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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주는 네가 고맙지만 부담스러웠어

by 피렌체장탁

울고 떨리는 목소리로 통화를 했던 그날 이후부터 S는 혼란스러웠다.

탁을 지켜줘야 하는 건 맞는데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하는 선은 어디까지일까,


탁은 상황을 공유하면서도 거리를 뒀다.


"일단 아빠 재판 준비해야 할 것 같아. 근데 내가 알아서 할게."


그 '알아서 할게'라는 말이 참으로 모호했다.

어느 날은 울고 어느 날은 덤덤한 듯 자신의 상황을 말하는 탁을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단지 탁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와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S는 자신의 아버지와는 너무 다른 친구 같고 다정한 탁의 아버지에게 정과 친근감을 느꼈었다.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떠나서 사람으로서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자신이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족들한테도 거리를 두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여자친구의 가족문제에 몰입하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건 남의 일이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이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겠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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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고마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변함없이 탁을 지지해 주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하는 남자친구?

심지어 S는 연애를 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순간이 더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의 이런 반응이 낯설면서도 고맙고 반가웠다. 처음에 모든 것을 숨기려고 했던 탁이었지만 자기 일처럼 공감해 주고 나서주는 S의 태도에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탁의 상황은 꽤나 복잡해졌다.

처음엔 아버지 사업이 고의성 없이 여러 상황에 의해서 어려워졌으니 파산 신고를 하고 가지고 있는 재산을 채권자들한테 공개하고 갚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심리적으로 너무 불안해했기 때문에 연고가 있는 지방 친척댁으로 아버지를 피신시켰다. 또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여러 (유명) 변호사들과 상담도 했다.

변호사들은 한결같이 이야기했다.


"사업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너무 많고 아버님이 고의적으로 대금 지불을 미뤘거나 한 게 아니라 본인도 미수채권 때문에 연쇄부도를 맞이한 상황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사업을 계속 영위하시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고의성이 없기 때문에 파산 신고하시고 가진 재산으로 채권자들한테 갚으시면 됩니다."


그 말을 믿고 그대로 진행했다. 절대 거래처에는 사적으로 연락하지 말라는 조언도 들었다.

대신 부모님 평생 모으신 재산으로 구입한 신축 아파트, 공장 자산 등을 다 공개하고 내놓았다. 정말 단 돈 100만 원도 따로 돌려놓은 것 없이 가진 돈, 재산 다 공개하며 법적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아버지를 믿고 가장 많은 외상매출채권을 가지고 계셨던 사장님께서 큰 배신감을 느끼고 사기 고발을 진행한 것이었다.

탁의 가족은 채권자들과 절대 사적 연락을 하면 안 된다는 변호사들의 조언을 따른 것뿐이었는데 그 사장님은 자신에게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사라진 탁의 아버지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 내가 끝까지 당신을 믿고 남들이 말려도 사람 하나 보고 자재도 공급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 한마디 없이 파산신고하고 내 연락도 받지 않고 이게 뭐요?"


그래서 탁은 그 사장님의 수원 공장까지 가서 무릎을 꿇었다.


"사장님, 너무 죄송합니다. 저희가 다 갚을 길이 없어 이렇게 조치했지만 아버지도 사장님 이야기 많이 하셨고 어떻게든 저희가 피해보상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도 너무 연락하고 싶어 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야, 너 다 필요 없고 이런 이야기할 거면 단 돈 몇 천만 원이라도 가지고 와서 이야기해야 되는 거야. 나가."


"저희 그 돈 얼마조차 다 법원에 공탁했습니다."


"그냥 나가. 나는 너랑 네 아버지랑 더 이상 할 이야기 없어."


그의 주장은 이미 수금이 안될 때부터 자신의 사업이 망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믿음과 친분을 통해서 계속 자재를 공급받아 기망했다는 것이었고 탁과 아버지의 입장은 절대 고의성이나 기망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재판 과정은 길고 지루했다. 어떻게든 사업을 영위하려고 마지막까지 노력하고 매출이나 현금이 생길 때마다 채권을 갚으려고 했다는 노력을 증빙하기 위해 탁은 아버지의 재무제표부터 거래내역을 밤새 뒤져가며 자료를 준비했다. 오후 6시까지는 회사일을 하고 야근을 핑계로 남아서 아버지 재판의 자료를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S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부분이 없기도 했고 자신이 힘들다고 하거나 약한 소리를 하면 그가 질릴까 걱정을 했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회사에도 점점 탁의 상황이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평소 평판이나 남의 시선을 중시하는 S에게 여자친구의 그 상황이 공유되는 거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탁은 그러니까 S가 없으면 안 되면서도 이런 상황을 감내하는 그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탁의 평소 연애관은

"연애는 행복하려고 하는 거지!"였다.


서로 희생하고 힘든 상황을 감내하고 참는 순간부터 탁에게 있어 그건 이상적 연애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너무 힘들어서 기대고 이야기는 하고 싶고.. 그런 자신 때문에 같이 기죽어 지내는 S의 모습을 보는 건 최악이었다.


놓을 수도 가질 수도.. 그리고 실제로 도움이 될 수도 없는 그에 대해... 탁은 고민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남자 없을 텐데 싶으면서도 그러니까 이 남자가 왜 나랑 사귄다는 이유로 이 상황을 겪어야 하지?

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가족인 탁도 아버지 때문에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 것이 너무 짜증 나고 원망스러운데 남인 S가 이 상황을 견디는 게 얼마나 갈까?


결코 오래갈 수 없는 상태라는 걸 금방 알아채버린 탁은 오히려 그의 배려와 도움이 부담스러워졌다.

배부른 소리일 수 있지만 원체 남에게 기댄 적 없는 탁이었다.


사랑, 결혼, 핑크빛 미래..

어차피 물 건너간 것 같은 시점에 그의 도움은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말했다.


"우리 그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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