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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04. 2018

외곽의 삶

설탕 도넛의 한 알갱이로 살고 있다.

한창 찜통 같은 열기를 토해내던 7월에는 2주 연속 결혼식에 다녀왔다. 한 번은 안양, 한 번은 논현동으로. 가까운 이들의 결혼식은 언제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든다. 예전에는 봄, 가을에 결혼식이 줄을 잇더니 요즘은 계절 관계없이 많이들 식을 올리는듯하다. 일단 식장 내에서는 냉난방이 잘 되니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 영하 20도 가까운 날씨의 한파 속에 코트를 입고 예식장에 가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2주 연속 다녀온 결혼식은 반대로 찌는 듯한 여름의 무더위로 고생을 좀 했다. 평소엔 적당히 얇은 원피스 하나 둘러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그래도 결혼식에 가려니 단정한 블라우스나 원피스를 입고 신발도 단정한 것으로 골라 신었다. 어깨가 안 좋아 늘 에코백을 메고 다니지만 결혼식을 갈 때는 소재가 좋은 가방을 메는 편이다. 남편 역시 주말에는 운동화에 청바지를 선호하지만 결혼식을 가야 하니 투덜대더라도 정장을 챙겨 입는 날이다.


안양으로 결혼식을 가던 날, 나와 남편은 아침 일찍 집에서 출발했다. 예식이 11시니 10시엔 도착해야 친한 친구 곁에서 뭐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집에서 8시에 나왔건만 우리가 식장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아무리 우리 집이 파주라고는 해도 예상 시간보다 30분을 넘어 도착하다니 난감해지고 말았다.


이날 예식은 남편의 친한 친구의 결혼이었는데,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봉투 받는 일과 축가 준비로 한창 바빠 보였다.

‘거 참, 일찍 나왔는데도 은근 무안하네.’

속으로 혼자 무안해하며 식을 보고 남편의 곁에 있었다.


한 주 전에는 나와 친한 동생의 예식이었다. 이날도 예식이 11시라 부랴부랴 챙겨 나왔다. 도와줄 정도의 일은 없어도 예식 30분 전에 도착해 신부대기실에서 사진도 찍고 덕담도 전하고 싶은 날이었다. 그럼에도 여유 있게 도착하지 못했다. 일찍 챙겨 나왔지만 중간중간 전철이 연착하는 데 도리는 없었다.


학동역에 도착하니 이미 10시 35분. 출구에서 바라본 저 높은 언덕 위의 예식장이 어찌나 서운한지. 이 더위에 언덕을 걸어 올라가려니 함께 온 남편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전철에서 내리자마자 머리카락 속속들이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예식장 셔틀버스를 탔고, 10시 45분에 신부대기실에 도착한 나는 사진도 찍고 신부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나와 사진을 찍은 뒤 5분 뒤에 신부는 입장을 준비했으니, 시간이 아주 빠듯했던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식을 보고 식사를 마친 다음 집으로 가기 위해 남편과 전철역으로 향했다. 다시 무더위를 마주한 거리에서 내가 다녀온 예식장들에 편히 올 수 있으려면 서울 어디쯤에 살아야 할까 생각해봤다.


논현동에 편히 오려면 강남에 살아야 할 것이고, 안양에 가기 편하려면 신도림역이나 영등포쯤엔 살아야겠구나 싶었다. 결혼식이 있다 싶으면 일단 서울 시내가 대부분인데 내가 숱하게 참석하는 그들의 결혼식에 편리하게 올 수 있는 위치는 서울의 어디일까 심술 아닌 심술이 난 것이다.


이런 심술이 났다 해도 서울에서의 삶을 일찌감치 탐내지 않은 것은 내 의사였다. 신혼집을 구할 때 나는 서울에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남편은 대출을 더 받더라도 서울에서 살고자 했다. 둘 다 직장에 다닐 때였으니 출퇴근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자는 거였다. 그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서울에서 전셋집을 구한다는 건 정말이지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서울 시내에서 집을 구한다는 건 결혼하는 두 사람의 연봉 합산만으로 깨끗하고 여유 있는 집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 부모에게 손을 벌린다면 그 대가로 효도에 충실해야 한다는 풍습 아닌 풍습, 나와 남편이 가진 것을 탈탈 털어도 서울에서 전세를 구하려면 단칸의 원룸이거나 가로등이 희미한 동네의 아주 작은 주택이라는 데서 오는 놀라움, 그토록 열심히 일해도 서울은 전세든 매매든 우리에게 쉽사리 집을 내주지 않을 거라는 절대적인 확신. 

우리 부부는 양가의 지원 없이 결혼한 터였다. 친정에서는 살림살이를 채워주고 통장잔고를 삭삭 긁어 쌈짓돈이라도 쥐어주셨지만 시가에서는 정확하게 ‘0원’이었다. 다 큰 성인이니 애초에 집에 손 벌릴 생각은 없었다만, 친구가 결혼을 해도 축의 정도는 하는 문화권에 살면서 시가의 ‘0원’은 내 설움에 무게감을 더했다.


다행히 알뜰했던 남편과 나의 적금, 부실한 내 연봉이 정부에서 지원하는 대출조건에 맞아떨어져 우리는 서울에서 조금 벗어난 경기도 어느 도시의 작은 아파트 전세를 구했더랬다. 지은 지 23년 됐던 아파트지만 나무가 울창하고 도서관이 가까워 좋았다. 그 동네의 전철역은 출구가 두 개인데 한쪽으로 가면 서울시였고, 한쪽으로 가면 내가 살던 광명시였다.


그 집에서 살며 생각했다. 돈을 열심히 모아서 다음 집은 서울로 가겠다고. 간판이 닥지닥지 붙은 서울이 좋아 보여서가 아니었다. 서울에 살면 무슨 귀중한 혜택이라도 받을까 싶은 계산도 없었다. 다만 아침마다 전철 환승하느라 금방 지치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여름이면 빼곡한 사람들과 서로 땀 냄새를 풍겨야 하고, 겨울이면 또 얼마나 기다림이 고통스러울까.


가끔 우리의 직장들이 몰려있는 서울의 각박함이, 그 냉정함이 미웠다. 직장생활을 하려면 서울 가까이 있어야 하지만, 그 서울이란 우리에게 살 곳을 내어주지 않으니 서울이란 게 사람인 듯 모양이라도 있으면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보고 살라는 거니, 말라는 거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울에 진입하지 못했다. 전셋집 살이 2년을 하는 사이 서울 집값은 더 올랐다. 집 구하는 사람들은 전세 물건이 나오기라도 하면 업무 시간에 조퇴를 해서라도 뛰쳐나가 계약을 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난리였다.


결국 우리 부부는 다시 외곽을 찾았다. 그래도 2년간 대출 갚고 저금한 돈이 좀 있어서 깨끗한 집으로 이사 오긴 했다만 다시금 남편의 출퇴근이 걱정스러운 외곽의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 게다가 이사를 오면서 전세도 아니고 아예 매매를 해버렸다. 그 무렵엔 포기해버린 것이다. 서울로의 진입, 그 고단한 여정에서 우리는 빠지겠다고 양손을 들었다.

지금 사는 집이나 주변 환경은 참 마음에 든다. 서울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산의 능선을 볼 수 있고, 조금만 걸으면 널찍한 호수공원이 있고, 간판이 닥지닥지 붙어 때 묻은 느낌도 없다. 흥청거리는 유흥가가 없고 어린 아기들과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살기에 생기있는 동네 분위기도 나름 괜찮다.


그럼에도 가끔 이렇게 서울의 거점으로 이동할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밀려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공들여 화장한 얼굴이 무색해지게 땀을 뻘뻘 흘리며 예식장을 다녀와서일까?  인생의 짐짝처럼 대출을 잔뜩 내지 않으려던 우리 부부의 결심에 맞게 살고 있음에도 그렇다.


서울이라는 완전무결의 구를 중심으로 경기도라는 거대한 설탕 도넛이 있는데 그중 설탕 한 알갱이가 우리 집 같다. 내가 바란 건 그저 책상 한쪽 편히 놓을 공간과 겨울철 출퇴근길에 남편이 발을 동동 구르지 않을 정도의 거리였다. 우리 부부가 열심히 일해도 그 소망이 채워지지 않는 건, 글쎄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탓해야 할지 귀를 꽉 막고 집값 상승의 갈 길만 가는 서울을 원망해야 할지 여전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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