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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l 01. 2019

여름 채비

여름 한 철을 보내기 위한 소소한 준비

아, 무덥다!

덥다, 에 ‘무’라는 한 글자가 붙기만 해도 더위가 축 늘어지게 무거워진다. 매년 겪고, 수십 번을 겪은 여름이지만 어쩜 한 결 같이 겪을 때마다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지. 태어난 이래 여름이 좋았던 시절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게 좋은 여름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지독하게 더위를 탔다. 여름철 학교에 다녀오면 친구들은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는데 내 얼굴에서만 땀이 ‘철철’ 흘렀다. 흉하고 창피했다. 모공이 커서 그런가 싶어 거금 들여 피부 관리도 받아봤는데 소용이 없었다.


얼굴만 그렇다면 어떻게든 막아본다 치더라도 온몸에서도 땀이 분수처럼 흘렀다. 여름에 외출하고 돌아오면 내 옷은 바다에서 수영하고 온 듯 푹 절어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여름옷은 비싼 것을 사지 않는다. 비싸든 싸든 하도 금방 헤지고 천이 삭아버려서 얇고 싼 옷을 여러 개 사서 돌려 입고 만다.


이런 사유로 매년 초여름은 내가 바짝 긴장하는 시기다. 겨울의 월동준비는 따끈한 마음으로 한다면, 여름은 각오가 깃들어 있달까? 월동준비의 반대말로 월하 준비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 말이 입에 착 감기지 않아 나는 이 시기를 ‘여름 채비’라 부른다.


여름 채비는 5월 말부터 시작된다. 일단 언제 틀지 모르는 에어컨 필터를 청소하고 선풍기를 꺼내 먼지를 닦는다. 갑자기 찾아온 무더위에 에어컨 트는 게 무섭다면 사방이 지옥일 것을 알기에 가장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기계들이다.


5월부터 늦은 밤을 제외하고는 늘 반팔을 입고 다니는 편인데, 옷이 금방 낡아버리니 이 무렵에 튼튼한 소재의 면 티셔츠를 여러 개 사둔다. 남편의 옷을 정리하면서 낡거나 진 옷을 찾아 버리는 것도, 늘어진 티셔츠를 골라내고 새 티셔츠를 사서 채우는 것도 이 무렵이다.

지독히 더워지기 전 미용실에 가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펌이라도 하면 하루 이틀 머리를 감지 말아야 하는데 여름에 펌을 하고 나면 그 하루 이틀이 아주 고역이다. 6월 초쯤 가려던 미용실을 시기를 놓쳐 미루다가 지난 주말에야 머리를 자르고 펌을 했다.

‘아, 지금이라도 머리를 해서 다행이다.’

예정된 외출이 없는 월요일까진, 그리고 지금 정도의 더위는 참아볼 요량이 있다고 느낄 때까진 다행이다.


미용실에 다녀온 뒤에는 집에서 치러야 할 여름 채비들이 있다. 집에 돌아와 씻고 난 다음 부엌으로 향했다. 여름철 즐겨먹을 냉면에 올릴 무절임을 만들기 위해서다. 냉면에 올릴 야채로는 싱거운 오이보다 새콤달콤한 무절임이 좋다. 껍질을 깐 무를 깨끗이 씻고 채칼에 끼워 얄팍하게 썬다. 무를 써는 동안은 얕은 소리만 들려온다.

사박사박, 사박사박.


수북하게 쌓인 무를 통에 담고 설탕과 식초와 소금을 적당히 배합한 초를 붓는다. 별다른 양념을 넣지 않고 이 세 가지만 넣어도 무가 가진 본래의 수분과 알싸하고 시원한 맛이 적절히 섞여 냉면 위에서 아작거릴 무절임으로 탄생한다.

냉장고에 배합초 냄새가 날까봐 비닐을 한 꺼풀 씌우고 뚜껑을 덮습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어려운 채비를 위해 남편을 부른다. 계절이 바뀔 무렵 반드시 해야 하는 냉장고 청소가 있다. 평소에는 야채를 담는 바구니나 눈에 보이는 칸막이를 수시로 닦지만 냉장고 전체를 삭삭 닦는 청소는 아무래도 혼자 하기 어렵다.


냉장고 속 칸막이와 서랍을 하나하나 꺼내놓으면 남편이 주방세제로 시원하게 씻어내고 행주로 물기를 닦아 가져온다. 그동안 나는 내부를 남김없이 구석구석 닦는다. 냉장실을 먼저 닦은 다음 냉동실의 식품을 잠시 냉장실에 넣어둔 채 똑같은 방법으로 냉동실을 닦는다. 이렇게 닦는 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둘 다 적당히 땀을 흘린 상태가 되지만, 냉장고를 열었을 때 군더더기 없이 상쾌한 냉기가 흘러나와 만족스럽다.


과일은 제철과일로 들인다. 5년 차 주부지만 여전히 과일과 야채 고르는 게 미숙해서 요즘은 온라인 장보기를 하면서 과일을 산다. 미숙한 나보다 물건을 담아 보내는 쪽이 좀 더 잘 골라주지 않을까, 라는 말도 안 되는 기대심을 품기 때문이다. 물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입장은 많이 다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온라인 장보기로 받은 과일이 내가 고른 과일보다 맛이 좋았다.


여름을 맞이하며 수박을 주문했다. 남편은 여름만 되면 수박 욕심을 낸다.

“집에 수박 있어?”

“어제까지 수박 먹었는데 또?”

“응! 그래도 수박 또 사자!”

모카는 아직 어려서 수박 못 먹어.

남편은 길을 걷다 수박만 보면 물어본다. 어제까지 수박을 먹었어도 오늘 수박이 없으면 또 사자고 한다. 밥은 덜 먹더라도 여름이면 수박에 사족을 못 쓰는 남편이다. 과일을 손에 들고 먹기 싫어하니 수박을 사 오면 껍질을 모두 걷어내고 속살만 네모지게 썰어 큰 유리통에 담아놓는다. 냉장고에서 얼얼하도록 시원해진 수박을 접시에 담아내면 만족스레 수박을 먹는 남편의 귀여운 웃음이 떠오른다.


수박은 손질하고 나면 껍질이 종량제 봉투를 가득 채우는데, 이때마다 어릴 적 먹던 수박껍질 무침이 떠오른다.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여름 기억. 도시락 반찬으로 수박껍질 무침을 가져가는 날이면 친구들의 당황한 얼굴을 마주했던 아동기의 수치.


오늘 아침엔 방석들도 모두 꺼내 세탁했다. 반짝거리는 햇빛에 바짝 말려 다시 제 자리에 놓으면 올여름분의 채비는 모두 끝이다. 올해는 유독 차분하고 조용하게 치른 여름 채비. 5년의 경험이 쌓여서일까. 유순하게 흘러간 여름 채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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