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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07. 2019

인터폰으로 만난 그녀

이웃 아닌 이웃, 그녀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명절 연휴를 앞둔 때였다. 일감 몇 가지를 받아놓은 게 있었는데 웬만하면 연휴 전에 마무리를 할 요량이었다. 회사 다닐 때를 생각해보면 연휴를 앞둔 날은 퇴근이 이르기도 하고, 일거리가 들이닥치면 검토하는 입장이라도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이왕이면 연휴 전 여분의 시간을 두고 마감을 마치려 부단히 애를 쓰던 중이었다. 마침 남편은 지방 출장 중이었고, 집에는 오로지 나뿐이었다. 남편과의 통화가 아니라면 누군가와 말할 기회는 없었고, 용건이 있는 지인들과는 카톡만 주고받았다. 며칠간 남편과의 통화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구강 속 혀와 이와 잇몸과 그 외 여러 부위들을 말할 때 어떻게 사용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말없이 원고를 쓰고, 배가 고프면 간단히 빵을 먹으며 일을 해치우던 나날 중 그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인터폰으로 과감하게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택배기사가 왔나 싶어 인터폰 앞에 선 나는 낯선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는 그녀를 봤다.

“누구세요?”

“근처 사는 이웃인데요. 제가 공부하는 데서 과제가 있어서 그런데 설문조사 하나 해주실 수 있나요?”


어림잡아도 50세에 가까워 보이는 얼굴인데 늦깎이 공부라도 하는 분인가 싶었다. 과거의 나는 고작 1년 재수를 했음에도 1년이나 밀렸다는 기분에 힘들었는데, 중년에 새 공부를 시작한 분이 과제를 위해 이렇게 설문조사를 다니신다니. 우와,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선뜻 문을 열지 못했던 건 흉흉한 세상에 단단히 적응됐기 때문이리라.

“네, 저도 도와드리고 싶긴 한데 몇 동 사는 분이세요?”


이웃이라고 했고, 지하주차장으로 왔기에 당연히 우리 아파트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적어도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사는 존재였다. 단지 안의 몇 개 동씩 묶여 지하주차장을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다시 말해 지하주차장을 통해 여러 동의 주민들이 이동하며 인터폰으로 초인종을 누를 정도의 개방성은 있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이웃의 정의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몇 동에 사는지 시원한 대답 대신 모호한 답을 꺼내는 걸 보면 말이다.

“아, 저는 그냥 근처 사는 이웃이에요.”

“이웃이라고 하셔서 같은 아파트 주민인 줄 알았는데요.”

“그냥 근처 살아요. 일단 만나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같은 아파트 주민이 아닌 데다 어디 사는지조차 알 수 없이 함박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가 대뜸 만나잔다. 이쯤 되니 인터넷 커뮤니티 어디선가 읽어본 이야기와 이 상황이 매우 닮아있음을 알아챘다.


언젠가 읽은 글에서 번화가를 걷던 여성에게 한 중년 여성이 다가와 설문조사를 요구했다고 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해 과제 중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중년 여성이 내민 설문조사는 답을 적을수록 내용이 이상했고, 마지막 장에 연락처와 이름을 쓰는 칸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은 이 칸을 쓰기 싫다고 거부했고, 중년 여성이 줄기차게 따라붙는 통에 따돌리느라 진땀을 뺐다고 쓰여 있었다. 그 여성이 꼬치꼬치 캐물은 바에 따르면 중년 여성이 공부 중이라는 곳은 정식 교육기관이 아니라 어떤 종교단체였다고도 했다.


인터폰 속 그녀도 같은 목적으로 찾아온 게 아닐까. 이 정도 짐작을 했으니 됐다고 돌려보내야 맞았다. 단호히 거절하는 게 그녀에게 또 내게도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는 딱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며칠 내내 집에 박혀 말도 몇 마디 안 하고 일만 했던 내게는 구강 속 언어에 사용되는 부위의 역할을 확인할 겸, 어쩌다 찾아온 묘한 손님과의 대화에 격한 호기심이 이는 바람에 계속 말을 이어가고 말았다.


“설문조사는 어려울 게 아닌데, 어디서 공부하세요? 제가 그런 데 관심이 좀 많아서요.”

“아, 그냥 좋은 말씀 공부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요. 그 공부하는 교육기관이 어딘지, 지금 오신 분 성함을 알려주시면 제가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정도면 당신 정체를 밝혀보라는 놀림에 가까웠다. 일단 사람과 대면해야 뭐라도 소득이 있을 그녀에게 정체를 알려줘야 문을 열겠다는 이상한 조건부 질문이었다. 함박웃음을 멈추지 않던 그녀도 당황했는지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교육기관은 아니고요. 교회 같은 곳이에요.”

“교회인가요, 교회 같은 곳인가요?”

“네, 성경공부도 하고 그런 곳인데 일단 만나서 얘기하면 제가 잘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만나자고 줄기차게 말하며 힘겨운 웃음을 짓는 그녀를 보며 나는 또 말장난을 걸었다.

“그런데 아까는 늦게 공부를 시작하셨고 과제 중이라고 하셨는데, 교회 같은 곳에서 과제를 내주는 건가요?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정확히 과제는 아니고 그냥 설문조사 같은 건데, 만나서 설명드릴게요.”

“아니, 잠깐만요. 그럼 과제도 아니고 늦게 공부 시작한 것도 아니면서 저한테 거짓말하신 거예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면 다 아실 거예요.”

“거짓말하는 분을 제가 겁나서 어떻게 만나요.”

“아, 그게 일단 만나면 다 풀릴 텐데…….”

“어떤 성경에서도, 어떤 종교 교리에서도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짓말해도 된다고 하는 곳은 없어요. 그런데 거짓말하신 거 보면 정상적인 종교는 아닌가 보네요. 아니면 그쪽이 교리를 어기고 거짓말을 하고 있든가요.

“그러니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면…….”

“싫어요.”

“네?”


내내 함박웃음을 짓던 그녀의 웃음이 딱 멈췄다.

“만나기 싫어요. 일단 거짓말 계속하시는 분께 문 열어 드릴 수 없고요, 공부도 과제도 다 아닌데 만나서 할 이야기도 없잖아요.”

“그래도 일단 만나서…….”


죄송하다고 한 후 인터폰을 껐다. 종교단체의 요즘 영업방식은 이런 건가 싶었다. 다단계를 하는 사람들도 영업 방식을 나날이 진화시키고, 종교계에서 은근히 마케터를 고용하고 있는 시대에 이런 영업방식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다만 초반에 늦깎이 공부를 하는 중년 여성을 향한 응원 어린 시선에서 실상은 종교 영업의 표적이었다는 깨달음으로 바뀌면서 속은 기분이 조금 들긴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간에 깨닫고 난 이후에 나도 말장난을 시도했고, 상대를 곤혹스럽게 했으니 잘한 건 없다.


인터폰 속 화면은 내 손바닥 두 개를 붙인 크기다. 지하층과 내가 사는 층 사이에 그 화면을 두고 그녀와 나는 호기심과 숨은 의도를 쉴 새 없이 주고받은 셈이다. 대화 속 사용한 ‘이웃’과 ‘거짓말’이란 단어는 몹쓸 의도를 품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가 아는 이웃과 그녀가 아는 이웃은 달라도 너무 다른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이 얘길 했더니 대번에 핀잔이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런 사람하고 말을 주고받아. 나중에 그 사람이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러네. 여보 말이 맞네. 그건 생각도 못 했는데.”


함박웃음 짓던 그녀가 다시 나를 찾아와 해코지라도 하게 될까? 소름 끼치는 생각을 하면서 그다지도 쉴 새 없이 웃음을 짓던 그녀가 발품 팔아가며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진짜 속내가 밤새 궁금했다.


‘이웃이에요.’ 그 한 마디에 문을 여는 순수한 아낙이 있을지도, 지루한 하루를 보내다 말동무가 간절했을 노인이 서슴없이 열어주는 현관문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웃의 뜻이 희미해지는 요즘이라 그런지, 인터폰 속 그녀를 만난 후 내게 이웃이라는 단어는 영영 지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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