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저> 를 읽었다.
파리에서 테러 사건으로 연인을 잃은 소은의 이야기(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끝나버린 연극처럼 막이 내린 세계와 나의 사랑(끝난 연극에 대하여), 마지막 순간을 맞은 오랜 연인을 향한 독백(첼시 호텔 세 번째 버전), 때로는 간절했고, 때로는 무책임했던 시절의 얼룩들(얼룩이 된 것들), 먼 바다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청춘을 부르는 절망의 노래(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다섯 편의 소설을 담은, 신유진의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에는 상실을 마주하는 인물들이 살고 있다. 사랑을, 사람을, 시절을 잃은 이들의 하루, 낮은 목소리로 상실을 읊조리는 절망들, 체념들, 스스로를 향한 위로들, 그리고 다짐들. 소설은 이제 없는 것들의 부재를 기록하며 그것이 언젠가는 분명히 존재했음을, 그것들을 잃었으나 결코 잊지는 않았음을 말한다. 그러니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비록 보잘것없는 얼룩으로 남았을지라도.
동료에게 빌려 일주일째 출근 길에 읽고 있는 책이다. 첫 꼭지를 다 읽은 순간 다짐했던 것 같다. 꼭 독후감을 써야겠어. 무엇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인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에는 나를 일렁이게 하는 무엇이 있다. 혀 끝에 맺힌 문장이나 장면들을 옮겨쓰다보면 그 무엇을 희미하게나마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식들을 총동원하여 심연의 밑바닥에 묻어두었던 풍경과 기억들, 사랑했던 것들을 더 이상 감각할 수 없는 이 현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좌절하던 내 모습들은 사실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마주해야 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무기력한 신보다 기도라도 해 주겠다는 사람의 마음을 더 믿어요. 그래요. 그거면 나는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봉사활동을 하던 시절, 돌보던 친구가 나의 사명처럼 느껴질 때가 자주 있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절대로 짧지 않아서 가족처럼, 내 신체의 일부처럼 그를 아꼈다. 그 친구가 유난히 아픈 친구라 그랬는지, 그와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순간이 기도같았다. 늘 산책을 갈 때마다 붙잡고 있었던 그의 오른손과 나의 왼손. 두 손을 맞닿은 이 행위가 기도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빌고 있거나 손에 땀이 났다. 우리는 아마 걸으며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의 건강을 위해서, 너는 나의 안녕을 위해서.
아버지는 말이 없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절뚝거리며 걷는다. 별 의미 없이 그저 절뚝거리는 역할, 세상에는 그런 역할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을이 아름다워서 사는게 조금 나아졌던가. 모르겠다.
가정과 삶에서 역할이 없었던 우리 아빠. 본인이 자처하여 늘 삶의 무대를 이탈하던 우리 아빠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음을 느낀다. 막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오는 일은 이제 못하더라도 빨래를 하고 장을 보고 강아지들을 돌보는 아빠를 보다 보면 이십년이 넘도록 언 마음들이 갈라지고 녹기 시작한다.
내게 노을이라는 단어는 모순(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라는 소설을 떠오르게 한다. 모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켠에서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절뚝거리던 주인공의 아버지가 딸에게 남기고 떠난 마지막 말이었다.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절뚝이도 멈추는 힘에 있지 않나. 갈 길이 멀고 숨이 가빠도 정신을 놓고 보게 되는 그 아름다움. 사는 일은 별 것 아닌 일들이 겹겹이, 별 것 아닌 좋은 일들이 겹겹이 쌓이다 보면 나아진다고 믿는다.
그러네. 오래 기다리면 잊지. 크리스마스에 오지 않는 산타를 오래 기다리다 잊었고, 전학 간 단짝 친구의 편지를 오래 기다리다 잊었으며, 어쩌면 무언가 되지 않을까 품었던 희망을 오래 기다리다 잊었는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나는 잊은 사람이다.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대사를 잊어서는 안 됐는데, 너무 오래 무언가를 가만히 입을 다물고 기다리다가 대사를 잊어버린, 대사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잊은, 아니 잃어버린 사람.
똑같이 따라써볼까.
그러네. 오래 기다리면 잊지.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다 잊었고, 마음으로 화해하지 못한 친구를 잊었고, 그 애 집 소나무 아래 심어뒀던 타임머신을 잊었다. 답장과 마음과, 타임머신을 열면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모두 잊은 사람이다. 잊어선 안되는 것들이 쌓이다보면 어느새 잊어 버리고 싶은 것들만 눈 앞에 가득한 시절이 온다. 지금의 나처럼.
지나고 나니 나의 모든 시는 관념이었다. 그럴 듯한 단어를 입은 허깨비들
잠들기 전엔 명작이 탄생했다며 소리를 꿱꿱 지르다가도, 다음 날 아침이면 이거야말로 정성스러운 궤변이 따로 없다며 고개를 젓는 나다. 요새 스스로에게 자주 묻는다. 왜 시를 쓰고 있는가?
작년에 어떤 시인들의 수업을 들으면서부터 나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수업에서 내가 써간 시는 합평이 있을 때마다 '좋은 문장은 많은데 너무 관념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로 일축되었고 그 때마다 나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지금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궤변은 쓰고 싶지 않다.
그럴 듯한 단어를 입은 허깨비들이라는 표현이 정확히 그때의 상황과 맞아떨어져서 이 문장은 한참 나를 머무르게했다.
나는 무엇으로 불리던 사람이었을까.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의 존재를 세상에 새기는 일과 같다. 먼저는 이름의 주인에게, 그리고 이름의 주변 사람들에게 대상을 하나의 세계로 만드는 일과 같다. 나로 불리던 많은 이름들이 지나갔다. 게으른, 나약한, 꼼꼼하지 못한, 울보 혹은 성실한, 늘 웃는, 발이 넓은, 바른 김민수. 그 중에 무엇이 나였고 무엇이 나이며 무엇이 내가 될지 모르는 일이겠지만, 하나의 존재로 불려지는 일만으로도 감사하게 느껴야 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무척이나 좋아하는 누네띠네 과자처럼, 겹겹이 쌓여온 나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선사하는 존재이고 싶다.
2019.11.03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신유진 저> 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