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치료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한다.’
세 번째 병가였다.
처음 병가 때는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다. 두 번째 병가 때는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삶을 부정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남들한테는 한번 아플까 말까 한 일들이 나한테는 곱빼기로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 번째 병가. 모든 게 달라져야만 했다. 수술하는 병원과 의사 선생님도 달랐고, 나의 마음도 달라져 있었다. ”회복“을 위해 온 기운을 집중하기로 했다.
안정가료기간 10주. 회사 업무 어플을 지웠다. 더 이상 무턱대고 돌아가기도, 부정하는 거로도 바뀌거나 좋아지는 것은 없는 것을 알았다. 이제부턴 오롯이 나만 보자.
퇴원 후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감정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동안 외면하다시피 했던 나의 감정을 제일 먼저 들여다보기로 한 것이다.
첫 번째 감정을 풀어나가기로 했다. 사실 나는 아침을 먹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아침을 드시는 시간에 눈을 뜨고 아빠가 끓인 토마토스튜와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이렇게 셋이 여유롭게 아침을 보낸 적이 언제였을까. 대략 우리 가족의 30년 동안의 아침을 돌아봤다.
아빠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공부를 했고, 퇴근을 하면 저녁을 드시고 독서실을 갔다. 그 모습을 보며 ‘공부는 어른이 되어도 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건 아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40년간을 한 회사에서 충직하게 일하셨다. 새벽은 부모님의 하루 속 또 다른 하루였다. 부모님은 의류도매시장을 갔다가 3,4시간도 못 자고 일어나
각자의 일상을 살아나갔다. 아빠는 회사로 출근을 했고, 엄마는 아빠의 출근과 아침잠이 많은 두 딸을 학교에 보내고 난 뒤 방 한편에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엄마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가장노릇을 했고, 외할머니가 하던 슈퍼를 정리한 돈으로 압구정동과 안국에 잡화점이랑 의상실을 차렸다.
가게는 엄마의 안목과 단골손님을 대하는 자세로 동생들을 대학과 결혼을 보낼 정도로 번창했다. 그런 엄마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더 큰 사업을 할지, 아니면 지금 이 사람과 결혼을 할지.
엄마는 결혼을 선택한 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주부가 되어 가족에 집중을 했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생이 되자, 엄마는 아빠를 도우겠다며 작은 방 하나를 옷방으로 차려놓고 지인들에게 옷을 팔기 시작했다.
나는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도 모르고 저녁에 다 모여 티브이를 보는 시간에 옆에서 조는 엄마를 보며 엄마는 왜 티브이만 보면 잠이 드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었는데…
사실 그 시간이 엄마가 유일하게 편히 앉아있는 시간이었고, 가족이 다 모여있는 시간이니 본인도 졸음과 싸워가며 그 자리를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이다.
나의 부모는 참 안쓰럽고 대단한 존재였다. 이렇게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부모의 삶 속에 나는 태어났고, 나를 길러냈다. 나는 나의 나약함이 민망해졌다.
주말에는 친구들이 찾아왔다. 친구들이 온다는 것은 산책을 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부모님이랑은 10분도 못하는 산책을 친구랑은 최소 30분은 할 수 있었다.
한쪽 다리엔 통깁스를 한 채 한 달가량을 먹고자기만을 반복하니 70대가 다 돼가는 부모님에겐 내 몸무게는 쉽지 않은 무게가 되었다.
부모님은 호기롭게 산책을 시켜주겠다 하시고는 나를 놀이터에 두고 벤치에 앉으시거나, 아파트 한두 단지 사이를 10분 걷고 10분 쉬는 패턴으로 산책을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일단 나가자는 말부터 했다. 친구들은 휠체어를 밀며 한 번씩은 커다랗게 구멍 난 내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놀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요즘 힘든 얘기, 남자친구와의 관계, 우리 나이또래에 벌어지고 있는 결혼이나 일에 대한 고민이나 30대에 대한 고민 등 깊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친구들과 잠시 멀어진 때가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거절하지 못해 생겨난 관계는 무리를 가져왔다.
어울리지 않는 옷, 어울리지 않는 장소,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에 휩쓸렸고 항상 그 자리를 지켜주던 친구들에게는 소홀해졌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항상 알아주겠지.’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탐닉해 나가는 시절도 있었다. 결국 그들에게 서운함을 남겼고, 내가 돌아봤을 때 그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관계의 허무함에 마음의 붙일 곳을 잃었다.
별일 아닌 걸 말할 수 있는 사이가, 그걸 받아 웃고 울어주는 사람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부정적인 시선을 받는 것보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더 힘들단 것도 아프고 난 뒤 깨달았다.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했다. 그들은 자리로 돌아와 주었다.
두 번째 나의 불안함이 가라앉았다.
혼자 계속 집에 있다가 말을 많이 풀고 돌아온 날은 깊은 잠에 들었다. 무언가에 온전히 집중한 날도 잠이 잘 들었다.
그전까지는 계속 달리면서도 주위를 둘러보고 쫓아오는 사람은 없나, 나는 어디쯤에 와있나를 계속 살피며 살았다. 그렇게 잠이 들면 꿈에서도 쫓기는 꿈을 꿨다.
긴장되어 있는 상태로 얕은 잠을 잤던 거 같다.
세상은 램수면, 숙면의 과학 및 원리 등 잠에 대한 정보가 많이 나와있다. 램 수면시간 횟수를 고려해라, 11시 전에 잠들고, 6시간 이하나 11시간 이상 자는 것은 신체에 좋지 않다,라는 정보나
“유명인의 섭취로 숙면을 증명해 낸 식품 OOOO.” “OOO를 베개맡에 뿌리면 잠이 더 잘 온다.”와 같은 바이럴마케팅에 쉼 없이 노출되어 있다.
그런 것들도 알아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몇 년간 불안정한 상태로 불면에 괴로워하던 내가 제일 중요하게 느낀 것은 하나다.
요동치는 내 몸과 마음을 편하게 재우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