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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스민 Jun 29. 2020

장래희망 없이 산다는 것.

무엇이 되는지보다 중요한 것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세 가지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1. 당신은 어렸을 적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러한 장래희망을 갖게 된 시기는 언제인가요?

2. 현재 당신의 장래희망은 무엇인가요?

3. 당신의 장래희망은 언제 이루게 될 예정인가요? 그 때의 당신이 원하는 삶과 일치하고 있습니까?






장래희망 부자였던 소싯적


어릴 적 나는 장래희망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은 아이였다. 갖고 싶은 직업도 아주 많았고, 내가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해했다. 책을 읽다가, TV를 보다가, 인터넷을 하다가 새롭고 흥미로운 직업이 눈에 띄면 바로 탐색에 들어갔다.


워낙 동물을 좋아했던 초등학생 때의 나는 동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구체적으로는 포유류를 좋아했다). 그러다 동물 캐릭터에 꽂혀서 캐릭터 디자이너가 될까도 고민했었다. 배우 김희선이 출연한 드라마 <요조숙녀>를 보고는 스튜어디스가, <호텔리어>를 보고는 호텔리어가 되고 싶어 곧장 탐색에 들어갔으나 여러 가지 장단점을 따져보고 다음 꿈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 외에도 천문학자, 패키지 디자이너, 보부상 등등이 있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직업들이 머릿속에서 왔다 가는 사이 오랫동안 머물러있던 단 한 가지 희망직업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마케팅'이었다. 고등학생, 대학생 내내 그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관련학과에 진학을 했고, 졸업 후에는 꼭 맞지는 않지만 유사한 일을 할 수 있었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정말 신나고 즐거웠다. 정말, 신나게 일했다. 아 내가 꿈을 이뤘구나, 하면서.


나는 늘 장래희망이 있었고, 되고 싶은 사람이 정말 많았고,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간직한 꿈을 실현시킨 것에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정말 되고 싶었던 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고 싶은 일 ≠ 살고 싶은 삶


나는 갖고 싶던 직업을 가졌지만 머리가 굵어질수록 분명 그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회사생활을 하며 이직은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 다른 끌리는 회사도 없었고 그 일 외에 흥미가 가는 일도 없었다. '나는 분명 이 일이 딱인데, 내 마음은 왜 이럴까' 하는 고민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8년 차를 보내던 해 어느 시점, 어느 일로 말미암아 나는 퇴사를 선언했다. '지금이 그때구나'를 느꼈다. 어느덧 그건 내가 원하던 삶의 모습이 아니란걸 깨닫게 된 시점이다.


퇴사를 하고 나서는 휴식기도 갖고, 남들처럼 장기간 여행도 해 보았다. 쉬면서는 '있는 돈 조금이라도 덜 까먹기 위해' 재능 공유 플랫폼을 통해 과외 자리도 구해보고, 일주일에 이틀씩 카페 알바도 했었다. 이익 창출을 위한 활동이 아니더라도 '뭐 재밌는 일 없는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놀러도 다니고, 새로운 모임에도 참석해보고, 취미활동도 하고 이것저것 많이도 했었다. 앞으로 뭘 할까 고민하며. 다음의 내 직업을 구상해가며.




20대 후반에 만나던 구남친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였고, 지금의 나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그 당시 나와는 성향이 많이 달랐다. 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어 보였다. 한 번은 내 아버지와의 저녁 식사 기회가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자넨 꿈이 뭔가?" (나는 이 순간 생각했다. 아빠도 꿈 얘기를 꺼내는 걸 보니 나는 우리 아빠 딸이 맞는구나,라고)


내색은 안 했지만 나는 뇌가 싸해지는 기분을 경험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구남친은 "그냥(그저) 이 친구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아......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버지께서는 약간... 어이가 없어하시는 듯 보였고, 사실 나도 실망이 컸다. 계획이나 목표 같은 게 전혀 없는 건가? 같이 하는 미래에 뭘 기대할 수 있을까. 내 나이 또래, 내 주변 친구들은 그래도 구체적으로 이직 계획이라던가, 어떻게 성장하겠다는 목표라던가 그런 게 있는데.


나는 프러포즈를 받았었지만, 결국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지금 장래희망이 없다.


이민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전과 같이 살고 싶지 않아서'다.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그전처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쉬는 동안 두 군데서 일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은 받았다. 연봉이나 네임벨류를 떠나서 두 일 모두 재밌을 것 같았다(어떤 것을 선택할 때 나의 가장 큰 기준은 '재미'다).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래서 요래 조래 장단점을 따져보고 득과 실을 계산해보면서 머릿속에서 거의 결정을 내렸을 때 즈음, 그러니까 딱 연봉협상만 하면 될 때 즈음 갑자기 결정을 내리기가 망설여졌다. 회사가 바뀌고 위치가 바뀌고, 업무가 바뀐대도 나는 관성처럼 '그전과 똑같이' 살게 될 것 같아서. 그리고 나는 취업 대신 이민을 결정했다.


이민 소식을 전하며 크고 작은 여러 송별회 자리를 가졌는데, 나의 첫 팀장님이셨던 분은 나에게 물으셨다. "앞으로 뭐할 거야?"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여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유행했던지라 '스페인 하숙'처럼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윤식당'처럼 식당을 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들과도 이런 대화를 나누며 "재밌겠다, 재밌겠다"하며 상상 속 내 세상에는 이미 내 이름을 단 식당 프랜차이즈가, 매일 밤 파티가 열리는 게스트하우스가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팀장님께 말씀드릴 수는 없었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아직 할지 안 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왠지 그 팀장님께는 정말 실현 예정인, 구체적으로 계획 다 잡혀 있는 그런 일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다. 대신에 이런 대답을 드렸다. "뭘 하겠다는 건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있습니다"



장래희망은 없지만, 꿈은 있어요.


짧은 순간에 생각해 낸 대답이었지만, 그게 정말 나의 생각이었던 거다. 돈벌이에 대한 모양새는 없었지만,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모양은 있었다.


일단은 여유로우면서도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 이 말은 적게 일하되 내가 쓸 만큼의 돈을 벌긴 하겠다는 것(금전적 안정). 그리고 직장인 마인드를 버리겠다(심적 안정). 즉 회사의 기준에 맞춰야 하는 삶에서 내 기준에 맞추는 삶을 찾겠다는 것. 마지막으로 워크와 라이프의 밸런스를 맞춰야겠다. 워크 5 대 라이프 5.


이것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이었고, -그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현재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삶이다. 내가 이렇게 일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는 회사 두 군데를 찾아서 고정적인 일을 하고 있고, 내가 쓸 만큼의 돈을 안정적으로 벌고 있고, 일을 더 하면 돈을 더 벌 수는 있지만 라이프 5를 보존하기 위해 더 하지는 않고 있다.  


해외에 나오면 많이들 하는 사업도 벌이지 않았다. 식당, 게하의 꿈도 접었다. 짧게 재미는 있을 것 같지만 한 공간에 머물러야 하는(그곳에만 있어야 일이 되는) 일은 내게 맞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는 게 모두에게 가능한가를 묻는다면 나는 답할 말이 없다. 각자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말조차 사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내 상황에서 목표를 세웠고, 그렸고, 그런 환경을 찾아서 만들었다. 


이제 나는 무엇이 되는지보다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이다.


(그때의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라던 그 사람의 생각이 많은 고민 끝에 당신이 살고 싶었던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이해한다. 하지만 20대 후반의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고, 지금보다 에너지가 훨씬 넘쳤다. 아마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20대 후반의 나는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장래희망이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계속 생겨나고 있다. 하나는 주모가 되는 것. 심야식당과 같이 고단한 일상을 살아낸 사람들이 찾아 와 힐링하는 그런 공간의 주모. 다른 하나는 바다 앞에 집을 짓는 것. 유명하지 않은 한적한 바다 앞에, 마당에는 작은 수영장 딸린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통통배도 한척 있어서 낚시도 갔으면 좋겠다. 뭐 그런 것들을 꿈꾼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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