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첫째의 돌 무렵, 동네 맘 카페에서 중고 주방놀이를 샀었다. 현재,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아이는 이 주방놀이를 방 한켠에 여전히 두고 있다. 8살 둘째조차 자주 갖고 놀지 않기에 처분하고 싶은데, 오히려 첫째가 결사반대 중이다.
아이는 기억은 못하지만 자신의 첫 생일 선물이었을 테고, 엄마랑 많은 놀이를 함께 해주었던 장난감이란다. 그냥 그 존재만으로도 추억이 생각나니, 오며 가며 볼 때마다 아이의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물건인 듯싶다.
마흔네 살인 나의 어릴 적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고, 지금처럼 다양하고 많은 장난감들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나의 엄마는 어떠했을지.
내가 기억하는 제일 작았던 엄마의부엌은 9살의 월세방이었다. 산골 군인 관사에 살던 우리 가족은 서울로 발령이 난 아빠로 인하여 이사를 나와야 했다. 군인아파트는 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일 년 남짓 방배동의 어느 주택의 방 한 칸에 4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었다.
그 공간의 부엌이란 곳은 최소한의 짐과 도구로 밥만 해 먹을 수 있던 장소였다. 어른 둘만 있어도 공간이 꽉 찰만큼의 작디작은 내 엄마의 그 부엌이
종종 생각난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고, 그리고 내 엄마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볼 때면, 요즘 아이들의 풍요로움이 질투가 날 때도 있곤 한다.
그러나 커다란 나뭇잎을 그릇 삼아 흙과 모래로 밥을 짓고, 계란과 생김이 닮은 꽃들과 다양한 모양새의 나뭇잎과 풀들을 따와서, 반찬을 만들어 한 상 차려놓고, 친구들과 깔깔거리던 나의 유년이 더 풍요로웠던 것 같다.
집 안에서 플라스틱 모형 음식들로 주방놀이를 하는 내 아이들을 볼 때면, 아주 오래전 꼬질꼬질한 흙때 뭍은 내 손바닥과 풀물이 들어서 새까매진 내 손톱이 생각나곤 한다.
그 시대 혹은 그 시간이라 불리는,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 무엇이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곤 한다.
세대가 다르다는 말로 단정 짓기 전에,
내가 기억하는 유년의 놀이들을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아이들과 함께 해보려 했었다.
해 질 녘까지 고무줄놀이를 했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내 아이들과 친구들은 킥보드와 인라인의 즐거움이 더 큰 존재들이었다.
다름을 인정하지만 묘한 서글픔과 안쓰러움이 몰려오곤 한다. 요즘 아이들의 장난감의 풍요로움이 오히려 정서의 따스함을 가둬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