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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Oct 08. 2021

슬랙스를 치우고 골지 원피스를 입는 마음

타인을 ‘초대’하는 패션에 대하여

상상력을 더하는 슬릿의 힘


‘오늘을 기다렸어. 이런 밤이 오기를’ 엄정화의 명곡 ‘초대’의 가사입니다. 자연스레 도래한 것으로 보이는 오늘의 데이트에 의도를 실어내죠. 그럼으로써 누적된 과거의 순간이 그저 흘러간 것이 아닌, 오늘을 위한 보이지 않는 물밑 작업이 됩니다. 언젠가 잠자리에서 가장 야한 말은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어’라는 말이라고 하던데, 딱 그 말이 생각나네요.


그럼 어떤 밤을 ‘이런 밤’으로 만들기 위해선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요.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작은 섹슈얼 코드를 가미하면 좋을 텐데요. ‘초대’ 무대에서 엄정화가 입은 의상에 힌트를 얻어볼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다리에 트임이 있는 슬립을 입고 있습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맛자락에 부딪히는 바람의 저항과 복종으로 드러나는 살결이란 참 감각적이죠.

엄정화 ‘초대’ 무대 (1998), youtube

이런 슬릿을 넣은 드레스는 여전히, 앞으로도 인기 있을 패션 아이템입니다. 에로틱한 패션에서는 더욱 빠질 수 없죠. 남성들이 선호하는 의상에 트임이 있는 H라인 스커트가 단골로 등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단단히 몸을 커버하고 있지만, 작은 트임만으로도 상상력에 불씨를 더하니까요.


‘초대’ 의상을 더 들여다보면, 의상 색상은 블랙과 화이트가 대부분입니다. 무채색이 섹시한 노래의 단골 컬러라니 아이러니하죠. 블랙은 여성을 위한 실용적 의상을 만든 샤넬이 수녀원에서 영감을 얻은 컬러입니다. 당시 온갖 봄꽃처럼 치장한 색색의 드레스 사이에 놓인 샤넬의 블랙 드레스를 상상해 봅니다. 남의 시선을 끌려고 뽐내지 않는 블랙은 그 자체로 자기 확신에 차 있습니다.


화이트는 빛을 반사하는 컬러로, 새틴과 같은 매끄러운 재질을 입으면 입은 이의 실루엣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빛을 퍼뜨리는 강도가 강하다 보니 혼자 다른 차원에 있는 듯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블랙이 내면의 정욕을 감추기 좋은 은둔의 색이라면, 화이트는 평범한 몸뚱이를 다른 차원으로 높여주는 날개의 색입니다.  




로 라이즈 진과 김형의 아랫배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은 이런 섹시한 의상이 주류였던 시절입니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보면 매우 섹시했던 옷이 있죠. 바로 로-라이즈 진입니다. 요즘은 허리선이 높은 슬랙스가 인기를 끌면서 청바지 역시 모두 밑위가 길어졌는데요. 치골이 보이던 90년대 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입니다. 최근 게스(GUESS) 화보 속 수지의 청바지와 이효리가 ‘10 minutes’ 시절 입은 청바지를 비교하면 단번에 알 수 있죠.


로 라이즈 진의 짧은 밑위는 또 하나의 노출을 허락했는데요. 바로 배꼽입니다. 배꼽에 걸치는 지금의 청바지와 배꼽 아래로 배가 3cm는 훤히 보이는 로 라이즈 진은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통신사 입간판 도난 사태까지 낳았던 설현의 청바지를 떠올려 볼까요. 상의가 짧아지면 아랫배가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요즘도  크롭티를 입지만, 하의의 밑위가 높아지면서 주로 윗배가 보입니다. 배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죠.

2021 S/S GUESS 화보 중
이효리 ‘10 minutes’ 인기가요 무대 (2003), Youtube

과거엔 배가 보이는 게 왜 야한지 몰랐는데요. 최근에야 아랫배가 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는 김형과 안형이 ‘꿈틀거리는 것’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김형은 버스에서 여자의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랫배를 바라보는 일만큼 마음을 차분히 하는 것은 없다고 말하죠. 소설은 그에 대해 더는 설명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뻣뻣하게 얼어버린 도시에서 여자의 아랫배는 생명력을 잃지 않은 무언가로 읽혔습니다.


과연 피하지방으로 둘러싸인 도톰한 아랫배를 보면 잘 익은 배가 떠오릅니다. 손바닥을 가만히 대고 싶은 느낌이 들죠. 보드라운 피부에서는 베개를 닮은 포근함도 느껴지죠. 여성들이 남성의 넓게 각 잡힌 어깨를 좋아하는 부위로 손꼽는 만큼, 잔잔한 파도처럼 넘실대는 아랫배야말로 여성미를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여성미가 대체 뭐냐고 묻는다면, 무언가 파괴하지 않고도 새로움을 생성해내는, 온열찬 에너지라고 해두겠습니다.




그날의 오오티디가 암시하는 것


다시 엄정화로 돌아옵니다. 그의 한 손에는 부채가 들려있습니다.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장식물쯤으로 여길 수 있지만, 이만한 상징도 없는데요. 부채의 언어는 산업혁명까지 거슬러 가거든요. 19세기 부르주아 여성들은 사교모임에서 관심 있는 이에게 밀어를 보낼 때 부채를 썼습니다. 따로 긴히 보고 싶거나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부채를 사용해 의중을 표현했죠.


당신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날 때 어떤 옷, 어떤 아이템을 꺼내나요. 아마 외모의 장점을 가장 돋보이게 할 무엇이겠죠. 전 평소 슬랙스를 즐겨입다가도 데이트 날에는 짧은 치마나 골지 원피스를 꺼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혹자는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상대의 눈길을 끌고자 그의 취향에 맞춘 의상을 입는 건 그 얼마나 영악한 태도인가요.


문명사회에서 패션은 타인의 관능을 깨웁니다. 어깨에 걸친 듯 겨드랑이에서 시작되는 낙낙한 카디건은 실용성 면에서 하등 쓸모없습니다. 패션의 의미는 오로지 유혹에 있습니다. 매 시즌 쏟아지는 다양한 의상은 결국 새로운 방식으로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얀 달라글리오는 TED 강연에서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사치품은 타인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태어난다고 합니다. 물질 만능주의와는 아무 상관없다고요.

Yann Dall’Aglio, ‘Comment sauver l’amour?’ TEDxParis (2012)

가을은 니트의 계절입니다. 스웨터를 좋아하던 그가 떠오릅니다. 품이 넉넉한 아이보리 스웨터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의 콘솔 지퍼를 잠글 때를 생각합니다.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죠. 그런 마음을 돌이켜보면, 확실히 데이트 때 입고 나오는 옷에는 그날의 마음가짐이 담기기 마련입니다. 나를 예쁘게 봐줬으면 하는 귀여운 마음부터 옷이 껍질처럼 벗겨지는 순간까지 그려볼 수 있죠.


패션은 일상 속에서 판타지를 더하는 행위입니다. 그 지점에서 패션은 섹스와 퍽 닮아있습니다. 패션은 마음을 은유하고, 섹스는 아예 숨겨져 있다는 것이 다르겠지만요. 오늘 당신의 옷차림엔 어떤 마음이 담겨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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