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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n 18. 2018

배고픈 게 어때서

내 몸은 도무지 음식 앞에 겸허할 생각이 없다.

미혼이던 시절, 한 남자 사람 친구가 함께 식사를 하던 내게 이상한 조언을 했다.

“너 마음에 드는 남자랑 밥 먹을 때는 밥을 조금 남겨.

“왜?”

“그걸 명확한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 암튼 조금 남기라고.”

“마음에 드는 남자랑 밥 남기는 게 무슨 상관인데?”

“그냥 딱 한 숟갈만 남겨. 이상하게 밥을 한 톨도 안 남기고 삭삭 먹은 여자는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느껴지는데, 조금이라도 남기면 나를 신경 쓰는 건가 싶거든.”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그렇지? 이상하지? 나도 참 이상한 생각이란 건 아는데 그렇다니까. 아무튼 조금만 남겨!”


그 식사자리에서는 물론 그 이후로도 나는 밥을 남기지 않았다. 억지로 먹는 식사거나 비위에 맞지 않는 이상 남김없이 말끔히 먹었다. 배고픔은 내게 최대 고통이다. 나는 허기 앞에 발가벗은 사람이다.


아마 어릴 적 경험이 관계있을 것이다. 세 자매 중 막내로 살았던 나는 늘 외동이 부러웠다. 외동이 부러운 이유는 음식을 나눠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였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우리에게 늘 강조했다.

‘콩 한쪽도 나눠 먹어라.’

그 소리를 들을 때면 난 늘 생각했다.

‘그냥 콩을 많이 줘.’


집엔 쌀가마가 쟁여져 있고, 수백 포기의 김치가 있고, 감자와 생선을 몇 짝씩 쌓아뒀음에도 나와 언니들은 늘 배가 고팠다. 한 번은 언니와 큰 사이즈의 식빵을 사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로 앉은자리에서 다 먹은 적이 있다. 1인 1 바게트는 우리 자매들 사이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성장기의 나는 한 끼에 밥을 세 공기씩 먹었다.

엄마는 우리가 유아기를 지날 때까지 딸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많이 먹는 줄 몰랐다고 한다. 라면 한 박스를 사와도 이틀쯤 지나면 남는 게 없고, 한 번에 햄버거 3개씩 먹는 딸들의 먹성을 감당하는 게 고됐다고 한다. 과일 한 박스를 사도 다음날이면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특히 귤처럼 심심풀이로 먹는 과일은 한 나절을 넘기지 못했다.


한 번은 엄마가 너무 지쳤는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귤은 하루에 7개 이상 먹으면 몸에 해로워. 화장실도 많이 가고.”

“그래도 많이 먹을래.”

“귤 많이 먹으면 손이 노래지는데, 얼굴도 노래져.”


이쯤 되니 귤이 조금 무서워지긴 했다. 엄마는 귤을 하루에 7개씩 세어가며 먹으라고 했다. 언니들과 나는 세어가며 하루에 귤을 일곱 개만 먹었다. 한 번은 귤을 먹다가 몇 개를 먹었는지 까먹는 바람에 얼굴이 노래질까 봐 운 적도 있다.


지나고 보니 엄마의 그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귀엽기도 하고, 오죽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릴 적 나는 늘 배가 고팠다. 굶은 것도 아니고, 못 먹고 자란 것도 아닌데 늘 배가 고팠다. 성장기의 내 소화기관은 끝없이 삼킬 수 있는 블랙홀이었다.   


그랬던 영향인지 나는 커가면서 배고픔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졌다. 허기가 찾아오는 순간이면 얕은 식은땀이 묻어났다. 학교나 회사에서 점심시간 때를 놓치면 속이 울렁거리고 손끝이 떨렸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상사 때문에 밥을 늦게 먹을라치면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 날이면 키보드를 부서져라 쳐가면서 소심하게 항의했다.

‘내 밥시간은 중요하다고!’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프리랜서가 된 이후로는 배고픈 시간에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고,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좋다. 다행히 폭식은 없다. 대식가도 아니다. 그저 정해진 시간, 강한 허기를 느끼기 전 밥을 먹고 싶을 뿐이다.

배고픔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주제에 입맛은 까다롭다. 튀긴 음식을 잘 못 먹고, 짠 것은 얼마 먹지 못한다. 짠 걸 싫어하니 포 종류의 건어물을 먹지 않는다. 후각이 예민해서 육류나 생선의 냄새가 조금만 역해도 입에 넣을 수 없다.

배고픈 게 무서우면서도 입에 안 맞는 음식은 남기기 일쑤다. 당근과 콩나물을 먹지 못하니 가리는 음식도 있고, 야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좀 더 음식 앞에 겸허해지고 싶다. 배고픈 것을 적당히 참을 수 있고, 배고플 때 식은땀도 그만 흘리고 싶다.


최근 어떤 변화가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살이 찌는 것 같아 낮 시간 간식을 아예 먹지 않기 시작했다. 가끔 허기가 지는 오후 4시경이면 커피에 고구마 같은 것을 조금 먹었다. 과일이나 견과류를 먹기도 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군살이 되는 것 같아 끊은 것이다.


간식을 끊고 약간의 허기가 몰려오긴 했지만 참았다. 이렇게 음식으로부터 겸허해지는 훈련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오후 5시경이면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고 잠이 쏟아졌다. 몸이 무겁단 느낌이 들었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이런 증상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거 배고파서 그런 거 아냐?”

“설마. 설마 배고프다고 졸리고 머리가 아플까?”


이야기를 나눈 다음날 오후 5시에 똑같은 증세가 몰려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다. 남편은 잠시 생각을 해본 뒤 처방을 내렸다.

“역시 배고파서 그런 것 같아. 실험 삼아 뭐라도 먹어봐.”

“여보, 사람이 어떻게 배고프다고 졸리고 몸이 아프겠어. 말도 안 돼.”

“일단 뭘 좀 먹어봐. 그래도 안 좋으면 주말에 나랑 병원 가서 검사를 받아보자.”

“아,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혈압이 떨어진 것 아닐까? 아니면 갑자기 아픈 게 뭔가 이름 모를 바이러스가 침투했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어.”

“그런 상상하지 말고 일단 뭘 좀 먹어봐. 먹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보자.”


실험하는 셈 치고 냉장고에 넣어둔 쿠키와 저지방 우유 한 잔을 먹었다. 먹으면서 생각했다. 설마, 배고프다고 몸이 이렇게 변하겠냐고, 온몸이 배고픔에 이렇게 굴복할 리가 없다고 말이다. 몸은 정신이 지배하는 그릇인데 이렇게 무너질 수 없지 않나.

간식을 먹고 양치질을 한 다음 소파에 기대앉았다. 사람 몸이 참 간사하다. 정확히는 내 몸이 아주 간사하다. 고작 그것 먹었다고 십 분쯤 지나 기력을 회복했다. 단 음식을 먹어서인지 기분도 좋아졌다. 온몸의 근육이 신선한 에너지를 공급받았는지 활력이 돌았다.


잠시 후 확인 차 전화한 남편은 그동안의 내 증세가 배고픔 때문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절할 듯 웃었다. 사실 나도 간식 좀 끊었다고, 조금 허기졌다고 몸이 이렇게 반응했다는 점이 너무 우습고 부끄러웠다. 내 몸은 도무지 음식 앞에 겸허할 생각이 없었다.


겸허할 길이 없는 내 몸의 천적은 배고픔이다. 이제 엄마의 거짓말에서 자유롭고, 콩도 나눠먹지 않는 시절이니까 즐겁게 먹기로 했다. 맛있게 먹고, 운동하고, 즐겁게 지내는 하루가 쌓여 건강한 나를 빚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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