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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15. 2018

간사이공항을 기다리며

폭우와 함께 찾아오는 나긋한 손님

얼마 전 태풍 제비가 일본 간사이 지방에 굉장한 피해를 입히고 떠났다. 정전 상태의 공항에 수천 명이 갇혀 있었다니, 정말 끔찍하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공항은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먹고, 쉬고, 자는 게 가능한 시스템을 완비한 곳 아닌가? 하지만 정전이 되면 화장실과 물 사용이 안 되고, 편의점이 보유한 음식물이 몇 천 명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사로 접하고 나니, 이 소식이 공포로 다가왔다.

간사이 공항의 재해에는 비교가 안 될 정도지만, 태풍의 진한 기억이 남는 날이 있었다. 당시 20대 중후반이었으니 대강 칠팔 년 전일 것이다. 그날 동호회에서 친분이 있는 네다섯 명과 홍대 인근에서 약속이 있었다. 추석 연휴에 시골에 가지 않지만 별다른 일정이 없는 몇 명이 모여 밥 먹고 차를 마시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나 나눌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하지만 비가 온다 해서 못 갈 곳은 없다 생각했다. 나와 달리 엄마는 명절인 데다 날도 궂은데 나간다며 아침부터 야단이셨다.

“너 이럴 때 나가면 고생만 하지 뭘 자꾸 나가려고 해. 집에 있어!”

“싫어. 약속 있단 말이야.”

“친구는 다음에 만나도 되지. 추석인데 비까지 오잖니.”


성을 내는 엄마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나갈 채비를 했다. 추석 연휴 첫날이었다. 추석이라고는 해도 한창 여름 날씨라 얇은 원피스를 입고 레인부츠를 신었다. 1호선을 탄 다음 신도림에서 2호선을 갈아타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다.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는데 전철역 내부 바닥이 엉망이었다. 빗물과 어디선가 휩쓸려온 흙이 섞여 아주 더러웠고, 넘어지기에 딱 좋은 바닥이었다. 엉금엉금 벽을 타고 걸어 올라갔다. 약속한 인원들이 모두 모여 홍익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대충 알아둔 한식당 하나에 들어갔다. 우산을 접고 비를 털면서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이야, 비 진짜 많이 온다!”

“완전 장대비네.”

비를 털면서 보니 원피스의 절반이 젖어 있었다. 다행히 요란한 무늬로 채워진 원피스라 속이 비치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옷이 마를 때까지 찝찝하게 있어야 했다.

그 식당은 모인 사람 중 한 명이 최근 다녀왔는데 괜찮다고 추천한 곳이었다. 정갈한 한정식 세트가 나온다고 해서 함께 찾은 그 식당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조금 신기한 풍경을 만났다. 천정에서 물이 새는지 식당 군데군데 떨어지는 물을 받는 양동이가 놓여 있던 것이다. 개화기 시절의 소품으로 꾸며진 식당에 금속 양동이까지 있으니 정말 그 시대로 훌쩍 넘어가버린 것 같았다.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 비까지 새니까 진짜 개화기 식당 같다.”

그 가게를 추천한 친구도 동의했다.

“그러게, 비가 오면 이런 분위기도 나는구나.”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 한정식 세트메뉴를 먹었다. 한정식이라고 해도 큰 상에 떡 벌어지게 차리는 정식이 아니라 주 요리와 밑반찬이 아담하게 나오는 음식이었다. 한참 맛있게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일행 한 명이 놀란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야, 큰일 났다. 홍대입구역 침수됐대.”

한 시간 전쯤 그 역을 통해 이곳에 온 나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뭔 소리야. 나 아까 홍대입구역에서 내렸는데.”


일행이 보여준 기사를 보니 침수는 사실이었다. 내가 홍대입구역을 나와 조금 경사진 위쪽의 홍익대 정문으로 오는 동안 폭우가 더 심해졌고, 홍대입구역이 물에 잠긴 거였다. 그래서 전철 운행이 중단됐다. 일행 중엔 나만 인천에 살았고, 다들 서울에 살았다. 전철이 안 다녀도 아득바득 버스를 타면 집에 갈 수 있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전철이 없으면 삼화고속이나 겨우 타는 신세였다. 다들 별 일 없을 거라 나를 안심시켰다. 그때만 해도 별 걱정이 없었다.

“괜찮아. 물이야 빠지겠지.”

“우리나라 삼면이 바다잖아.”


식사를 마친 우리는 창밖을 내다봤다. 비가 많이 오긴 했는데 경사진 위쪽에 있어서인지 물은 발목에 찰방거릴 정도만 차있었다. 식사를 마쳤으니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우리는 각자 겪어본 태풍의 경험과 비 이야기로 “내 경험이 더 굉장하다”며 경쟁을 했고, 간간히 뉴스를 확인하는 지인의 소식을 전달받았다.


“광화문 교보문고도 물에 잠겼대.”

“와, 그럼 책들이 막 둥둥 떠다니나.”

“우리 광화문 가서 책 건져올까?”

“나는 레인부츠 신었으니까 가능. 같이 광화문 갈까?”

이런 농담들을 뿌리고 주워 삼기며 시간을 보냈다. 밖의 빗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우리의 대화 소리가 자꾸 조곤조곤하게 깔려 들었다.


카페에서도 몇 시간을 더 보냈다. 너무 오래 앉아있기 뭐해서 다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우린 다시 기나긴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일까. 그날 함께 있던 사람들과는 의도적이지 않게 친근하게 지냈다. 밖의 날씨는 우리의 활동을 폐쇄시켰고, 아늑하고 보송한 실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법한 솔직한 이야기까지 전부 꺼내는 일이었다. 어차피 비가 많이 오니까 이야기할 시간은 넉넉했고, 물이 좀 빠진다거나 복구될 때까지 기다릴 요량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 달리 그날 홍대입구역의 물은 안 빠졌다. 인천으로 돌아가기 위해 타야 하는 2호선, 1호선으로 환승해야 하는 신도림역까지 모두 전철 운행이 중단됐다. 맥주 한 잔까지 걸치고 정말 헤어져야만 하는 밤이 됐음에도 전철은 운행되지 않았고, 전철역 근처에 접근도 할 수 없었다. 삼화고속도 운행이 중단됐다.


그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일행들은 스마트폰을 뒤적거려 그나마 탈 수 있는 전철역을 찾았다. 간신히 탈 수 있던 게 6호선 상수역이었다. 상수역도 지대가 조금 높은 곳에 있었다. 상수역을 기점으로 상행은 전철이 다녔고, 하행은 중단됐다. 내 목숨 줄과 같은 상수역이었다. 전철의 운행과 중단 사이에 상수역이 있었다.


나는 상수역에서 6호선을 타고 불광역으로 갔다. 그곳에는 둘째 언니의 신혼집이 있었다. 추석 연휴긴 한데 마침 언니의 시어머니가 해외에 갔던 터였다. 나는 염치도 없이 늦은 밤, 비에 쫄딱 맞아서 둘째 언니의 신혼집에 불쑥 방문했다. 비가 어찌나 거센지 우산은 무용지물이었다. 비에 푹 절어 현관에 등장한 나를 언니와 형부가 안타깝게 쳐다봤다. 그날 언니의 옷을 빌려 입고 잤다. 전화기 너머 엄마는 왜 언니네 부부에게 민폐를 끼치느냐고 고함을 치셨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올 때 입은 원피스가 보이지 않았다. 언니가 비에 젖어 쉰내가 난다고 빨아서 널어놓은 거였다. 아이고, 친절도 하셔라.

“그럼 나는 뭘 입고 가지?”


언니는 그냥 자기 옷을 입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잘 때 입었던 언니의 운동복을 빌려 입고, 전날 신고 온 긴 레인부츠를 신고 논에 일하러 가는 사람의 차림새로 집에 돌아왔다. 다행히 언니와 형부가 바로 우리 집으로 간다고 해서 그 차림으로 대중교통을 타는 비극은 없었다.


전날 술까지 마셔서 잔뜩 부은 얼굴에 위아래 짝도 안 맞는 언니의 큼직한 운동복을 입고 농부처럼 장화를 신고 집에 들어섰다. 현관에서 신발도 벗기 전부터 엄마한테 등짝을 후려 맞았다.

“그러게 명절에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그렇게 추석 연휴의 이틀을 소비했다. 집에 돌아와 내 옷으로 갈아입고, 잠시 누워있었는데 내가 홍대입구역에 내리자마자 물에 잠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겨우 상수역에서 6호선을 탈 때까지의 순간이 마치 영원과 같았다. 근사하고 로맨틱한 순간은 없었지만, 어둑한 먹구름 덕에 모든 곳의 조명이 나긋했다. 평소의 쾌활한 목소리는 빗소리젖어 조곤조곤해졌고, 긴 시간 나눈 이야기 속에 서로 감추고 있던 품 한쪽씩 나눠가질 수 있었다.


이제야 이런 이야기도 털어놓지만, 아마 내 경험은 간사이 공항에서 사람들이 겪었을 공포와 불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어쨌든 내게는 폭우가 내리는 날이면 한 번씩 떠오르는 풍경이다. 멀리 일본의 어느 공항에서 벌어졌을 수천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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