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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y 03. 2018

용유에 다녀왔다.

어릴 적 가족들과 밥을 해 먹고 공놀이를 했던 바다

서울에 갈 일이 있으면 집 앞에서 경의선을 타고 나간다. 경의선을 타려니 약속 장소는 주로 홍대다. 어느 날 친구를 만난 후 집에 돌아가는 홍대입구역의 벽면에서 익숙한 단어를 만났다. ‘용유’였다. 내가 알던 그 용유도에 전철역이 생긴 거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자기부상 열차가 그쪽에 연결된 모양이었다. 기억 속 용유도가 이제는 전철을 갈아타고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됐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여보, 용유역이 생겼대. 자기부상열차래. 그거 타면 바다에 갈 수 있어.”

“용유도가 바다야?”


사람들이 영종도는 알아도 용유도는 잘 모를 만도 하다. 인천 사람들이야 용유도, 신도, 무의도, 작약도를 알지만 다른 지역 사람들은 모를 수 있다.

“응, 예전에는 섬이었는데 지금은 매립해서 그냥 이어진 땅이야. 우리 이번 토요일에 용유 가볼래?”

남편은 바로 승낙했다. 거창한 해변과 푸른 물색은 아니지만 그래도 용유는 내게 정감 어린 섬이니까 함께 가고 싶었다.


기억하는 한 내가 태어나 4살 때까지 살던 곳은 일종의 판자촌이었다. 단칸방에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가 살았고, 그 주변 여러 집이 한 개의 재래식 변소를 공동으로 쓰는 집이었다. 높은 언덕배기 곳곳에 옥수수 알알이 박힌 듯 집들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몰랐는데, 한참 지나서 내가 살던 곳이 바다에서 가까웠고, 전쟁 직후 바닷가에서 나온 자원으로 먹고살던 사람들이 모인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됐다.


4살 전의 기억이라 온전하진 않아도 나는 대강 기억하는 장면들이 있다. 단칸방에 옹기종기 살고 있었으니 우리 집이 가난했던 것은 분명하다. 기술자였던 아빠는 한국에서 일했다가 중동에 나가 일하기도 했고, 일이 끊기거나 다쳐서 집에 누워있던 기간도 길었으니 다섯 식구 먹고 살기엔 꽤나 고단했을 것이다.


엄마가 담담하게 했던 얘기 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집 근처 바닷가 갯벌에 나가 조개를 캐 젓갈을 담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외할머니가 대주는 쌀로 밥을 지어 단무지에 조개젓을 놓고 끼니를 때운 날이 많았다고 하니 당시의 사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못 살던 우리 식구지만 여름철 휴가를 갔던 것이다. 아무리 삶이 각박하다 한들 젊은 나이에 시집온 엄마는 남편과 어린 딸들을 데리고 잠시나마 기분을 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현실적인 휴가를 떠났다. 바로 용유도였다.

용유도에는 엄마의 사촌 이모가 살고 계셨다. 내가 용유 이모할머니라고 부르던 분이셨다. 친척이 사는 용유였고, 배 타고 조금만 들어가면 나오는 곳이니 못 갈 것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친척들과 간단한 조리도구를 챙겨 용유도로 향했다.


지금은 해변에 식당이 즐비하지만 그때는 그저 모래사장과 갯벌뿐이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이라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게 눈에 띄는 곳이다. 그 해변을 ‘마시란 해변’이라고 불렀다. 근처에 선녀바위가 있고, 또 좀 더 가면 왕산 해수욕장과 을왕리 해수욕장이 나온다. 물론 어릴 적에는 그런 해변의 구분 따위 없었다. 서너 살의 나는 용유도에 도착하자마자 모래사장을 돌아다녔다. 신기하게도 나는 어릴 적 바다를 오고 간 경험이 있어서인지 차멀미는 심하게 하면서 지금도 뱃멀미는 없다.


해변에 도착한 엄마와 아빠는 천막을 쳤다. 그 시절 텐트는 귀했다. 긴 장대를 네 귀퉁이에 꽂고 천막을 씌워 그 아래 돗자리를 깔아 앉을 곳을 마련했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 남자 어른들이 조개와 게 따위를 캐왔다. 엄마와 여자 어른들은 그것들을 넣고 매운탕을 끓이고 밥을 지었다. 온 식구들이 둘러앉아 따끈한 찌개에 밥을 먹었다.


그 이후에는 사촌들과 모래사장에서 뛰어놀았던 것 같다. 공놀이를 했던지, 그저 달린 건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사촌들과 쪼르르 서서 찍은 사진이 아직 있는 걸 보면 재밌게 놀았던 것 같다. 사진 속 아이들 중에 내가 가장 어렸다. 어른들은 낮잠을 자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음료수를 마시곤 했다.


그랬던 용유도는 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나오면서 자주 가지 않는 곳이 됐다. 시간이 흘러 그곳이 매립돼 영종도와 한 몸이 되고, 용유도의 섬 도(島) 자가 무색해지는 동안에도 그곳은 언제든 되새길 수 있는 추억의 장소였다. 어렴풋한 네 살 배기의 기억이었다.


남편과 용유에 가기로 한 토요일 아침,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혹시나 햇볕이 뜨거울까 모자까지 챙겨 나왔다. 까마득한 그 모래사장에 자기부상 열차가 놓여 이렇게 쉽게 가게 되다니. 나는 아침 내내 속이 얼얼했다.  


경의선을 타고 공항철도로 갈아탄 다음 인천공항에서 자기부상 열차로 옮겨 탔다. 자기부상 열차는 선로 위를 둥실 뜬 채로 달린다는데, 정말 그래서인지 보통의 열차보다 진동이 없었다. 종점인 용유역에 내렸다. 잘 닦인 차도를 건넜는데 해변으로 가는 길에 인도의 정확한 구분이 없어서 차를 피해 걷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이윽고 마시란 해변에 도착했다. 아무리 내가 네 살 전을 기억한다지만 지형까지 완전히 기억할 순 없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익숙한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동해처럼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가 아니고, 남해처럼 짙푸른 물이 깊게 도사리는 바다도 아니다. 물이 쭉 빠져 저 멀리 수평선이 반짝거리다가 어느 순간 물이 쑥 들어오는 인천의 바다였다.


마침 미세먼지가 걷히고 하늘이 푸르렀다. 이 해변의 어딘가에서 어릴 적 내가 가족들과 밥을 해 먹고 공놀이를 했다는 사실이 책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남편이 내게 기억이 나느냐고 물었다.

“기억하기에는 너무 많이 변했고, 상가도 들어서서 잘 모르겠어.”

우리는 해변에서 사진을 찍고 펼쳐진 갯벌을 바라보고 깨끗한 공기를 실컷 마셨다. 출출한 배를 달래기 위해 근처 식당에 들어가 해물 칼국수를 먹고, 통유리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자기부상 열차의 시간에 맞춰 카페에서 나서 다시 해변을 거닐며 발이 푹푹 들어가는 모래사장과 힘을 겨뤘다. 어릴 적 장소라기엔 너무 어렴풋해서 뭐라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이렇게 변해가는 바다가 아쉬웠다. 그러면서도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선로가 놓인 바다는 반가웠다. 예쁘고 근사한 바다는 아니지만 그 바다가 던져주는 무언가를 먹고살았던 나의 유년시절이 있어서인지 그저 정겨웠던 용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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