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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Jun 12. 2021

제 이상형은 퇴계 선생님입니다

애인으로선 밝히는 쪽이 최고죠

길거리서 키스 좀 할 수 있지


밤 9시 신도림역. 검은 그림자로 보이는 20대 남녀가 포옹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은 밤이라 더 하얗게 빛나는 여자의 종아리뿐입니다. 검은 머리, 검은색 후드 집업에 검은색 하의를 입은 두 남녀는 손바닥 한 장 들어갈 새 없이 붙어 있습니다. 귀엽네, 하면서 머쓱한 미소를 짓습니다. 문득 연락 하나 없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동생 생각은 다릅니다. “아니, 그 사람 많은 로데오 거리 한복판에서 그러고 있는 거야” 며칠 전 곱창집 통유리 너머로 보이던 남녀 이야기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키스를 했다나요. 저는 어색하게 웃기만 합니다. 과거 지하철 역사 안에서 키스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지레 절 향한 지탄처럼 느껴져 “나도 그런 적 있는데” 합니다.


동생은 공공장소에서 ‘지나친 스킨십’은 허용할 수 없다는 표정입니다. 차라리 방을 잡든가.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밖에서 섹스하는 것도 아닌데 왜 방을 잡으라 하지. 키스쯤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는 것에 너무 엄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Tim Gouw 님의 사진, 출처: Pexels


뭐 눈엔 뭐만 보이는 걸지도 몰라


거리 위의 가벼운 애정 행각을 두고도 반응이 첨예하게 나뉘는데 성행위는 오죽할까요. 성인(聖人)도 예외는 없는데요. 간디가 대표적입니다. 영국의 제국주의에는 폭력 하나 쓰지 않고 저항했지만, 이 장소는 부숴버리거나 남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진흙으로 덮어버리자고 주장했죠. 바로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카주라호 사원(Khajuraho Temples)입니다.


간디가 문제 삼은 것은 미투나(Mithuna) 조각입니다. 남녀가 교합한 미투나상은 성적 합일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힌두교의 탄트리즘 사상을 담고 있는데요. 물리적 힘을 거부함으로써 상대에게 성찰을 이끌었던 간디의 정신을 생각하면, 정확히 그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몸을 수단으로 보는 건 같아도, 활용과 억제 면에서 갈리니까요.


Yogendra Singh 님의 사진, 출처: Pexels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간디에게 미투나상은 거슬리는 조각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사실 카주라호 사원에 묘사된 성행위 조각은 사원 전체의 10%에 불과합니다. 전쟁에 나가거나 시장에 가는 사람, 화장하는 여성 등 일상적인 모습을 표현한 조각이 대부분이죠. 1) 아니, 섹스도 언제나 일상의 일부였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체외수정이 성공한 지 겨우 40년밖에 안 된 지금까지 인류가 이어져 온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많은 관광객들의 기대와 별개로 미투나상은 쾌락과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 블로그는 19세기 영국 식민지 하에서 탄트리즘이 소개되면서 탄트라의 정신보다 섹스라는 표면적 행위가 부각됐다고 밝힙니다.2) 결국 탄트라는 금기시되는 몸의 즐거움을 오히려 깨달음으로 가는 방편으로 활용한 거라 정리할 수 있죠.


이러한 종교적 맥락에 비춰보면, 오늘날 에로틱해 보이는 대상이 당시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간디 눈에는 카주라호 사원이 그저 야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관광객들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죠. 그 와중에 시인 타고르는 카주라호 사원을 시에 많은 영감을 준 곳이라며 그의 주장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역시 정치인보다는 시인이 낫네요.

pixabay


유학자 입에서 자지라니


간디의 일화와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역사를 보다 보면 정사이길 바라게 되는 야사가 있는데, 바로 퇴계 이황과 이항복 일화입니다. 이항복은 제게 <오성과 한음> 속 감나무 에피소드로 패기 좋은 인물이었고, 퇴계는 그저 성리학을 전공한 위인쯤으로 흐릿하게 기억돼 있었는데요. 이 일화를 통해 이항복의 거침없는 면모에 다시금 놀라고, 일전엔 몰랐던 퇴계의 재치와 여유로운 태도에 탄복해 버렸습니다.


바로 ‘자지 보지’ 일화인데요. 이게 웬 말이냐고 깜짝 놀란 분들이 계시겠죠. 하지만 어릴 적 저는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잠지’라는 단어를 듣곤 했습니다. 솔직히 피아노 학원이나 분식점만 가도 벽 한편에 이런 낙서를 보곤 했으니 우리집뿐 아니라 많은 집들이 쓰곤 했던 단어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아무튼 제게는 피도 먹색일 것 같은 조선왕조 유학자 입에서 이 같은 단어가 나오는 상황 자체가 흥미로웠죠.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퇴계 이황 옆집에 살던 이항복이 하루는 퇴계에게 왜 남자의 성기는 ‘자지’라고 일컫고, 여자의 성기는 ‘보지’라고 부르는지 물었더니, 이황이 남자는 앉았을 때 성기가 가려져 ‘좌장지(坐藏之)’, 여자는 걸을 때 성기가 보이지 않아 ‘보장지(步藏之)’라 이름 붙인 것이 변했다고 답한 일화입니다. 저는 이 글을 접한 순간 아빠다리를 한 남성과 시원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을 떠올리며 무릎을 쳤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해당 내용은 그저 민담으로 추정됩니다. 조선시대 사역원에서 나왔다는 중국어 어휘집에는 자지와 보지가 표제어로 등장하지만 얼추 비슷해 보이는 한자는커녕 또 다른 외국어가 등장하죠.3) 하지만 비록 소설일지라도, 일화 속 주인공이 퇴계 선생님이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저 갑갑하게 느껴졌던 유학과 선비에 대한 이미지까지 바꾸니까요. 한 분야에 몸 담은 사람의 발언이란 이토록 무게감 있는 것입니다.


pixabay


오늘부터 제 이상형은요


저는 욕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합니다. 극단적 경우를 제외하면 일상적 범주 내에선 욕망쟁이인 사람들이 도덕적인 얘기만 늘어놓는 쪽보다 정이 갑니다. 제가 전자에 더 가깝기 때문이겠죠. 더불어 어떤 상황을 들여다보기 전 재단부터 하는 쪽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가끔 무섭습니다. 간디의 주장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지만, 저는 한참 어린 친구의 발칙한 물음에도 나름의 통찰로 생각을 드러낸 퇴계에 더 마음이 갑니다.


야사 속 이항복과 퇴계의 발언은 오늘날 어디 함부로 했다간 성희롱으로 신고당하기 딱 좋습니다. 최소한 윤리적 지탄을 받겠죠. 서로를 두고도 ‘위아래도 없는 자식’이나 ‘만만치 않은 변태로군’하고 생각하기 딱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대화는 애인 사이라면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는 얘기죠. 당연히 커플마다 상이하겠지만요. 연인이 되기 전 서로의 유머코드와 엄숙한 분야를 체크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건 대개 타협이 안 되거든요.


도덕군자는 싫다고 했지만, 종종 예민한 저 역시 꼬장꼬장 한 할머니와 천박한 단어와 행동을 일삼는 짱구 같은 아이를 오갑니다. 대부분 사람이 양쪽 어딘가의 좌표에 위치하겠죠. 다만 저는 경직된 사고를 갖는 사람만은 안 되고 싶습니다. 무언가를 판단하기 전에 관찰부터 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애인 역시 그런 사람이 좋고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누군가 이상형을 물으면 야사 속 퇴계 선생님을 예로 들려고요.  


퇴계 선생님은 ‘낮퇴계 밤토끼’라 불렸다고도 합니다. 토끼처럼 귀엽다는 것인지 토끼처럼 색을 밝힌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볼 땐 어느 쪽이든 애인으로는 최고입니다. 색을 밝힌다는 건 어쩌면 ‘밝히다(light)’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묻어두고 숨기는 쪽 보다는, 솔직하게 나누고 피드백하는 커플이 잠자리도 건강하죠. 밤을 밝힌 촛불 근처에 어렴풋이 번지는 애인의 실루엣을 생각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Elijah O'Donnell 님의 사진, 출처: Pexels





[참고자료]

1) Is it true that Gandhi wanted the temples of Khajuraho destroyed? For what?

https://www.quora.com/Is-it-true-that-Gandhi-wanted-the-temples-of-Khajuraho-destroyed-For-what

2) Demystifying Tantric sex, The British Museum Blog, Imma Ramos, 23 September 2020

https://blog.britishmuseum.org/demystifying-tantric-sex/  


3) [짜장뉴스] 퇴계 이황 “좌장지”로 陽物 설명했나, 아시아경제, 2015년 4월 2일

https://cm.asiae.co.kr/ampview.htm?no=2015040109120953407  


[표지 이미지]

cottonbro 님의 사진, 출처: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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