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다는 생각은 새벽에 많이 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새벽에 많이 든다.
29살, 처음 수술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중심을 벗어난 삶을 살았다.
부모님에게 기특해 보이고 싶은 자식으로서의 삶, 친구들에게 밝고 재밌는 친구, 회사에서 인정받는 애사심 넘치는 직원, 사랑하는 누군가의 연인으로서의 삶.
20대는 밀키트처럼 그럴듯해 보이고 빠르게 시간을 조리했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은 나쁘지 않았다. 인정받는 삶은 성취감과 안정감을 주었고 이것이 삶의 이유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용한 새벽에 들어오는 의문감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나는 나를 인정하고 있는가,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마주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바쁘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틈에 잠깐 드는 생각일 뿐, 깊게 생각하던 부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빠르면 탈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술술 풀리던 인생과 달리 몸에선 슬슬 이상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있고 뛰어다니며 일해야 하는 나의 다리가 말이 듣지 않았다.
처음 인생에서 4시간이 넘는 수술과 수면마취, 전신마취, 입원이라는 병원생활을 겪게 되었다. 뼈를 깎는 고통을 며칠 겪고 몇 달 뒤면 걸을 수 있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수술 후, 발바닥에 굳은살이 솟아올라 절뚝거리는 내가 보였다. 부모님에게 나는 “진짜 아픈” 손가락이 되었고, 회사에서의 성장은 나의 병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친구들은 점점 줄어들고 멀어졌으며, 연인에게 나는 미래만 얘기하면 불안해 눈물부터 흘리는 겁쟁이가 되어있었다.
재수술, 그리고 또다시 재수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누워 지내는 시간에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았다.
왜 나 스스로를 돌보는 것에 대해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엇을 중요시하며 살아왔는지.
과거 나의 선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것에 대한 결과는 어땠는지.
나는 그래서 행복하고 충만하다고 느껴왔는지.
행복과 충만함의 근본적인 느낌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문득문득 찾아오던 나 자신에 대한 질문들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많다.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되는 철학, 다양한 종교의 사상들, 과학자들, 세상에 뻗쳐있는 다양한 논리와 신념들.
그 무엇들로도 삶에 대한 의미가 완벽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행복을 검색해 보면 저마다 행복하다고 느낀 사연들이 달랐다. 충만하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다.
그렇게 여러 시도와 고민 끝에 방법을 찾았다. "나의 행복"을 알 준비를 하는 것이다.
누구의 논리도 필요 없다. 내가 무너지고 일어나기 위해선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나의 의지”이다. 그러려면 "나"를 제일 잘 알아야 한다.
나의 호흡이 어떤지, 나의 버티는 힘은 어느 정도 인지, 나는 눕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지, 일어나서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와의 대화가 절실하다. 나는 몇 년 동안 좌절했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의 대화를 통해 자력을 기르고 있다.
나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행복해질 준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