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좆소에 왔을까
나는 정말 여러 좆소를 다녔고 그 모든 좆소에서 보낸 기간을 합산하면 10년이 조금 넘는다. 10년 몇 개월이라고 하면 영 입에 붙지 않으니 대충 10년이라고 칭하겠다.
좆소 10년, 그 주옥같은 좆같음에 대해서 쓰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니 무엇이라 시작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써야할지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노트북 앞에 앉기는 했는데, 다크모드로 셋팅해 둔 메모장은 온통 시커먼 공란이었다. 텅 비어서 일견 아득한 메모장을 꼬박 한 달 동안 쳐다만 보았다. 시커먼 메모장 화면이 블랙홀 처럼 글감과 생각을 모두 다 빨아들여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우선 노트북 켜고 무조건 그 앞에 앉았다.
텅 빈 메모장 화면을 띄워놓고 쇼츠나 릴스를 보는 날들이 쉼 없이 흘렀다. 그렇게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변했다.
창문 밖의 바람이 더이상 차갑지 않게 되자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퇴근해서 씻은 다음 매일같이 책상에 앉아 어둠이 짙게 내린 창 밖과 새카만 공란의 메모장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이소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그 즈음부터 노트북 앞에서 휴대폰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텅 빈 메모장의 화면은 검었지만 이전처럼 까마득 하지는 않았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이 아무런 말이나 생각 나는대로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스물 세살에 처음 겪었던 좆소 이야기를 주절거리다가 지우고, 또 어느 날은 회사 책상 밑에 붙어있던 부적에 대해 쓰다가 지웠다. 그렇게 한참을 쓰고 지우기만 반복하다가 드디어 첫 편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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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 없이 이런 좆소와 저런 좆소에 대해 써내리다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끝내 다 쓰지는 못했지만 쓰고 싶은 마지막 문장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조금씩 조사와 어미만 다르게 모든 글들이 하나의 고민으로 귀결 되었다.
'나는 어쩌다 좆소를 다녔을까?'
그 고민을 곱씹을 수록 떠오르는 것은 하나 뿐이었다.
아주 근원적 질문.
'왜?'
한 글자가 떠오른 순간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늘이 왜 파란지, 물은 왜 잡히지 않는지 궁금하던 것처럼 좆소에 지쳐버린 지금의 내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나는 왜 좆소에 왔는가?'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거슬러 보기로 했다.
곱씹고 곱씹다 보면 시간은 수능을 보고 대학 원서를 쓰던 18살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가볍게 좆소 썰이나 좀 읽으려고 온 당신에게는, 십수년 인생을 되 짚어 보는 이 이야기가 지나치게 암담한 진창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내가 5인 미만과 간신히 5인을 넘는 고만고만한 좆소에서 하찮은 취급을 받으며 10년이나 구른 이유 중 가장 근원의 것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아마도 결국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야만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데 두번 정도는 밟혀서 살이 짓이겨 지는 것을 꾹 참아 넘기는 지렁이가 있다면, 그 지렁이에게는 제법 깊고 진득한 수렁의 역사가 있는 법이다.
나는 지방의 어느 여고를 나와 어느 사립대를 졸업했다. 공부는 겨우 중간쯤 했고 수능점수는 애매했다. 수능 성적은 평소 모의고사보다 모자란 성적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 근처의 사립 대학에서 점수가 맞는 곳을 학과들을 몇 개 고르고 그 중에서 담임선생님이 취업 잘 될것 같다고 추천하는 학과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결정을 내림에 있어 어떤 진지한 통찰도 없었다.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고, 그저 흐르는 대로 떠내려 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결국 모든 것은 나의 결정이었다.
그 때 나는 꿈이 있었다. 가고 싶은 학과가 있었다. 점수가 20점쯤 모자랐지만 도박같은 도전을 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냥 그 순간에 가장 쉬워보이는, 탈락하지 않을 안전한 선택지를 골랐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여러번 선택의 순간과 마주쳤다. 어학연수를 떠날 기회, 복수 전공 할 기회가 있었으며 전과 할 기회와 편입 할 기회도 있었다. 문장을 쓰다가 문득 깨달았다. 때로 문장은 생각보다 앞선다.
분명히 선택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사실 그 때 그 모든 순간들은 기회였다.
도전할 기회이며 용기 낼 기회였다. 열 아홉에 잘못 선택했던 것을 바로 잡을 기회였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할 기회였다. 그러나 몇 년의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용기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점수가 모자라거나 혹시라도 탈락할 것 같으면 아예 지원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곳에 남겨졌으니 대학생활 내내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전한 곳에서 모든 기회와 선택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고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계절이 흘러 대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이름만 대면 아는 꽤나 유명한 중견기업의 인턴직에 이력서를 넣었다. 되지도 않을 일에 지원하는 것은 나 답지 않은 일이었다. 왜 이런 도전을 했을까? 동기 중에 누가 그 기업에 지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습게도 호승심이 생겼던 것이다. '네가?' 하는 마음. '네가 하면 나도 한다.'는 치기 어린 질투였다. 지원은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발표일이 다가올 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발표일이 되었다.
방문을 꼭 닫고 발표 시간에 맞춰 컴퓨터를 켰다. 천천히 떨리는 손으로 새로온 메일을 하나씩 확인했다. 합격이었다. 서류 전형 합격이라는 글자를 읽고나서도 믿을 수 없어 그 부분을 두번 세번 읽었다. 정말 합격이었다. 이어서 면접일정 안내가 있었다.
빠르게 날짜를 확인하며 기뻐하던 것도 잠시, 해외영업팀의 인턴면접에는 외국어 면접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쁨은 순식간에 걱정과 불안으로 바뀌었다. 눈 앞이 아찔했다. 외국인과의 외국어 면접이라니, 완전히 의지를 상실했다. 그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 되었다.
외국어를 전공했지만 그 때까지 한 번도 해외를 나가보지 않았다. 여러번 교환학생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아버지의 회사가 힘들어졌고 할머니가 아프셨다. 동생이 대학생이 되면서 집안에 대학생이 두명이라는 것도 교환학생을 포기하는데 그럴듯한 이유가 되었다. 포기를 마음 먹으면 온 세상이 나의 포기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가 도처에 널려 있었고 포기를 합리화 시키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외국인 교수님 앞에서 외운 말을 하는 것 말고는 입 한번 떼본 적 없는 내가 외국어 면접이라니 자신이 없었다. 면접 가능한 일정을 회신해달라는 마지막 문장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그대로 웹페이지를 껐다. 답장하지 않음으로서 나는 면접 기회를 또 포기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같은 곳에서 시작한 하나의 물줄기를 둘로 나누고 완전히 다른 바다로 보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아직 줄기가 여리고 작을 때 그 것의 방향을 조금씩만 바꿔주면 된다. 만약 그때 내가 면접에 참여하고 탈락했더라면 오늘 이 글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때 면접에서 탈락하지 않았다.
다만 답장하지 않았고
그 것이 내 좆소인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