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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09. 2018

잃어버린 글씨

발전하는 것은 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업무 중에 머릿속에 엉킨 것을 정리하기 위해 볼펜을 들고 다이어리에 필기를 했다. 한참 정리한 다음, 다이어리를 보며 노트북에서 원고를 쓰고 있었다. 키보드를 신나게 치던 차에 다이어리를 보니, 누구의 글씨인가 싶다. 내가 이렇게 글씨를 못 썼던가? 희한하게 생긴 이 글씨는 내 손에서 나온 게 이상하리만치 못생겼다.


어릴 적에는 글씨가 동글동글 예쁘게 쓰면 칭찬거리였다. 지금은 없어졌겠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전교생은 지시에 따라 글씨 교본을 썼다. 얼마치의 교본을 쓰고, 가끔 숙제도 있었다. 선생님은 교본을 검사하며 글씨체를 교정했다. 글씨를 잘 쓰면 상도 받았다.


펜글씨 자격증이라는 게 있었는데, 나이 관계없이 응시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격증의 위력을 알았는지, 몇몇 친구들은 글씨를 공들여 쓰고 펜글씨 자격증을 땄다. 궁금하지도 않은데 굳이 학교에 자격증을 들고 와서 보여주기도 했다.


여하튼 나는 자격증까지 따지는 않았다. 내심 자격증을 자랑하는 친구들이 싫었던 모양이다. 자격증 운운하며 글씨 연습을 하지 않아도 나는 글씨를 꽤 잘 쓰는 편이었다. 자매 중에 큰언니의 글씨가 예뻤다. 언니의 노트를 보면 적당히 작고 휘어 쓴 글씨가 오종종하니 앉아 있었다.  


그게 예뻐서 따라 써 버릇한 것이 내 필체가 됐다. 학교에서는 별다른 노력 없이 쓴 내 글씨를 예쁘다고 칭찬했고, 학급에서 서기를 뽑을 때 항상 추천을 받았다. 학급회의 시간이나 조례, 종례 시간에 내 손은 바빴다. 교무실에 가면 담임 선생님이 오늘도 예쁘게 썼다며 늘 칭찬했다.


글씨만은 자신이 있었는지 젊을 때부터 연애편지도 곧잘 썼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이 잘난 글씨체를 보여주지 않고는 베기지 못한 것이다. 연애편지 한 편을 구성지게 쓴 다음 읽어보면 내가 봐도 근사했다. 편지를 받은 상대 역시 늘 감탄했다.


언젠가 헤어진 남자 친구가 쫌스럽게도 내가 준 선물과 편지를 모조리 돌려보낸 적 있는데, 그때 내가 쓴 연애편지를 다시 보며 스스로 감탄했다. 이렇게 감성 충만한 내용과 글씨체라니. 전시회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는 왜? 글씨가 엉망인 걸까? 글씨를 쓸 때는 다른 영혼이 내 몸에 침입하는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글씨가 못 생겼다. 이럴 리가 없는데, 글씨체가 바뀌었다. 다이어리 앞부분의 글씨들도 다시 훑어보니 가관이었다. 그중엔 내가 썼는데 알아보기 힘든 글씨도 있었다. 악필로 죽은 영혼에 빙의된 건 아닌지 고민도 했다. 나의 명필은 옛이야기가 됐다.




아마 지금도 글씨를 대신 적어주고 있는 노트북 때문인 듯싶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회사에 다니며 글씨를 손으로 쓸 일은 없었다. 하루에 10시간 정도 머무르는 회사에서 원고, 기사, 보고서 등등 내가 써내야 할 것은 모두 컴퓨터를 사용해 글씨체로 완성하지 않았나. 그중에 손으로 글씨를 쓸 것은 고작해야 달력에 쓰는 ‘회식’, ‘몇 시 인터뷰’ 등이었으니, 글씨 쓸 일은 과거에 비해 2%가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빠서인지 연애편지마저 잘 쓰지 않았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바쁘긴 해도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게 참 중요했는데, 20대 중반 이후로는 남자 친구에게 생일카드 한 장을 써도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사실 생일을 챙겨줄 만큼 오래 사귀어 본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것도 원인이었다. 내게는 참 ‘쓸 일’이 없어졌고, 의욕도 잠들었다.


어쩌다 명필에서 악필이 되고 보니 노트북이며 스마트폰이며 즐겨 쓰는 물건이 나 대신 글씨를 쓰고 있음에 어정쩡한 마음이 든다. 물건이 잘못한 것은 없는데, 나는 퇴화했다. 효율을 생각하면 발전하는 기술을 안 쓸 수도 없는데 결론적으로 나는 퇴화했다. 글씨체를 잃어버리고 나니 후회의 밀물이 들어온다.


글씨체처럼 잃어버리는 것은 나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를테면 내가 자주 가던 합정의 길거리나 수첩의 세계 등이 있다.


삐삐가 가장 문명화된 통신기기였던 시절, 주머니에 삐삐와 함께 항상 갖고 다니던 것이 작은 전화번호부 수첩이었다. 호출번호를 남겨도 되지만, 음성메시지만 남는 경우가 있고 혹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할 때 적어둔 번호를 봐야 했다. 자주 전화하는 번호는 자연스레 외웠다. 친구들끼리 서로의 집 전화번호와 삐삐 번호를 외우는 것으로 친밀감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데 핸드폰에는 전화번호를 수천 개 저장해도 될 만큼 여분이 많았다. 우리의 일상에 전화번호부 수첩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핸드폰에 번호를 저장하기 시작하면서 수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어쩐지 촌스러웠다. 당연히 누군가의 번호를 굳이 외울 이유도 사라졌다. 외면하게 된 수첩의 세계. 그곳에서 수첩들은 꺼이꺼이 울고 있을지 모른다. 아직 생명을 부지한 수첩들은 먼 시골의 유선전화기에 의존하는 노인들 곁에 붙어 살뿐이다.




합정의 길거리는 내가 대학생 때부터 자주 가는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보통의 젊은 학생들은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놀기를 좋아했지만, ‘뭘 좀 안다’는 학생들은 조금 벗어난 합정과 상수 인근에 주로 있었다. 사람 북적이는 홍대입구역보다 조용하고, 독특한 맛집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상수역부터 망원동 방향으로 걷는 길에 벚꽃이 그다지도 예쁘다는 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극동방송국 주변으로 아기자기한 술집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생기는 로맨스와 새초롬한 기억들은 독창적인 문화를 즐기던 몇몇의 특권이었다.


여러 가게가 단골이 되고, 서로 얼굴을 기억하고, 어느 장소에 가면 약속을 하지 않아도 항상 있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곳에 프랜차이즈는 감히 범접할 수 없었다. 일대일의 가게, 오로지 그곳에만 존재하는 색감이 있었다.

 

하지만 합정은 발전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전의 밀물에 졌다. 얼핏 보기에 깔끔하고 이국적으로 보이는 프랜차이즈가 합정의 길거리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조금 끈적끈적한 테이블과 조악한 가게의 분위기보다 멀끔한 프랜차이즈의 외관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프랜차이즈는 발전한 상업의 결과물이다.


오랫동안 합정이 자아낸 색감을 무언으로 공감하던 건물주들은 프랜차이즈의 노골적인 꼬임에 마음을 열어버렸다. 일대일의 가게들은 하나둘 합정을 떠났다. 특유의 로맨스는 말라버린 칵테일처럼 증발했다. 항상 있는 얼굴들은 비슷비슷하게 생긴 프랜차이즈에 정나미가 떨어진다며 떠나버렸다.


이제 합정은 어디를 가나 보이는 프랜차이즈의 간판을 달고 무색무취의 장사를 하고 있다. 합정이 가지고 있던 진한 색감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실연당한 마음으로 발길을 끊었다. 합정을 소문으로 알고 온 뜨내기손님 역시 한 번쯤 와볼 만한 곳으로 들렀다가 다시 오지 않는다.


상수부터 망원까지 이어진 길을 함부로 ‘망리단길’이라 부르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합정은 그저 합정동이고, 상수는 상수동일 뿐이다. 망리단길에 가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사진 찍는 코스는 젖어드는 추억이 아니다. 어쩌면 바깥세상에 나가기 싫어 숨어 사는 것처럼, 합정은 그러했는지도 모른다. 숨어 살다 들킨 이후로 더 이상 살 수 없어 떠나버린 동네 처녀 같았다.


지속적으로 프랜차이즈는 열었다가 닫았다가 반복하며 합정의 색감을 빼고 또 뺐다. 이제 합정은 아스팔트 냄새만 난다. 이제 나도 그곳에 갈 마음이 서지 않는다. 누군가 책임질 멍에는 없음에도 마음이 아리고 맥맥하다. 흘러버리고 잃어버린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발전하는 것은 늘 마음을 아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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