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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Oct 26. 2017

노부부의 닭강정

내가 우연히 만난 닭강정 냄새는 서글픈 혼란이었다.


‘외식’이라 함은 집이 아닌 외부의 다른 곳에서 음식을 사 먹는 것을 말한다. 어릴 때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친구들이 자랑하듯 “우리 집 어제 외식했어.” 따위를 말한 것 같다. 그 시절 외식은 근사한 것, 왠지 비싼 것, 여유 있는 집에서 가능한 것쯤으로 느꼈다.


시절을 따지자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30년 전이니 아무래도 전업주부가 있는 가정에서 외식을 자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돈에 여유가 있고, 주부가 요리를 한두 번 쉰다한들 문제가 없는 가정이란 뜻일 것이다. 친구들이 외식을 자랑할 때 나도 속으로 외식을 소망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 ‘외식’은 마치 금기어, 혹은 절대 해서는 안 될 타락한 식사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큰 주택을 소유하고, 당시 유행하던 브랜드의 자동차도 가진 주제에 내 아빠는 지독하게 인색했다. 생활비를 넉넉히 주지 않으면서 식탁에 소고기가 없으면 엄마를 타박했다. 엄마는 아빠의 경제관념과 실생활의 간극을 메꾸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여전히 아빠를 떠올리면 화가 치미는 것은 어릴 때부터 이런 소소한 일들에 앙금이 풀리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빠가 지독을 떠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외식이 너무나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밖에서 짜장면 한 그릇을 사 먹어도 외식일 텐데, 집이 아닌 곳에서 먹는 음식은 굉장히 황홀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를 조르고 졸랐다. 나를 포함한 세 자매는 수시로 엄마에게 외식을 졸랐다. 다행히 나만 조르지 않아서 양심의 가책은 덜했다. 열심히 조르고 조른 후에 검소한 엄마 주머니에서 나오는 최고의 배려는 ‘닭강정’이었다.


동네 시장에 노부부가 운영하는 ‘용일 닭집’이라는 가게가 있었다. 시장 입구에서 오십 미터쯤 걸어가면 나오는 닭집이었다. 용일 닭집은 딱히 선반이나 가구류가 거의 없이 커다란 업소용 냉장고 하나, 튀김용 솥 두 개, 양푼 몇 개가 도구의 전부였다. 아주 단출하게 닭강정과 후라이드 통닭만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가게 안쪽에는 노부부가 생활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칸방이 딸려 있었다. 단칸방에는 노오란 장판이 깔려 있고, 늘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었다. 나는 닭강정 포장이 완료될 때까지 뻔뻔하게 그 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다 “할아버지, 7번 틀어주시면 안 돼요?” 따위의 건방진 요구도 했다.


주로 포장을 담당하는 할머니는 닭강정을 싸고, 주로 닭강정 제조를 담당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할아버지가 내 얼굴은 쳐다도 안 보면서 채널은 돌려주셨다. 겨울철 닭 포장에 시간이 걸리면 언니와 나는 뻔뻔하게 할아버지가 덮고 있는 빨간 털 담요 밑에 발도 넣곤 했다.


이곳의 닭강정은 맛있고 양이 많았다. 붉고 푸른 고추가 듬성듬성 들어가고, 달콤한 소스가 줄줄 흐르는 닭강정에 땅콩이 넉넉히 뿌려져 있었다. 정말 달콤하고 맛있어서 강정을 다 먹고 은박지에 소스가 남아있으면 언니와 나는 찬밥을 가져와 비벼 먹기도 했다.


지금 상상하니 살짝 궁상맞긴 한데, 외식을 대신한 우리의 소중한 닭강정을 국물까지 즐기는 방법이었다. 양도 푸짐했다. 한 마리만 시켜도 어찌나 양이 많은지 종이상자 두 개로 나뉘고도, 상자의 뚜껑이 불룩하게 위로 솟을 정도였다. 요즘 사 먹는 닭에는 댈 것도 아니었다.


당시 시장 닭집엔 배달문화가 없었다. 냉장고에 붙여둔 전단 자석의 번호로 엄마가 전화를 걸면 삼십 분 후 둘째 언니와 내가 자전거를 타고 닭집으로 향한다. 씩씩한 둘째 언니는 자전거를 운전하고, 운동신경이 빈약한 나는 뒤에 탄다.


나의 역할은 닭강정을 안전하게 팔에 끼고 오는 것이었다. 용일 닭집에 도착해 할머니가 닭강정을 싸주면 돈을 지불한다. 인사를 하고 다시 자전거 뒷자리에 타면 언니는 “꽉 잡아!”, “봉지 잘 잡아!”라고 연신 잔소리를 했다. 언젠가 언니의 자전거 뒷자리에서 두부 봉지를 놓치는 바람에 두부가 바퀴 리듬을 타며 으깨지는 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두부가 자전거를 만나면 이렇게 되는구나, 하며 학습효과를 얻었는데 언니에게는 몹시 짜증 나는 일이었나 보다. 닭집부터 집까지 이어지는 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닭강정을 소중히 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즐거웠다.




여느 날도 마찬가지로 외식을 조른 우리는 닭강정 득템에 성공했다. 둘째 언니와 닭을 찾으러 간 날, 늘 노부부가 함께 일하던 용일 닭집에 할머니만 보였다. 말없이 닭강정을 포장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혼자 가게를 할 수 없어 아들 내외가 가게를 할 거라고, 오늘이 할머니가 하는 마지막 날이라고도 하셨다.


돌아가는 자전거에서 언니는 잔소리를 안 했다. 나는 이상하게 무서웠다. 누군가의 죽음과 노화를 겪어본 일이 없던 열 살 남짓의 나는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나의 조부모들도 백 년 후쯤 돌아가시는 줄만 알았던 어린 시절, 닭집 할머니의 얼굴은 슬펐고 닭집 할아버지가 덮고 있던 빨간 털 담요가 자꾸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도 왠지 그 단칸방에서 털 담요를 덮고 계셨을 것만 같았다.


언니와 나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닭강정 상자 두 개를 내밀었다. 식탁에 펼친 닭강정은 어쩐지 돌아가신 닭집 할아버지의 쭈글쭈글한 주름을 닮아있었다. 그 날 이후 한 번 더 닭을 주문했지만, 아들 내외가 만든 닭강정은 예전 맛이 아니었다. 엄마는 냉장고에서 전단 자석을 떼어버렸다.



숱한 세월이 흘렀다. 요즘 SNS를 하다 보면 음식도 사진으로 유행을 타는구나 싶다. 과거 음식의 입소문은 사람들끼리 모여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있었다. “너 거기 음식 먹어봤니?”, “나 지난 주말에 거기 가봤는데.”, “우리 동네에 맛집 있는데…….” 등의 이야기 속에 맛과 상상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만 해도 유행하는 음식과 가게, 대표 메뉴를 알 수 있다.


얼마 전 주문한 닭강정도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됐다. 더욱이 재밌는 것이 닭강정의 맛도 맛이지만, 그 닭강정 가게 사장 아내가 유명한 모델이었다. 닭강정 맛과 모델은 관계가 없지만(있나?) 문전성시를 이루도록 가게는 번창한 모양이었다.


인증샷과 맛스타그램에 그 집 닭강정이 넘쳐나면서, 나도 그 유행에 휩쓸리고 말았다. 신기하게도 택배로 받아볼 수 있었다. 프랜차이즈처럼 곳곳에 발을 뻗어둔 매장이 아니라 택배 배송이었다. 잘 싸인 스티로폼 박스 속에는 하얀 용기에 가득 담긴 닭강정이 두 팩 들어있었다. 안내에 따라 닭강정을 접시로 옮겨 전자레인지에서 녹여줬다. 그리고 한 입.


살이 많은 부분으로 내 입에 들어간 닭강정을 맞이한 미각, 함께 반응한 후각은 그 옛날 노부부가 만든 닭강정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가 싶다가도 닭강정은 재료가 비슷하니 그럴 거라며 일부러 담담하게 먹었다. 닮아도 너무 닮은 냄새. 후각이 민감한 내가 우연히 만난 닭강정 냄새는 서글픈 혼란이었다.


나중에 검색을 좀 더 해봤는데 어릴 적 내가 먹은 닭집과 이 닭강정의 정체는 별다른 연관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닮은 맛과 냄새는 음식을 다 먹고, 환기를 하고, 잠자리에 누워도 코끝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 날 보았던 닭집 할머니의 안부는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궁금해 한들 이제 세상에 안 계시지 않을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를 따라가셨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 말이다.


닭강정을 먹을 때 남편과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엄마, 맥주는 무슨 맛이야?”라고 자주 묻던 열 살 남짓의 내가 다시 언니의 자전거 뒤에 앉았다. 고불거리는 시장길 바닥엔 물이 고여 있었다. 마지막이라던 할머니는 가게 밖까지 나와 우릴 배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내 아른거렸다.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이 시장길 바닥의 그 물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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