하냐.” 한창 드라마 <상속자들> 김탄 때문에 유행하던 대사인데요. 언제부턴가 새롭게 체험한 무언가가 예상치 못하게 좋을 경우 ‘나 OO 좋아하네’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이처럼 어이없는 표현도 없습니다. 유체이탈식 화법이니까요. 좋아하네, 는 그래도 양호하지만, 좋아하냐는 곤란합니다. 자기 마음도 몰라서 상대에게 물으니 말이죠. 나중엔 내 마음을 물어내라 할지도요.


저 대사는 어쩌면 감정을 드러내는데 미숙한 어른의 마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영화 한 편을 권하고 싶은데요. 얀 사무엘 감독의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Love me if you dare)>입니다. 사랑을 대할 때의 두려움과 용기를 내기라는 형식을 빌려 보여주거든요.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스틸컷




눈치껏 넘겨주는 서브 같은 건 없어,

난 이 게임에 진심이니까


주인공 소피와 줄리앙의 내기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동급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소피를 안쓰럽게 여긴 줄리앙이 엄마가 자신에게 준 보물, 회전목마 틴케이스를 건네면서 시작되죠. 촉촉하게 깔리는 음악을 배경으로 줄리앙이 말합니다. “가끔 빌려줄래?” 환하게 미소짓던 소피의 표정이 일순 구겨집니다. 소피는 “줬다 뺏으려면 맨입으론 안 되지”라고 태연히 으름장을 놓습니다. 그리고는 틴케이스를 내려놓으며 “내기할래?”라고 묻죠.


이에 줄리앙은 기세 좋게 버스의 액셀을 밟아버립니다. 운전수 없이 신나게 달려 나가는 버스를 뒤로 한 채 “봤지?”라며 눈썹을 으쓱하는 줄리앙. 그로써 줄리앙은 소피를 향한 자신의 행동이 그저 동정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후의 줄거리는 두 사람이 이 내기에 얼마나 진심인지 증명하는 과정이죠.


그렇게 줄리앙의 회전목마 케이스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열정 자체가 됩니다. 내기에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그만큼 상대에게 관심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한편 내기는 둘 사이에서 창호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실루엣처럼 관심을 내비치지만, 동시에 정확한 본심은 읽을 수 없죠. ‘줬다 뺏으려면 그냥은 안 된다’는 소피의 말은 언제든 손쉽게 거둘 마음 따윈 받지 않겠다는 엄포입니다. 그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하고요.


사실 연애 혹은 썸 상대로 이런 적수를 만나긴 쉽지 않습니다. 소위 ‘끼리끼리’가 성립해야 하니까요. 그래야 게임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소피와 줄리앙의 내기 현장은 막상막하의 승부사들이 만난 이상 그야말로 피투성이. 상대를 봐 가면서 넘겨주는 서브 따위는 없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게임은 20여 년간 지속됩니다.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스틸컷




아이들의 게임이 어른들의 밀당이 될 때


문제는 게임에 너무나 몰입한 탓에 서로를 향해 커져버린 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겁니다. 둘은 커져버린 마음을 느끼지만, 숨깁니다. 그렇게 게임은 순수성을 잃습니다. 자신부터 기만하는 게임은 성립할 수 없으니까요. 영화에서 이는 줄리앙에게 마음을 전하려다 실패하고, 홧김에 남자 공부나 하러 가겠다는 소피에게 줄리앙이 콘돔을 건네면서 돌이킬 수 없게 전개됩니다.


내기는 서로를 환상의 콤비로 이어줬던 유년 시절과 달리 상대를 응징하는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즐거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분노가 들이찹니다. 그렇게 아이들의 순도 높은 게임은 어른들의 밀당으로 전락하죠. 투명하게 열정을 주고받았던 때와 달리 깊어진 마음은 애정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돌려받지 못한 마음은 복수심을 싹 틔우죠.


그럼에도 둘의 처음은 순수했습니다. 줄리앙은 정서적 교류가 필요한 소피에게 손을 내밀었고, 한 줄기 유머가 필요했던 줄리앙에게 소피는 천진한 미소를 선물했죠. 시간이 흐르면서 내기라는 틀에 갇힌 꼴이 됐지만, 적어도 둘은 상대가 부족한 점을 채워줬던 벗이었습니다. 어쩌면 열정이든 복수심이든 가진 패를 다 걸고 상대에게 마음을 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아닐까요.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스틸컷




세상은 모르는 둘만의 암호


소피와 줄리앙의 내기는 분명 사랑의 밀어였습니다. 정차된 버스를 출발시키고, 수업시간에 성적인 말을 내뱉고, 교무실에서 오줌을 싸거나, 티셔츠 위로 브래지어를 찬 채 시험을 치르거나, 다른 또래 여학생을 꼬시는 등 극단적인 형태의 모든 내기들. 연인과의 추억이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둘만 아는 천진한 장난들을요.


사랑하는 이들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저들만의 언어를 만들어냅니다. 저는 그것이 사랑의 가장 큰 기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애인과 진지한 이유로 헤어진 제게도 가장 그리운 순간은 내 안의 아이와 그 안의 아이가 만나 철없는 말을 내뱉던 순간들이니까요.


하지만 언어를 창조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통하는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기적에 가깝죠. 그래서 사람들은 저만의 세계에 몰입한 채 타인이 내게 혹하길 기다립니다. 내가 전시하는 이미지에 따라 나를 봐주고, 매혹되기를요. 거기엔 타인의 세계에 잠입하려는 노력이 빠져있습니다. 내면의 우물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도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 수면 위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볼뿐입니다.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스틸컷




연애의 덕목, 사랑의 자리


우리에겐 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관심받고 싶은 마음, 현실로부터 훌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언어를 획득한다는 건 누군가의 취약한 부분을 읽어내는 시선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타인의 결핍을 부드럽게 파고드는 침투야말로 사랑을 꿈꾸는 이들이 갖춰야 할 덕목일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세기의 유혹자로 알려진 카사노바의 일화는 연애의 덕목이 무엇인지 보여주죠.


카사노바는 한 여배우를 만납니다.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혀가 짧아서 R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카사노바는 그녀를 위한 극본 하나를 써서 선물하죠. 바로 알파벳 R이 빠진 극본을요. 그는 그녀의 세계에 들어가 그녀의 결핍을 더는 결핍이 아니게 만들었습니다. 세상 속 그녀의 결핍을 알아본 관찰력과 그 결핍을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해석해 낸 창의성. 그녀가 카사노바에게 매혹된 건 너무나 자연스럽죠.  


새해부터 한 사람에게 홀린 듯 매혹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죠. 넌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작 자신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은 채 상대에게 질문을 떠넘겼습니다. 자신을 내던질 용기도, 상대의 욕구를 읽는 세심함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거절당할 가능성을 안고서 뛰어드는 과단성 있는 이들의 몫인데 말이죠.


하지만 괜찮습니다. 수없이 면접에 떨어지더라도, 한 번 붙으면 취업에 성공하듯 사랑도 마찬가지니까요. 결국 짝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둘만의 왕국을 세우겠죠. 일도 잘하고 돈도 가득 벌고 싶지만, 역시 새해에 가장 해내고 싶은 건 둘만의 밀어를 만드는 일입니다. 소피와 줄리앙처럼요.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스틸컷





관계에 겁 많은 자신을 봐 버렸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하진 못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제 작은 깜냥을 인정해야 하니까요.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를 관통하는 대사인 “내기할래?”는 불어로 “Cap ou Pas cap’.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묻고 있죠. 선택이 아닌 역량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데 버려야 할 건 두려움뿐. 연인과 둘만의 밀어를 개발하는 일만큼 비밀스럽고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세상엔 외람되지만 둘만의 세계에선 정당한 더티 토크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봤지(Cap)?”라고.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 스틸컷


*bülow  ‘Two Punks in Love’ 엔딩곡으로 추천합니다.


*부제는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의 여인들> 나오는 인물 이사벨라 데스테의 모토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에서  왔습니다.







에로십 프로젝트의 마지막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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