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구트 꿈 백화점"
오랜만에 마음 뭉클해지는, 따뜻한 책을 읽게 됐다. 수면 장애를 앓고 있는 나의 내담자가 어느 날 읽고 와서 내게 알려준 책. <달러구트 꿈 백화점>
상담사임에도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로 객관적인 분석을 하는 나의 구미를 당기는 제목은 아니었다. 제목부터 몽글몽글한 기운에, 따뜻한 감성 한 바가지가 책에서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사이코패스와 살인이 난무하는 추리소설이라던가, 인간의 구질구질함과 지질함을 차갑게 도려내어 만든 문단을 주로 좋아하는 내게 이 책은 나름의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다.
여느 소설이든 간에, 처음은 늘 어려운 것 같다.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모습에 익숙해지기까지, 낯을 가리는 건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일관된 내 모습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명랑하고 밝은 주인공 페니의 모습은 어째 내가 공감하기엔 퍽 거리감이 느껴지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미워하는 사람을 때리려 할 때 무거워지는 손, 무서운 것으로부터 도망쳐야 할 때 납덩이 같은 다리, 하늘을 나는데 시원하게 날아지지 않는 위태로움. 이런 경험들은 모든 사람들의 꿈속에서 너무도 익숙한 경험들이다. 책에서는 이 문제의 원인을 레프라혼 요정들의 상술이라고 한다.
"자체적으로 연구한 결과, '하늘을 나는 꿈' 보다, '꼼짝하지 못하는 꿈'을 꾸게 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옴짝달싹 못 하는 꿈, 그러니까 달리려고 하는데 발이 납덩이처럼 무겁거나, 괴롭히는 녀석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데 몸이 너무 느리거나 하는 꿈 말이죠. 이런 꿈을 꾸게 했을 때, 꿈 값으로 '해방감'이 훨씬 더 많이 들어왔어요. 자면서 답답했는데 깨자마자 몸이 가뿐하니까요!" ─
많은 꿈에 이런 불손한 의도를 가진 꿈을 끼워 팔아 버리는 레프라혼 요정들에게 달러구트는 분노하고 질책하지만, 이 부분을 읽는 독자로서는 무릎을 탁! 치는 깨달음이 오는 부분이었다. 어쩜 책의 작가는, 이렇게 귀엽게 나의 꿈을 해석해주는 걸까. 이 외에도 작가의 귀여운 상상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여러 장면들이 책을 읽어가는 맛을 더했다.
꾸는 악몽에는 이유가 있음이 위로로 전해진다.
트라우마와 심리적 성장에 관한 논문을 출간한 나로서는, 악몽 제작자 막심과의 만남이 반가웠다. 실제 많은 내담자들이 악몽을 꾸고 상담실에 와서 꿈 이야기를 하는데 결론적으로 그 악몽들은 내담자가 느끼는 근본적 두려움을 암시하는 내용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꿈을 가지고 한 시간 내내 이야기를 하며 자기를 이해하다 가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책에서도 악몽은 충분히 다룰 가치가 있는 꿈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것은, 그 꿈을 자신이 '직접 사간다'는 것이다. 원하지 않아서 꾸는 꿈이 아니라, 트라우마를 한 번 이겨내어 보고자 달러구트와 계약하고 직접 사간다는 내용이 참 흥미로웠다. 악몽을 꾸는 것 자체도 당신의 강인함과 치유 의지가 담겨있다는 이 메시지가, 내게 참 위로였고 고마웠다.
결국 나는 책을 읽으며 울었다.
결국에 꿈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삶을 위로하기 위한 신의 계획 중 하나임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현실의 지독한 상실과 고독한 인내를 버티어야 하는 우리에게 꿈은 위로가 되어줄 때가 많다.
하지만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찜찜하게 남아 책을 덮을 때 아쉬움이 있었다. 백화점 2층 매니저와 4층 매니저의 이야기가 담긴 에필로그는 작품에서 미처 해결되지 못했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좋은 장치가 되었지만 여전히 내겐 달러구트가 사는 세계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누가 더 좋은 꿈을 사갈 수 있는가?
달러구트가 사는 세상의 주된 수출원은 "꿈"이고 수입원은 "감정"이다. 그리고 감정은 고든이라는 화폐단위로 교환된다. 주로 긍정적인 감정들이 높은 시세에 거래되고, 상황이나 계절에 따라 부정적인 감정들의 시세가 치솟는 경우가 있다. 이 세계에는 유명한 꿈 제작자들이 있고, 그 꿈을 사서 꾸는 사람들은 큰 행운을 획득하는 사람이다. 제작자들과 판매자들은 꿈을 꾸고 난 이후 그 사람이 경험하는 감정에 따라 값을 받게 된다. 철저히 후불제로 이 세계가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자기 통찰력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이 세계의 부자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이런 고객을 처음부터 알아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마다 받는 자극엔 다양한 반응이 있어서 비싸고 유니크한 꿈을 판매한다고 한들, 후불제로 값을 두둑이 챙길 수 있느냐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손님 개개인에 대한 혜안이 있지 않은 이상 꿈을 팔아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읽는 나는 내가 얼마나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인지가 다시금 느껴져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계속 책 속의 부자를 찾고 손익을 계산하는 나는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레프라혼 요정들과 말이 좀 통할 것 같더라는. (하하)
페니와 막심은 어떻게 됐을까, 오지랖까지 부려본다.
이건 작가가 어떻게든 얘기를 해줘야만 한다. 페니 앞에서 얼굴이 붉어지던, 어정쩡한 바보가 되어버리던 막심은 그 이후로 페니와 어떻게 됐느냔 말이다. 30이 넘어 유부녀 입성을 앞두고 있는 나로서는 여간 참견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상황에서 책이 끝났다.
꿈의 가치는 손님이 직접 깨닫느냐 마느냐의 차이에 있다고 말하는 달러구트.
어려서부터 '꿈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꿈을 많이 꿔온 나는 이 책을 통해 의식의 저장고에 기록해 두었던 지난 꿈들을 복기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꿈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때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앞 날을 지켜보기도 했던. 내가 직접 사들인 꿈들이 얼마나 내 인생에 많은 의미를 주었던가 생각이 들어 부자가 된 기분까지 느껴졌다. 내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직원 한 명쯤은 먹여 살렸네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더 나아가 상담실에 앉아 내담자들이 스치듯 얘기하는 꿈의 내용을 붙잡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개꿈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부분도 있어 보이는걸. 최근 너의 상황과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꿈처럼 보이는걸. 그러면 그때부터 내담자는 자기 탐색을 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게요. 그래서 그런 꿈을 꿨나 보네요.
어떤 감정이 달러구트의 백화점으로 정산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달러구트는 수많은 상담자들과 협업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웃음 지어지는 상상이다. 이 책을 통해 나도 조금은 상상력이 풍부해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