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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하 Nov 27. 2020

가장 따뜻한 계절

가을을 보내며

잊고 있었다 가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거칠한 이불에 이마를 비비다 햇살 속에 가만히 서서

먼지처럼 계절을 떠 다니는, 무엇보다 하찮은 나는

가을을 소중히 사용하기로 했다


바람이 가슴을 뚫는다

오래된 학교 화단의 시멘트색 꽃잎

먼지가 날아들어 동물 위에 쌓인다


그 초연한 생명은 세월을 알 길 없는 너의 모습과 닮았다

그는 늑대의 꿈을 꾸고 나는 원시인의 꿈을 꾼다


돌을 갈아 산 만한 그림자에게 쥐어주면 그뿐이다

사냥하는 것도 그요 전사하는 것도 그이니

나는 활 만드는 장인, 그는 제멋대로 쏘아진 살

바람은 끝내 역행을 막아내었다


그래서 가을은 따뜻한 계절인 것이다


하나같이 이기적인 시각에 달을 건져 올릴 사람은 누구인가

부끄러워 눈이 감겨도 내 시체는 길 위에 버려져있다


서사 없는 짐승들을 누가 거두어줄까

과연 가을은 포근한 계절이었다


창살을 갉아내던 습기는 이제 구름으로도 없다

여름아! 네가 물이라면 가을은 촛불이다

바람을 불어오는 흐름은 잎들을 구석으로 몰고

차분한 비가 묵 때를 벗겨내면

우리는 그것들을 기억하며 지키는 꼿꼿한 심지이다


낡은 진실을 닦는다

오래된 카메라는 시간을 가두는 일이 슬프다고 했다

시간이 사물에 녹아들고, 나의 피부가 노인의 것이 되면

가을도 그만큼 더 깊어지려 하늘을 경외하게 한다


한 줌의 흙과 고장 난 신발이 머뭇대는 계절에

창백한 나무에서 맺은 모진 결실이여


비야

추적거리며 오라, 마른 것들은 물을 양껏 머금고

가을이라는 불꽃 앞에 돌풍으로 모여 우리 벼랑으로 몰아가자


티끌이 날리어 수놓는 들판과 풀꽃의 이유를 묻고 물어서

노을과 같은 저승의 끝, 가을의 마지막 불씨, 별이 될 수 있었을 그것,


진정 아껴야 할 가을과 찰나, 그리고 인간

구름위로 쏟아내는 광선의 폭포


다른 해가 지평에 솟으면

나 너를 더욱 그리워하리라


과연 가을이었다

과연 나도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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