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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시 Oct 17. 2023

희귀 케이스

“아무래도 의료사고인 것 같습니다.”



 미련했다. 아니, 사실은 무서웠다.

태어나서 처음 겁 없이 한 수술의 결과가 좋지 않았고, 분명 순조롭지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수술하고 삼 개월 뒤면 발에 박힌 핀을 빼고 자유롭게 뛰어다닐 줄 알았지만, 결과는 재수술을 받고도 3년째 절뚝이며 걷고 있는 병원에서 의미 없는 답변을 듣고 울고 있는 나였다.

병원에서는 ‘3개월 뒤에 경과를 봅시다.’ ‘6개월 뒤에 경과를 봅시다.’ ‘뼈가 붙는 데는 1년이 걸릴 수도 있겠네요.’와 같은 말로 29살의 나를 32살까지 끌고 왔다.

두 번이나 수술했으니 있을 수도 있는 통증, 뼈에 핀이 박혀있으니와 같은 사실로 고통을 부정하며 3년을 지냈다. 책임을 지겠다는 병원의 말을 믿고 한동안만 불편할 몸에서 살아가는 법을

찾아나가고 있었고, 나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수술로 잠시 미뤄두었던 커리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피곤한데 통증에 잠 못 드는 밤이면 이게 맞는 건가,라고

끅끅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소리 내서 울부짖기엔 밤마다 방에 찾아와 발을 주무르고 가는 엄마와, 누구보다도 나와 같은 눈빛을 하고 지내는 아빠를 보니 티를 낼 수 없었다.

더 씩씩해 보여야 했다. 무너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희망을 그려가며 정기검진을 오가던 나에게 담당 간호사의 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혹시, 다른 병원은 안 가보셨어요?”

 연인에게 버림받는 기분이 이런 걸까. ‘아무래도 우린 안될 거 같아. 서로 다른 길을 찾아보자.’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으면서도 ‘미련하게 이러고 있지 말고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라는 걱정이 묻어있는 듯,

따뜻해 보이면서도 냉정한 관계의 종료를 내포하고 있는 듯한 말.


 나는 아홉수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대수롭지 않은 선택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일으켰고, 주변에게 나는 걱정되는 존재가 되어갔다.

‘확률적으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운이라는 건 진짜 있다.’, ‘알 수 없는 초현실적인 존재가 나의 삶에 스크래치를 주고 싶었나.’ 생각은 끝없이 나를 부정적인 상황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일을 하고 있거나, 외부로 놓이게 되는 나는 씩씩한 척, 잘 헤쳐나가고 있는 어른같이 보이도록 했다.

 심어진 부정의 씨앗은 점점 바닥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약해진 감정은 "우울증"이라는 외투를 걸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부의 내가 감정과 불안한 생각의 구덩이를 파고 있는 동안,

외부의 나는 모든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피하고, 위로를 피했으며 웃어야 할 상황을 피했다. 모든 게 허무하고 무의미했다. 전문적으로 다뤄진 심리학 같은 책은 읽기 거북스러웠고,

내가 신경 쓰는 사람들의 신경이 나에게 쏠릴까 조마조마하며 감정을 감추고 다녔다. 마치 전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맞닿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온 갓 것에 예민하게 신경을 쓰다 보면 피곤해져

죽고 싶단 생각을 잊은 채 잠들었다. 그렇게 며칠, 몇 달을 또 괜찮은 듯 살아가다 보면 "방심은 금물"이라는 표지판을 발견한 듯 가슴이 붕 떠버리는 시간이 찾아오고 끝나지 않는 *새벽증상들이 반복됐다.

언제까지 시한폭탄 같은 상태로 살아가야 할까, 터질 수는 있을까, 시침이 고장 나서 터지지 않고 무한적으로 돌기만 하면, 아니면 시침이 너무도 길어 버티기가 힘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언제까지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라는 뭉뚝한 말로 하루하루를 누르며 살 수 있을까. 이대로 심해로 빠질 법하던 어떤 날


“내가 한번 알아봐 줄게요.”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인가. 바닥에 곤두박질치기 일보직 전의 나를 잡은 목소리였다. 나는 복귀 후 임시로 2개월 정도 근무하다 한 대학병원 안에 있는 매장을 오픈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친해지게 된 간호사분들과 안과 교수님과 일념 남짓 알고 지냈을 때, 그들은 내 상황에 대한 얘기를 알게 되었고, 나보다는 의료 쪽에 지식이 더 많은 그들은

앞으로 내가 해나가야 할 부분에 대해서 단계단계별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난 확률은 어쨌든 누군가도 겪고 있는 일이다라는 말은 무너지는 나에게 쿠션을 놓아주는 느낌이었다.

일단 일반 병원에 가서 진료의뢰서를 받아온 뒤 본인 대학병원과 다른 여러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 아무리 잘하는 곳이어도 모든 결과는 장담할 수 없기에,

여러 곳에서 진료를 받아보라고 했다. (아마도 나는 이때부터 여러 상황을 예측하고 준비하는 습관이 들여진 거 같다.)

정말 갑갑했는데. 심장에 공포라는 공기가 가득 차서 풍선처럼 터질 것 같았는데, 그들의 조언은 심장 아래를 살짝 당겨서 가위로 잘라 공포를 새어나가게 해 주었다.

테이프질은 내가 할 차례였다. 일반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여러 의사를 만났다.


“처음에 어떻게 수술을 한 거죠?”

“아…” “대체 왜 이렇게…”

“왜 계속 그 병원을 다니셨던 거죠?”

“수술이 잘못되었던 것 같은데, 계속 그 병원을 다니셨네요. “

“단지증이 흔한 질병은 아닌데, 수술도 참 희한하게 했네…”

“이 상태까지 된 발은, 다시 재수술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이 발은 다시 한다고 해서 좋아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

마음속, 갖고 있던 무서움의 원인이자 피하고 싶고 부정하고 있던 결과를 듣게 되었다. 나는 가벼운 풍선과도 같이 다시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병원 스케줄에 맞춰서 검사 일정을 잡고,

MRI를 찍고 일주일 뒤에 방문을 반복해 가며 그 기간 동안 머릿속은 온통 부정적인 상황이 이렇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모든 병원에서 부정당해 절름발이로 살게 되는 나.

그런 나를 측은하게 보는 시선들. 그려보았던 30대의 삶. 이뤄보고 싶었던 꿈들을 침대에서 생각만 하게 되는 모습. 내 나이 때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 뒤로 밀려져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나의 모습.

새벽은 항상 그런 생각들로 가득 채워졌다.


 뻑뻑해진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뜨고 출근을 했다.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아가고 커피 한잔에 잠시 숨을 돌리는 사람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사람들. 나도 다시 돌아갈 수 있겠지.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희망적으로, 절실하게 기다렸다 듣게 되는 답변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서… 건드리기 힘들 것 같네요.”

이대로 끝일까. 싶던 순간이었다. 세상에게 버려진 기분으로 모든 현실에 등을 돌리려고 했던 순간,

“소영아 병원에서 연락 왔어. 다음 주에 오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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