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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13. 2018

배에 물이 들어오면

바다 냄새가 시큰한 아침이 있다.

이 얘기는 이미 많이 해버려서 지인들에겐 식상할지 모를 일이다. 특히 남편은 여러 번 들었으니, 말머리만 꺼내도 “아, 그때 그 일?”하고 되물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날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구체적으로 바다, 배 이런 키워드가 낚싯바늘에 하나씩 걸려올 때마다 떠오른다. 오늘도 그날 일을 떠올리며 인천의 바다 냄새와 여객선 특유의 기름 냄새가 함께 담긴 뇌의 몇 번째 트랙쯤에 있는 기억을 꺼내본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다. 여섯 살에 유치원을 갔으니 분명 다섯 살이었다. 지금이야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아이를 맡기는 게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내 유년기 무렵의 어머니 세대에겐 자식을 너무 어릴 때부터 교육기관에 맡기는 것을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어린 자식을 남의 손에 맡기냐는 거였다. 그래서 유치원 보내도 걱정 없을 정도가 되기 전엔 항상 부모가 아이 곁에 있었다. 일을 하는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일터에 나갔다.  


나의 엄마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이었다. 전업주부로 언니 두 명을 키웠고 내가 네 살이 될 때까지도 그랬다. 그랬던 엄마가 나의 네 살 무렵 폭발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활달한 성격의 엄마가 수년을 전업주부로 산 것도 신기하다. 약간 서운하게도 나의 생후 36개월을 채우기를 잔뜩 기다렸다가 폭발한 느낌이 들지만, 여하튼 그랬다.


폭발하자마자 엄마는 가게를 냈다. 작약도라는 섬이었다. 그곳에 오락시설을 짓고 사격, 양궁장을 꾸며 관광객을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오락시설이라 해도 가건물이었다. 철골로 지은 뼈대에 천막과 가벽을 세우고 활과 고무총을 놓을 정도의 매대를 세운 곳이었다.


엄마는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를 도무지 어쩔 수 없어서 그곳에 매일 데리고 다녔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쯤 가면 인천여객터미널이 나온다. 그곳에서 장사나 일 때문에 섬에 가는 사람은 손님들이 드나드는 문이 아닌 작은 쪽문을 통과해 통행증 비슷한 것을 보여주고 배에 탔다. 배는 두 개 층으로 된 작은 여객선이었는데, 아마 50명쯤 태울 수 있는 배였을 것이다. 한 시간에 한 대씩 다니는 그 배는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간마다 오고 가며 사람을 실어 날랐다.


엄마는 가게에 도착하면 천막을 걷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동안 나를 벤치에 앉혀놓고 가져온 책 같은 걸 꺼내놓고 읽게 했다. 그것을 다 보고 나면 나처럼 부모님을 따라온 인근 가게 아이들과 섬을 싸돌아다녔다. 위로 좀 올라가면 잔뜩 녹슬긴 했지만 그네와 뺑뺑이가 있었다. 거기서 실컷 놀고 나면 손에서 쇠 냄새가 났다.


배가 고프면 다시 가게로 내려왔다. 그럼 엄마는 녹이 잔뜩 묻은 내 손을 박박 씻긴 다음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 나와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또다시 아이들과 모여 섬을 돌아다녔다.


섬의 입구 주변으로는 뭐라 뭐라 적힌 수건과 열쇠고리 등의 기념품을 팔았고, 부침개와 막걸리를 팔았다. 입구의 반대편 쪽으로 가면 해산물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고, 그중 엄마와 친분이 있는 이모의 가게에 가면 빙수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 이모가 파란색 구형 빙수기의 손잡이를 돌리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얼음가루가 그릇에 쌓였다. 그 모습을 보며 어른이 되면 빙수가게를 차리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다. 


조막만 한 섬이라 엄마가 내 행방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기껏 가봐야 빙수가게나 그네 주변이었다. 대신 섬에 손님이 많이 들어오는 날이면 걱정이 됐는지 눈앞에 보이는 매점이나 가게 안쪽 자리에서만 놀게 했다.

그땐 어려서 돈의 가치를 잘 몰랐지만, 나중에 듣기로는 엄마가 작약도에서 장사로 아빠가 공장을 운영하며 버는 돈의 열 배쯤을 벌었다고 했다. 엄마의 사업수완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사업수완이란 건 어디서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타고난 배포와 같다고 본다. 뭍도 아니고 굳이 섬에 시설을 짓고 장사를 하는 엄마와 그 주변 사람들의 배포는 남달랐을 것이다.


누가 그렇다고 일러주지 않아도 나는 그걸 체감했다. 그때 엄마의 나이는 고작 스물여덟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섬에서 지내다 노을이 지기 전에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돌아와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었다.


아, 설명이 길었다. 그럼 이제 그날의 기억을 다시 꺼내봐야겠다. 그 일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배에서 벌어졌다. 작은 여객선은 1층과 2층으로 나뉜 구조였고, 섬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배 아래층 한편에 만들어놓은 좌식 공간에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낮잠을 자거나 몇몇은 화투를 쳤다.


나는 아래층을 돌아다니거나 엄마 곁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진한 바다 냄새가 코를 스쳤다. 배에 물이 차기 시작한 것이었다. 간혹 파도가 심한 날은 그렇게 배 안으로 물이 밀려들어왔다. 손님들은 난리가 났다. 1층에 있던 손님들은 모조리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렸고, 발을 동동 구르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선장은 방송으로 파도가 심해 물이 들어온 거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곧 항에 도착하는데 배 안에서 너무 뛰면 물이 더 들어올 수 있으니 진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큰 배와 달리 작은 배는 파도가 심할 때 안에서 사람이 우르르 몰리면 더 기울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정보는 배를 많이 타본 사람만 알 수 있지, 어쩌다 타본 사람들은 알 길이 없었다. 2층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럴수록 바닷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꿀렁꿀렁 소리를 내며 배로 밀려들었다.


나는 그때 엄마 무릎을 베고 반쯤 누워있었던 것 같다.

“엄마, 우리는 안 올라가요?”

“쉬-. 안 올라가도 괜찮아.”


엄마는 괜찮다면서도 어쩐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나를 재울 때 하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휘파람을 불 듯 “쉬히- 쉬히” 소리를 냈다. 엄마가 작은 소리로 말하는 동안에도 손님들은 기둥을 붙잡고 울었다. 우리 곁의 섬사람들만 계속 화투를 쳤고, 가만히 노래를 불렀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그때 사람들은 인천 바다인데 왜 부산항 노래를 불렀을까.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는 바람에 자꾸 졸음이 왔지만 화투 치는 아저씨, 우리 가게 앞 매점 아줌마의 목소리, 섬 입구 매점 할머니와 부침개 가게 아줌마 노랫가락이 자꾸 맴돌았다. 뿌옇게 빛이 들어오는 작은 창문이 보였고, 나긋한 노랫소리. 그 시간은 고요하고 가벼웠다. 가벼운 공기가 섬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튕겨 올랐다. 모두들 조금씩은 떨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배는 항에 닿았다. 손님들은 서로 밀쳐가며 배에서 내렸다. 다행히 배에 물이 들어온 순간에서 더 극적인 일은 없었다. 배에서 내리 섬사람들이 그랬다. 배에 물이 찰 때 가만히 있어도 들어올 물은 들어오겠지만, 위로 올라간다고 해서 배가 가라앉지 않는 법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도 두려웠던 거다. 오랫동안 배를 탄 사람들이 그렇다고는 했지만, 올라가면 더 위험해지니까 우리라도 여기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겠지만, 그래도 무서웠을 것이다. 그래서 노래라도 부르고, 어쩌다 보니 인천 바다에서 부산항을 부르며, 그렇게 엄마는 “괜찮아, 괜찮아.” 나직이 말하며 어린 나를 어쩌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풍경이 떠오르는 날이 종종 있다. 오늘처럼 가을이 끝나갈 무렵, 섬 장사를 잠시 쉬어야 하는 겨울이 코앞에 오면 천막을 단디 묶고 자물쇠를 꼭꼭 채워 봄이 오기 전 마지막 배를 타야 하는 바로 그 무렵을 아직 내 몸이 기억해서일까.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어렴풋한 노래와 바다 냄새가 시큰하다.

이전 14화 용유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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