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추앙해요
청춘이니까 불안하다?
청춘은 언제지? 34살의 지금도 청춘이고 24살의 나도 청춘이었고, 67세가 된 엄마는 지금이 청춘이라고 한다.
청춘은 언제든 될 수 있으며, 언제든 불안할 수 있다. 상대적이다.
가족과 나의 순탄한 관계에 반항은 첫 수술 이후 크게 왔다. 첫 수술 이후, 주변환경도 크게 달라졌다. 서울에서 살던 집은 경기도로 이사해 출퇴근이 왕복 3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나는 출근이 여섯 시 반, 퇴근은 열한 시 반인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자차도 없고 면허도 장롱면허인 내게 대중교통이 유일한 출퇴근 수단이었다.
복직하고 일도 미숙해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막차시간 때문에 쫓기듯 업무를 내팽개치고 퇴근해야 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심지어 이 시기에 오랜 연인과의 이별까지 겹쳤다.
뜻대로 안 되는 인생이 질리기 시작했고, 마음이 삐뚤어졌다. 편하고 얌전하게 살던 인생에 뒤늦은 사춘기가 온 거다. 금요일 퇴근 후 약속이 생기면 이미 막차 놓친 거 그냥 집에 안 들어가거나,
꾸역꾸역 첫차 때까지 놀다가 버스에서 잠들어 모르는 동네에서 결국 택시 타고 돌아오는 행동을 몇 달간 하며 살았다. 딸바보인 아빠는 밤새 불안한 마음에 계속 연락을 했고, 나는 받지 않았다.
서른 살 된 딸 등짝을 때릴 수 도 없는 노릇이고. 아빠는 최후로 나에게 큰소리를 쳤고, 나는 더 큰소리를 쳤다.
“지금 니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맨날 늦고 멋대로 사냐? 멋대로 살 거 같이 왜 사냐”
“내 나이가 서른인데. 늦게 들어오고 뭘 하든 내가 알아서 할 나이지! 나도 살기 힘들어!”
감정의 반항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반항이었다. 이때는 반항하는 명백한 이유가 있어 보였다. 정신적으로 반항감이 들기 시작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말대로 나는 서른이 넘었고 경제적 독립을 했는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어느 정도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거지? 부모의 통제가 자식의 인생에 필요한 것인가? 눈에 보이면 마음에 차인다는 말이 있다. 눈에 안 보이면 덜 신경 쓰이지 않을까.
아빠와의 굵직한 갈등이 생긴 다음 해에 나는 독립을 했다. 나의 첫 독립은 성북동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빌라 탑층이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헉헉대는데, 또 4층까지 올라가야 하는 언덕 위의 꼭대기집. 경기도 집에 비해 거리는 6분의 1이나 줄었지만,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는 고통은 줄어든 거리에 반비례하는 곳.
그럼에도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곳보다 전세금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을. 20대부터 모아둔 5천으로 벽 한 편의 큰 창문에 가득 담기는 노을을 가질 수 있다니. 너무 낭만적이었다.
(만약 해가 제일 뜨거운 오후에 그 집을 봤다면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약서를 쓰고 다음날 잔금을 입금하려 하는데 오천만 원이라는 돈을 한 번에 이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식사 시간에 은행에 신분증을 들고 가서 은행원 얘기를 들으며 집주인에게 전화로 양해를 구하며 뭔가 생존서바이벌 같은 일들을 몇 번 겪으니 진짜 온전한 어른의 세계에 입성하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나만의 시공간이 생기게 됨과 동시에, 매달 공과금과 관리비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언덕을 오르며 내 발이 아직 온전치 않음을 인지했다.
하지만 고집을 부리며 집을 나왔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이상 2년은 여기서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버텨나가는 방법은 꽤나 힘들었다. 빨래하나 제대로 못 돌려 세탁기를 고장 내는 딸은 통제를 받는 게 맞았던 것 같다.
5평 겨우 되는 집에서 빨래를 널면, 말리는 옷과 마른 옷가지 사이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화장실은 너무 좁아 몸을 한껏 웅크리고 머리를 감아야 했고,
변기에 가끔 팔꿈치를 부딪혀 멍이 들기도 했다. 엄마가 챙겨준 반찬과 식재료들은 썩기 일쑤였고, 배달음식을 소분해서 얼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사는 게 정말 쉽지 않구나, 내 몸 하나 누일 집도, 먹고사는데 책임을 진다는 것은 정말 큰 무게를 안고 사는 것이었구나,
그걸 자식들에게 티 내지 않고 살아온 부모님의 모습이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나까지 집을 떠나고, 두 분만 남은 집에서 많이 다투셨다고 했다. 아무래도 언니와 내가 있을 땐 한창 돈을 벌 시기였고, 번 돈으로 부모노릇, 노후대비, 모임 활동 등
바쁘게 살았을 때니 부부가 서로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 모든 게 정리된 지금은 신혼 때처럼 서로 안 맞는 부분이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부모님의 다툼의 원인 중 하나였다. 내가 이렇게 방황을 하고 있을 때 부모님은 부모님대로의 방황을 하고 있었다.
아빠는 막내딸의 몸이 성치 않은 것도, 독립하겠다고 하게 된 배경도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많이 속상해했고, 그 감정은 엄마가 챙겨준 반찬에 꾹꾹 눌러 담겨있었다.
몇 달 만에 놀러 간 집엔 엄마, 아빠는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삶에 바빠서 밀렸던 노화가 한꺼번에 몰려온 듯했다.
단출해진 집에는 며칠 전 끓인 된장찌개와 줄어든 반찬통이 냉장고에 있었고, 집안 전등은 몇 개만 켜놓아 칙칙한 영국날씨 같아 보였다.
대화가 줄어든 곳엔 작게 틀어진 라디오 소리가 웅웅 거리며 방안에 울렸다. 밥상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차려진 저녁상 앞에서,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온전한 어른이 아닌, 아직은 사춘기 막내딸이 맞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