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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Oct 27. 2024

너네 결혼은 언제 해?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교통사고를 겪은 후 탁은 S를 더욱더 의지하게 되었다.


운전석을 들이받은 상대방의 차량에서는 운전자를 비롯하여 중년의 아저씨들이 4명이나 내렸다. 하나 같이 목 뒤를 잡은 채로. 젊은 여자가 운전자인 걸 알아채자마자 상대 운전자였던 아저씨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아가씨, 운전한 지 얼마나 됐어? 차가 옆에서 들어오는데 그렇게 느리게 가면 어떻게 해? 이런 경우는 내가 들이받았다고 해도 100% 과실은 안 나와요. 요새 보험회사에서는 100% 과실이라는 게 없어. 어떻게 할 거야? 보험 회사 부를 거야?"


 사고가 처음이었던 탁은 경황도 없고 기운도 없었다. 사고 난 차를 갓길로 옮기는 것도 겨우 했는데 더 이상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그저 힘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대꾸할 뿐이었다.


"지금 금방 사람이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탁의 전화를 받은 S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S 역시 교통사고는 처음이었으나 달려오는 길에 주변의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여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강은 알아보고 왔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한 뒤 차 안에 멍하니 앉아만 있는 탁을 바라보았다. 탁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 질려있었다. 일주일 만에 보는 연인의 죽기 직전만큼 지친 모습을 보자 S의 가슴이 저려왔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응..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아. 우리 어떻게 해?"

"보험회사에서 곧 올 거고 견인차도 보내줄 거래. 아저씨들한테도 그렇게 이야기했고 저 쪽도 보험회사에 전화한 모양이야. 기다려봐야지."

"그래.. 미안해.. 고마워."


 잠시 뒤 사고현장을 각 보험회사 직원이 파악하고 돌아가고 나서 견인차가 나타나 탁의 차를 보험회사와 연계되어 있다는 카센터로 가져갔다. 탁은 S의 차에 올라타 그 견인차를 따라갔다. 병원에 가 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무 놀라고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어디가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뽑은 지 1년도 안 되는 신차가 사고 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모님에게 알릴지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우선 차량을 수리하기 전에 견적을 내달라고 당부한 뒤 카센터를 빠져나왔다.


" 정말 병원 안 가봐도 되겠어? 뭐 좀 먹었어?"

" 응.. 정말 괜찮아. 차도 뭐 저거 조수석 조금 찌그러진 거 같고. 근데 나 집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

" 그럼 오늘은 우선 같이 있자. 많이 놀랐을 텐데 어디든 가서 좀 쉬자."


 그렇게 S는 자기 집  근처의 숙소를 잡아주었고 집에 잠시 들렀다 돌아왔다. 탁은 가벼운 샤워를 한 후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S는 그런 탁의 곁에 눕더니 탁을 꼭 안아주었다. 그 품의 온기를 느끼자 탁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나.' '괜찮아. 금방 다 괜찮아질 거야.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푹 쉬어. 팀장님께 전화해서 내일 휴가 내고 병원도 가보자.' 다 괜찮아질 거라는 그의 말을 그저 믿고 싶어졌다. 그제야 굳은 몸에 긴장이 풀려 목과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마저 자신의 바보 같은 짓에 대한 벌이라 느끼며 탁은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S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의 너른 품과 따뜻한 온기가 있어서.


 사고처리는 어렵지 않게 진행되었다. 차 수리는 물론 보험회사와 아저씨들을 상대하는 것까지 S가 나서서 다 처리해 주었다.  병원에서는 가벼운 타박상과 목디스크가 있지만 통원과 물리치료를 병행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물론 차 수리가 잘못돼서 돈이 두 배로 들고 상대방에서 4명 모두 입원하고 대인접수를 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한 탓에 합의금도 제대로 못 받았지만 결국 차는 굴러가고 살아있으니 되었다.


 평소에는 무슨 일이든 자신이 알아보고 주도하던 탁이었다. 사고가 나서 무서울 때도 그저 곁에 있어주기를 원했던 것뿐이었는데 침착하게 자기 일처럼 사고를 처리해 주자 S에게 더욱 믿음이 갔다. 남자에게 결코 의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었다.


 ' 이 사람과 같이 살면 참 든든하겠다.'


 그런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많은 남자친구를 사귀어 봤지만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조그만 바람이 탁의 가슴에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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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대 초반이 된 둘의 일상에 주말마다 직장동료, 친구들의 결혼식이 끊이질 않았다.

어떤 친구는 만난 지 6개월 만에도 결혼을 하고 직장 내 C.C였던 동료들이 갑작스레 결혼발표를 하기도 했다. 같이 아는 지인이 많았기에 탁과 S는 자연스레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귄 지 꽤 오래된 커플이 식장에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꼭 약속이라도 한 듯 물어보았다.


" 너네 결혼은 언제 해?"


 그럴 때마다 탁은 어색하게 '아이고, 아직 멀었죠.' 하며 웃어넘겼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어색했다. 사실 둘은 결혼 이야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탁은 사고 이후로 조금씩 결혼에 대한 긍정적 마음이 들기 시작했지만 구체적으로 의논하기에는 S의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S에게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빨리 이직을 하여 회사를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이 함께 하는 미래계획에는 아주 작은 계획(이를테면 놀이동산에 간다거나..)에도 늘 단서가 달렸다.


 '우선 나 이직하고 나면.'


 S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좀 더 좋은 회사에 가고 싶어 했고 돈을 더 많이 벌고 모으고 싶어 했다. 그 단위도 탁의 생각과는 달랐다. 10억만 모아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탁과는 달리 그의 단위는 늘 100억, 1,000억. 탁으로서는 상상도 잘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S에게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성공하여 부를 쌓은 큰 누나에게 의지하면서도 또 누나를 뛰어넘고 싶어 했다. 그런 그가 꿈꾸는 황금빛 미래와 욕심 속에 탁과 함께 꾸리는 가정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여느 날처럼 결혼식에 다녀오던 어느 일요일. 그날은 조금 먼 지방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S의 친구 결혼식이었기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S의 친구들이 둘이 참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한 터라 탁의 마음은 평소보다 좀 들떠있었다. 평소에 S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 사귀면서도 그의 친구를 소개받은 것은 두 번 남짓이 다였다. 그래서 미스터리에 쌓여있던 그의 친구들을 한꺼번에 보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고 나자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운전대를 잡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S의 기분도 오늘따라 더 좋아 보였다. 그런 분위기여서였을까. 아니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사랑노래들에 취한 탓이었을까.

 아끼고 아끼던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고 탁은 처음으로 넌지시 물었다.


" 우리도 결혼할 수 있을까?"


 운전대를 잡은 S는 탁을 바라보지 않은 채 무심히 말했다.


"해야지. 내년 봄쯤이면 하지 않을까?"

"그래? 그런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탁은 뛸 듯이 기뻤다. 그래도 그가 나와의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싶어 안도가 되었다. 이게 뭐라고 마음을 졸였담...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괜한 부담을 줄까 말을 아꼈다. 그러나 이제는 희망이, 우리는 늘 같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탁의 마음 한편에서 가득 차올랐다.


 그러면서 덜컥 겁도 났다. 은퇴하셨지만 여유 있는 부모님과 반포의 100평이 넘는 넓은 집에 사는 S에 비해 탁은 지극히 평범한 중산층의 가정 중에서도 엄마가 아등바등 하드캐리를 해야만 겨우 유지할 수 있는 형편의 가정환경에서 자라왔다.

 

 게다가 늘 잘 보이려 애쓰던 S의 큰 누나도 걱정이었다. 생일이라고 해서 케이크나 꽃바구니를 보내도 고맙단 말 한마디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부모님, 둘째 누나, 조카(큰 누나의 딸) 등 가족 모두 다 탁과 교류하고 있었는데도 큰 누나는 자신을 보겠다는 소리조차 하지 않았다. '큰 누나는 워낙 바빠. 다음에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면 되지.' 라며 S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탁의 입장에서는 그 집안에서 가장 실권을 가진 큰 누나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지레 짐작하게 되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때가 되면 자기 주변에 능력 있고 돈도 많고 얼굴도 예쁜 적당한 후배를 소개해주겠지... 나랑 헤어지라고 할 거고. 그럼 또 S는 그 말을 들을지도 몰라.'


  그런 불안감과는 다르게 말이 나온 뒤로는 좋은 결혼식장에 가거나 친구의 결혼준비 이야기를 들을 때면 넌지시 자신의 결혼식을 계획하고 상상해보기도 했다. S도 심심치 않게 둘이 함께 하는 미래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느 동네 아파트가 좋을 것 같다, 식장은 너무 거창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는 식으로.


 그리고 탁은 S의 월급을 모아주기 시작했다. 버는 대로 쓰기 바빴던 S가 돈을 모을 결심을 한 건 결혼준비 때문이었다. 집에서 지원해 주는 돈이 있더라도 둘 다 모아놓은 종잣돈은 있어야 면이 설 테니 말이다. 둘은 함께 은행에 가 적금 통장을 만들었다. 1년을 꼬박 모으면 3천만 원쯤 모을 수 있는 적금이었다. '네가 나보다는 더 꼼꼼하고 잘 아니까.' 라며 통장을 내미는 S를 바라보며 탁은 벌써 살림이라도 합친 기분이 들었다.


 같이 금호동에 사는 친구의 신혼집 집들이를 갔다 나오던 날에는 이 동네 와보니 살기 좋은 것 같다며 둘이 손을 잡고 한참 동네 구경을 다녔다.


 그러나 S가 붙인 그 단서는 여전히 유효했다. 이직을 하고 나면. 그때 구체적으로 알아보자라는 것이었다.  

그놈의 이직이 되긴 하려나 싶었지만 탁은 그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그의 이직을 도왔다. 함께 자소서를 적었고 서류를 준비했고 면접 자료를 검색하여 정리하기도 했다.


 우선순위에 밀린 그들의 결혼이었지만 탁은 상관없었다. 남자들은 결혼의 압박을 느끼면 여자에게 질려한다고 하더라..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던 탓에 그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탁은 참을성 있게 그리고 평소의 모토인 쿨한 척을 유지하며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


 내년 봄이라고 했으니 아직도 10개월 이상 남아있었다. 급할 게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양 쪽 부모님이 둘의 관계를 응원하시고 예뻐해주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어렴풋이 내년 봄이라고는 했지만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S의 태도. 그리고 큰 누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S의 이직, 무엇보다 결혼에 매달리는 그런 집착하는 여자는 절대 되고 싶지 않다는 탁의 각오.

 

 그런 것들로 인해 둘의 관계는 평온하지만 지지부진하게.

쉽게 깨어지진 않겠지만 지루하게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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