좆소불망기 09

암이라니 오히려 좋아

by 문정

처음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았을 때, 그 마지막 장에 쓰여있던 결절이라는 단어와 전문의 진료 요망이라는 글자를 보았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웃었던가? 아니면 한숨을 쉬었던가? 아 둘 다 아니다. 나는 그냥 가만히 한참 동안 가만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실감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확실한 진료를 위해 좀 더 큰 병원을 알아보고 검사 일정을 잡으면서는 조금씩 화가 났다. 내 인생에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알아보고 진료를 예약하는 동안에는 회사에 말할 수 없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소와 똑같이 출근을 하고 일을 했다.


여느 날들처럼 출근해서 일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몸을 돌리기도 불편할 만큼 좁은 탕비실에서 싱크대에 놓인 사장의 커피잔을 설거지하다가 갑자기 벽에 그 컵들을 전부 집어던져 산산이 깨부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전부 좆같았다. 다시 좆소에 다니고 있는 것도 억울했고 무엇보다 또다시 그런 선택을 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냥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고 모든 것에 화가 났다. 절대자인지 신인지 누군가가 자꾸만 나를 구렁텅이 아래로 걷어차는 것 같았다.


책상에 앉아 씩씩대며 벽을 노려 보았다. 갑자기 분노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전부다 집어던지고 깨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앞에 신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악을 쓰며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잠깐이었다.


다시 좆소에 들어온 것도 이기지 못할 술을 마신 것도 건강검진을 해보라는 동생의 잔소리를 일 년 넘게 흘려들은 것도 전부 나의 선택이었다. 결절이 암이 되기 전에 분명히 검진을 통해 발견하고 관리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전부 나였다.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 떨어트린 것은 절대자도 신도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


초음파 검사부터 세침 검사, 혹시 모를 암세포의 전이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CT검사 등등 이런저런 검사를 거치고 마침내 수술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암이 확진된 것은 아니었다. 암은 결절을 제거한 후에 최종적으로 조직검사를 거쳐 확정된다고 했다. 다만 의료진이 볼 때 나의 경우 결절 크기와 모양이 80퍼센트 이상의 확률로 암일 것이라고 했다.


CT결과를 들은 당일에 바로 내분비내과에서 외과로 진료과목이 바뀌었다.


수술 날짜를 잡기 위해 외과에서 진료순서를 기다리며 나는 회사에 전화해 반반차를 반차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갑자기 이러는 건 예의가 없다고 짜증을 내는 상사에게 말했다.


"저 암이래요. 수술해야 한다니까 그 진료까지 보고 가야 해요."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진짜야?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오늘 반차처리 되는 걸로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진료실 앞에 뜨는 대기자 명단을 바라보았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회사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듣는 내 이름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숨이 턱 막혔다.


수술은 두 달 후, 절개 방식으로 최종 결정했다.

수술 방법과 날짜를 모두 정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병원 밖에는 수십 그루의 벚꽃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벚꽃 축제를 할 만큼 유명한 벚꽃길이 있었다. 꼭 그 길이 아니어도 병원 근처는 온통 벚나무였다.


단순 결절이라 추적검사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설마 암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이런저런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을 오가던 3월 초중순 까지만 해도 둥그런 꽃망울이던 것들이 어느새 만개했다가 이제는 조금씩 지고 있었다.


2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병원을 다녔지만 꽃이 있는 풍경을 마음 편히 본 적은 없었다. 병원 진료는 언제나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업무 직원이 달랑 두 명뿐이니 연차나 반차를 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두 시간짜리 반반차는 항상 빠듯했다.


주머니 속의 휴대폰은 자꾸 울렸다. 나는 그 울림을 애써 무시하며 탐스럽게 맺힌 꽃송이를 바라보았다. 마침 따듯한 봄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꽃잎들이 꼭 눈송이처럼 하얗게 흩날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암수술을 결정하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마음이 홀가분했다.


벚꽃이 가득 피어있는 길을 걸었다. 만개한 꽃송이가 버거운지 산들바람에도 나뭇가지들은 꽃잎을 떨어트렸다. 쉼 없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아주 천천히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초록 잎이 피고 연한 꽃봉오리들이 맺히고 탐스러운 꽃이 피었다. 그리고 그 꽃잎이 벌써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쉼 없이 앞으로 달리고 있었고 계절은 게으름 부리는 법 없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곧 여름이 올 터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하염없이 허공에 흩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이제 됐다는 생각을 했다. 웃음이 났다. 정말로 기뻐서 웃음이 났다.


좆소생활 10년 차, 나는 어딘가 고장 나 있었다. 나도 내가 고장 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고칠 여력이 없었다. 마냥 쉬고 싶다는 소원을 마음 저 깊은 곳에 묻어두고 술에 의존해서 간신히 회사생활을 버티고 있었다. 어떻게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 바람을 실행할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남들도 다 그래. 나들도 다 이만큼 지겹고 힘들어. 그래도 다들 버티고 있잖아.'


자기 최면을 걸면서 삐걱삐걱 고장 난 몸과 정신으로, 울고 싶은데 울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잔뜩 죽상을 하고 회사를 다녔다.


다 그만두고 싶었다.

전부 멈추고 나를 고치고 싶었다.

어디가 고장 난 것인지 찬찬히 들여다 보고 오래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고치고 싶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갑상선의 악성신생물이 내 뺨을 후려쳐 주었다.


마침내 허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이제 쉴 수 있겠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새어 나왔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멀리서 버스가 모퉁이를 돌았다. 내가 타야 할 버스였다. 다가오는 버스를 보다가 다시 허공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가벼운 꽃잎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암이라니 오히려 좋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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