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망해버렸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였다.
한 번도 먼저 연락한 적 없는 탁의 외삼촌으로부터의 전화였다.
“근무 중이니? 지금 너네 아버지로부터 문자가 하나 왔다. 심상치 않은 것 같으니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하자.”
탁은 잠시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삼촌, 무슨 일 있나요?”
그녀의 부모님도 친척들도 그녀의 근무시간에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외삼촌은 침착하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임이 분명했다.
“일단 문자 보고 다시 통화할래?”
1분 뒤... 탁의 핸드폰으로 문자 하나가 전달되어 왔다.
이미 화장실로 자리를 옮긴 그녀였다. 경찰에 신고라니... 우리 아버지는 그런 종류의 사고를 벌일 위인은 아닌데...
- 처남, 정말 미안해. 이런 문자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자네밖에 없네. 나 그동안 부끄럽지 않게 탁이랑 탁이동생 아빠로 노력하며 살아왔어.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일이 꼬여만 가기 시작했네. 매 순간 나는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는데 어쩌다 보니 큰 빚만 지고 말았네. 처남에게 도와달라고 말을 했지만 더 이상은 도와줄 수 없다고 했지. 그래서 나는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네. 처남에게도 정말 미안해. 하지만 불쌍한 네 누나랑 조카들은 외면하지 말아 주게. 내가 가더라도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건 처남밖에 없지 않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부탁할 사람이 자네밖에 없어서 이 문자를 남기네. 정말 미안하고.. 우리 가족들에게 사랑한다고 꼭 전해주게-
‘뭐야.. 씨발. 이거 유서잖아.....................’
탁은 순식간에 호흡이 가파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의도한 건 아닌데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빠의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 그것도 자기 가족이 아닌 외삼촌한테 보낸 이 문자.
속이 뒤집히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협박과 다름없는 유서였다. 네가 도와주지 않아서 내가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다시 한번 탁의 폰이 울려왔다. 외삼촌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아... 문자 봤니? 그냥 무시하기에는 좀 심각한 것 같다. 얼마 전에 너희 아버지가 나한테 1억만 빌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거든. 그런데 이번에 내가 거절했다. 너도 잘 알잖아. 삼촌이 형제들한테 그간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삼촌도 이젠 힘들어서 거절한 건데 아버지한테는 충격이 크셨나 보다. 거두절미하고 아버지를 찾는 게 우선인 것 같다. 가족인 네가 우선 경찰에 신고를 해라. 누나는 너무 충격받을까 봐 내가 말을 못 하겠다. 이 일을 수습하고 나서 다시 의논해 보자. 할 수 있지? 네가 맏딸이잖아.”
“네.. 삼촌. 우선 아빠한테 전화 좀 해볼게요. 그리고 바로 신고할게요.”
탁의 입에서 다시 욕지거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씨발.. 그래 맏딸. 내가 장녀라서 이 일을 감당해야 되는구나.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너무 걱정이 됐다.
같이 진창을 뒹굴어도 좋으니 일단 죽지는 마세요. 아버지.
그녀는 화장실 세면대에 기대어 아버지의 번호로 수십 통의 전화를 걸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왔다. 화장실을 가려고 들어온 동료 직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핸드폰을 붙든 채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아버지에게 걱정과 동시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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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을 돌아보면 탁의 아버지는 100점, 아니 1,000점짜리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늘 그녀와 그녀의 동생을 극장, 서점, 박물관에 데리고 다니셨다. 이 세상에 가장 귀한 것은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이라며 남들보다 많은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
그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아버지와 함께 갔던 극장에서 봤던 인생 첫 영화인 ‘라이온킹’.
그녀의 반 친구 누구도 ‘심바’를 몰랐을 때도 그녀는 심바의 용기를 닮고 싶다는 발표를 했었다. 얼마 뒤 대여점에 비디오가 풀리고 나서 그녀는 반 친구들의 존경 어린 눈빛을 받았었다.
탁의 아버지는 또 한 달에 한 번쯤은 꼭 종로의 교보문고에 두 딸을 데리고 갔다. 자매는 큰 서점에서 몇 시간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았다. 서점을 나가기 전에는 꼭 마음에 드는 한 권만 골라오라고 하여 그 책을 선물해 주셨다. 한 달에 한 번 선물 받는 책 한 권. 당시에는 당연한 선물이었지만 그래도 꽤 신중히 골랐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그녀의 자아 대부분을 형성시킨 귀한 자산이었다.
공룡 전시회, 연세대와 고려대가 맞붙는 농구대잔치, 배구, 테니스 등의 스포츠 경기 직관.
탁은 또래의 친구들이 대부분 해보지 않은 경험들을 늘 먼저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덕분이었다. 요즘 부모들은 아기 때부터 많은 경험을 해볼 수 있도록 자녀를 양육하지만 80년대에 태어나 중산층 집안에서 자란 탁으로서는 부모의 각별한 관심과 노력 없이는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딸들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고 싶어 했다. 심지어 딸들을 재우는 동안 두 딸을 양쪽에 뉘어 팔베개를 해주고서는 늘 가곡을 불러주었다.
‘스와니강’, ‘오 솔레미오’, ‘산타루치아’, ‘3.1절 노래’
아버지가 불러주신 노래는 늘 초등 음악교과서에 실려있는 노래들이었고 그 덕에 탁은 다른 친구들이 처음 배우는 노래를 익숙하게 부를 수 있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빠르게 경험해 본 것이 탁이 가진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늘 남보다 능숙했고 초, 중, 고 반장이나 임원을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다.
그만큼 다정하고 소중한 아버지였다.
그는 남편으로서는 영 소질이 없었다. 물론 로맨티시스트였던 그는 아내에게도 한결같이 애정을 표현했다.
그는 늘 딸들에게 말했다.
“나는 평생 니들 엄마를 짝사랑하는 거야.”
딸들이 보기에도 아버지는 그랬다. 그는 항상 아내에게 ‘예쁘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늘 냉랭했다. 제발 말로 하는 건 그만하라고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시절 탁은 그런 어머니가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결혼기념일마다 사 오는 꽃다발과 정성스러운 편지에도 어머니는 늘 한숨만 지었다.
“차라리 현금을 갖다 주소.”
어머니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탁은 인상을 찌푸리며 엄마를 타박했다.
“아니. 엄마는 낭만이 없어.”
“낭만은 얼어 죽을.... 이 꽃다발 산 2만 원이면 지금 너 운동화를 하나 더 산다.”
그때는 그 의미를 몰랐다. 해진 신발을 신고 다녔어도 늘 자신감에 넘쳤었으니까.
어머니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어머니는 아름다운 외모와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네 명의 딸 사이에 유일하게 독자로 태어난 외삼촌에게 집안의 모든 자원이 몰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의 희생양으로 대학에 가지 못했다. 똑소리 나는 둘째 딸은 서울에 취업하여 당차게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려 했지만 결혼할 나이가 되자 선을 보았다. 시아버지 되실 분이 같은 지역에 국회위원에 출마한 적이 있는 꽤나 유지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귀여운 외모에 대기업 식품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이 착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결혼하고 나니 현실은 달랐다. 시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신 후였고 그 뒤에 가세는 기울어있어 막내아들인 남편에게 돌아올 몫은 없었다. 게다가 그는 평소에 할 말을 다 못 하고 희생만 하다가 술을 먹으면 모아 모아 터트리는 사람이었다. 번듯한 직장에 다녀 생계 걱정은 없겠거니 했는데 매번 술자리에서 일으킨 상사와의 불화로 사표를 내고 오기 일쑤였다. 두세 번 이직을 하고 나자 업계에 소문이 돌았는지 더 이상 이직이 어려워졌다.
그래도 성실히 일하시며 평생 가장의 역할은 해오신 아버지셨는데 어느 날 가족들에게 다시 폭탄선언을 했다.
“나 이제 독립하려고.”
“무슨 독립?”
“나도 이제 이 업계에서 20년 이상 일했잖아. 영업이사 하면서 인맥도 많이 쌓았고. 내 회사 차려서 운영해도 데려올 수 있는 고객도 꽤 많이 확보해 놨어. 내가 60살 먹고도 남의 밑에서 일해야겠어?”
“또 무슨 이상한 헛바람 들어서 왔구먼. 당신 사업할 능력 없어.”
“아니, 제발 인생의 단 한 번만 나 믿고 알겠다고 해주면 안 돼?”
어머니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아버지가 뜻을 굽히지 않자 어디 한번 잘해보라는 말과 함께 그 뒤로 입을 굳게 다무셨다. 아버지는 정말 희망에 가득 차 빠른 속도로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무리해서 인천에 큰 공장 부지를 매입하고 기계 등을 산 후 직원들을 고용했다. 애초에 자본금이 부족한 상태로 영업 인맥만을 믿고 시작한 일이어서 처음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간 빚을 지게 되었다.
화려한 개업식을 하고 처음에는 어느 정도 잘 굴러가는 것 같았다. 정말로 아버지를 믿고 거래를 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주문량이 많아 공장은 밤낮으로 돌아갔다. 이제 우리도 진짜 부자가 되는 거라고 아버지는 신이 나서 말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어느 시점부터 탁의 아버지는 회사에 나가는 날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침에 분명 출근은 하는데 오전 11시가 채 되지 않아 집에 돌아오셨다. 탁은 사실 이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집에는 거의 잠만 자러 들어오는 그녀였다. 아버지의 개업식도 가지 않았었다. 자신의 바쁜 회사생활과 행복한 연애에만 모든 시간을 쏟고 있었다. 아버지가 낮에 집에 자주 와있는다는 걸 동생이 슬며시 이야기해 주었을 때도 뭐 사장이니까 이제 자유롭게 일하시는 거겠지 하며 흘려들었었다.
탁의 아버지는 다시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 다만 예전처럼 밖에서 드시고 오는 게 아니라 방에서 몰래 혼자 드셨다. 방 안 구석구석 감춰둔 소주병이 10병이 넘게 발견됐을 때 엄마가 하는 넋두리도 들었지만 탁은 못 들은 척했다.
지금 탁이 하는 완벽한 생활에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외면했다.
그리고 그 문자를 받았다.
‘ 아빠는 완전히 망해버렸구나.’
눈을 감고 아버지의 걱정을 하면서도 더 선명히 떠오르는 생각은 절대로 이 사실을 남자친구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니 금세 알게 되겠지만 집안이 망한 것만은 절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으로 인생이 완벽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느꼈었다. 번듯한 직장에 꿈에 그리던 이상형인 남자친구까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가끔 불안해져 왔지만 그런 감정 따위는 쉽게 외면할 수 있었다. 그냥 지금의 행복을 즐기자고 다짐했다.
S는 밝고 자신감 넘치는 탁의 모습이 좋다고 했다. 그런 밝음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을 물을 때면 그녀는 늘 그녀의 아버지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었다. 사랑을 듬뿍 주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다정한 아버지덕에 내가 참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노라고. 거짓은 아니었지만 전부도 아닌 진실. 그렇게 나도 남부럽지 않게 자란 사람이고 너와 다르지 않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해야만 조금 그와 동등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망했다. 처참하게.
탁의 아버지는 다행히 금방 발견되었지만 그래서 너무 다행이라고 눈물 흘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탁의 시야는 캄캄했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S와의 결혼도, 핑크빛 미래도.
그저 울고 있는 아버지를 꼬옥 끌어안으며 반드시 가족을 지키겠다는 결심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