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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시 Oct 17. 2023

레몬나무

내가 볼 수 있는 건, 단지 노란 레몬나무 하나뿐이야.



 가끔 하루종일 잠만 잤으면… 일주일만 침대에 누워있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근데 실제로 일주일 동안 누워있으니,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든다. 수술로 꼼짝없이 못 움직일 때 방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게 있었다. 창 밖의 풍경.

내 방 창밖으로는 산이 보인다. 산 너머로 해가 나왔다가 달이 나왔다가 구름이 걸쳐있다가는 모습을 멍하니 며칠 동안 보았다.

정지시력을 활용해 산을 집중해 보고 있으면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이고, 더 자세히 보면 사람이 산을 오르며 나무를 붙잡아 나무가 흔들리는 것도 보인다.


 어릴 땐 아빠 따라 산을 오르는 게 재밌었다. 아빠와 등산을 하며 아빠의 어릴 적 얘기, 친구들 얘기, 사는 얘기를 듣는 것도 흥미로웠고, 산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낙엽이 있는 곳은 미끄럽고 나무뿌리가 드러나는 이유나 지역마다 바위 색들이 다른 것도 알아가며 산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

제일 좋았던 시간은 평평한 바위가 있고, 나무로 그늘이 진 자리를 찾을 때다. 도시락을 먹을 시간인 것이다.

이상하게 같은 집 밥이어도 산에 오르면서 숙성이 되는지 더 맛있고 꿀맛이라는 표현이 납득이 되는 맛이었다. 눈으로 내려다보는 일상의 터전, 그리고 상쾌한 공기 한 모금, 맛있는 밥 가득.

내 어릴 적 일요일은 아빠와 산으로 가득 차있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아르바이트로 꽉 채웠다. 평일은 학교 수업이 들쑥날쑥해 주말이 생활비를 바짝 벌 수 있는 날이었다.

주말이란 누군가에게는 평일의 노동을 보상받는 휴일이지만, 나는 그 휴일에 일함으로 내가 목표하는 생활비를 채운다는 보람찬 마음을 보상받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다시 내려올 산을 오르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얻는 거 없이 하루의 체력과 시간을 쏟고 땀을 흘리는 행동이 납득이 안되었다.

차라리 그 체력으로 일을 더 하거나, 자격증을 따는 게 더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산은 그냥 카페에 앉아 먼 산 보듯이 경치를 음미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렇게 산과 멀어졌다.


  그런 마인드로 살아오다가 26살, 혼자 교토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즐긴다. 일이며 일상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꼭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산속에 있는 신사를 갈 겸 단풍구경 할 겸 산을 오르고 있다가 경로를 이탈해 버린 것이다. 망했다. 단풍사진을 한창 찍어서 핸드폰 배터리까지 나간 상태였다.

말도 통하지 않고 말이 통할 사람도 없는 산속에서 이대로 국제 미아가 되는 건 아닌가,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이 상태에서 내가 사라져 버린다면, 이란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외지에 있어서 그런가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족, 친한 친구들, 지금은 거의 연락을 안 하고 지내지만 한 시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 심지어 내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나는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사람이구나. 나는 사람에 지쳤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나도 사람이 생각나는 사람이구나...

마음이 조급해지다 보니 알록달록 단풍과 하늘은 보이지 않고, 바닥에 젖은 흙냄새도 나지 않았다. 흙바닥에 발자국 하나 찍혀있길 간절히 바라며 바닥만 보며 바쁘게 걸어 나갔다.

그러나 길에는 낙엽이 가득 쌓여 사람의 흔적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단풍도 색이 감춰지는 시간. 포기를 생각한 시간.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주위엔 무성한 나무들과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그때, 멀리 있는 나무에 흔들리는 붉은 천 하나가 보였다. 다가가보았다. 나뭇가지에 뜯긴 천이 아니었다. 누군가 정성스레 묶어둔 모습이었다. 그때 아빠가 해준 얘기가 생각났다.

아주 옛날에 등산로가 생기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길을 만들기 위해 나무에 천을 묶어 표식 해두었다고 했다.

아니면 산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다음 사람을 위해 길을 찾아가며 표시를 해두는 거라고.

나처럼 길을 잃었을 누군가를 위해. 이후에도 어느 정도 간격마다 나무에 묶여있는 붉은 천을 발견했다. 이제 더 없나, 걱정이 들 때를 가늠한 것처럼 붉은 천은 계속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신사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은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선택은 결과를 가지고 오기 마련이다.

만약, 길을 잃었다? 그건 선택의 결과이다. 그때 누군가는 그 바닥에 주저앉아 울거나, 스마트한 누군가는 휴대폰의 SOS를 칠 것이다.

그중 누군가는 길 잃을 또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며 자신이 찾아가는 길을 표식 해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경로를 찾아온 사람이다.


(Fools Garden-“Lemon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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