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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Sep 25. 2024

공개 연애 그 후...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오늘도 탁의 파티션 위에 노선배가 한쪽 팔을 걸친 채 묻지도 않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탁 씨, 어제 S가 몇 시에 집에 들어갔대? 내가 듣기에는 아주 광란의 밤을 보냈다던데."


 "선배님, 저 그냥 회식한다고 해서 일찍 잤어요. 알아서 잘 들어갔겠죠.."


 "와우! 탁 씨 엄청 쿨하네. 이래서 S가 탁이랑 사귀나 보다. 어디까지 갔을 줄 알고 이렇게 쿨해."


 "알아서 잘했겠죠. 제가 뭐 깨어있었다 한 들 뭐가 달라졌겠습니까. 선배, 안 바쁘세요?"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탁의 심기를 건드리고 나서야 자리를 떠나는 노선배였다. 탁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이 보여주고 말았다. 저 놈이 흐뭇해하겠군…

 어제 새벽 3시까지 회식 자리에 있던 S 덕분에 안 그래도 잠을 설쳤다. 다른 게 아니라 길어진 술자리에 거나하게 취한 S가 파주에서 서울의 집까지 잘 들어갔을까 하는 걱정에 잘 도착했다는 카톡이 오기 전까지 눈을 감지 못했었다.

 S를 믿지만 남자직원들만의 술자리가 길어질 때 가는 곳은 뻔했다.


노선배... 이 놈은 도대체 뭘 바라고 매일 와서 이러는 것일까.


 탁과 S가 사귀는 사이인 것이 밝혀지고 나서는 이런 손님들을 맞이하는 것이 탁의 하루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인지 모르지만 다들 부지런히 탁의 자리에 찾아와 말을 전하고는 했다. 이번에 S의 팀에 입사한 신입 여자사원이 예쁘다는 둥, 엊그제 그 팀에서 회식 3차에 좋은 곳에 갔다는 둥.


 탁은 그 누구의 말 보다 S의 말을 믿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조금씩 그들의 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어도 집착하는 여자친구는 되기 싫었다. S와 사귀기 전에 그가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이해해 주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늘 불안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평범했던 자신에 비해 S는 늘 주목받을 만큼 멋있는 존재였다. 여자친구가 있다는 게 알려져 있음에도 도전해 보는 여자가 있을 만큼 잘생긴 외모와 매너 있고 친근한 성격.. 심지어 어느 순간 사내모델 제안을 받아 회사 홈페이지에 얼굴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캠퍼스 리쿠르팅에 반드시 가야 하는 직원이 되어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탁이 여자친구인 것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잘생긴 저 사람이 왜 탁을 선택한 것일까. 저 정도면 나도 해볼 만한 거 아닌가.


 그럼에도 둘은 꽤나 굳건하게 잘 사귀는 사이였다.  둘 다 사귀는 사람이 없을 때는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보는 데에 쿨한 성격이었으나 제 사람이 생긴 이상 충실한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몇 사람들과의 바람들과는 다르게 둘의 연애는 거친 바람에도 순항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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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과 사귄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S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하나였다.


" 탁이랑 왜 사귀는 거야? 무슨 매력이 있길래..."


 S는 한두 번은 웃어넘겼지만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보기에 탁은 이 회사에 다니는 그 누구보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고 이루어내는 행동력도 갖추고 있었다. 늘 자신감에 넘쳤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탁과 함께 하는 시간은 늘 새롭고 놀라운 경험들로 가득했다. 혼자였다면 절대 시도해보지 않았을 새해 첫날 북한산에 올라 일출을 본다거나 바다낚시, 다른 커플들과의 여행, 보라카이 여행 그리고 늘 도전해보고 싶었던 이직까지도 탁은 늘 S와 함께 했고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팀장들과 남자 선배들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 탁 씨랑 사귀면 피곤하지 않아? 술도 많이 마시고 주변에 사람도 많고.

- 점점 살이 찌는 것 같던데, S 정도면 훨씬 예쁜 여자도 만날 수 있잖아?


 전혀 자신들에 대해 관심도 없으면서 걱정해 주는 척하며 내뱉는 말들 속에 돋친 가시가 그를 괴롭혔다. 제발 관심 좀 꺼줬으면, 그러려면 이 회사를 나가는 수밖에 없다. 어느 날은 회식 중에 너네 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느니 어쩌니 하는 화제가 술자리 안주로 나오길래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무리한 짓까지 해서 그들의 사이를 증명해야 했다.

 팀장이 S에게 건배제의를 시킨 순간,


"저는 탁을 사랑합니다. 탁과 S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라는 아직도 꿈에 나올 것 같은 오글거리는 멘트를 외치고야 말았다.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다. 왜 우리의 사랑을 이렇게 증명해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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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무님의 호출이었다.

탁은 자신이 불려 갈 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함을 느끼며 임원실로 들어섰다. 커다란 키에 공들여 깔끔하게 세팅한 백발이 섞인 머리, 젠틀한 미소의 상무님이 방 중앙 소파에 앉아 탁을 맞이했다. 탁은 늘 상무님이 멋지고 존경스럽다 생각했었다.


"오! 탁 씨. 잘 지내고 있나? 오랜만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

"네. 상무님.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 탁 씨.. S 하고 이제 슬슬 결혼도 해야지? 그렇지?"

"네?"


 순간 당황한 얼굴을 감출 수 없는 탁이었다. 갑자기 불러내서 뜬금없이 결혼이야기라니. 자신의 아버지가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 마땅치 않을 판에 직장 상사가 일개 직원들의 연애에 관심을 가질 일인가.


"아직 예정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 본 적도 없고요."

"흠. 그래도 둘이 이제 나이도 있는데 결혼도 하고 더 안정적으로 잘 살아야지."

"(그러니까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냐고요?)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되면 너무 좋죠."

"다른 게 아니라 말이야... 내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S가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혹시 알고 있었나?"

"아. 제 이야기가 아니라서 저는 확실히 아는 바는 없습니다."

"내 친구가 OO은행 임원이야. 거기서 S가 최종면접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S의 팀 팀장한테는 S가 퇴사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말이야. 그 친구 합격하기 어려울 거야. 탁 씨가 여자친구로서 남자친구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어? 둘이 곧 결혼하고 가정꾸리고 하려면 안정적으로 우리 회사 다니고 있는 상태가 좋지 않겠어?"


 탁은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고 계시는 건가. 설사 정말로 S를 걱정해서 퇴사를 만류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그건 본인을 직접 불러서 이야기해야 될 문제였다. 내가 그의 여자친구라고 해서 이렇게 사적으로 불러서 퇴사를 말리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완전히 도가 넘어선 일이었다. 그것도 대기업의 상무라는 사람이 이렇게 공과 사, 개인의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사로이 직원들을 불러낸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상무님. 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씁쓸한 뒷말을 남긴 채 탁은 상무실을 나왔다. 어째서 그토록 S가 퇴사를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

이었다. 이 회사는 체계가 없다.

 오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S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직의 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자기는 그만둘 거라고 만약에 자신이 최종면접에서 떨어진다면 그거조차 이 사람들의 농간일 거라고 장담했다.

 

S는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계속 일어났다.

S의 팀 회식 중에 이벤트라는 명목으로 노예팅을 진행하였다. 여자 직원들이 남자직원들을 경매에 붙여 데이트권을 사는 것이었다. S의 순서가 되었을 때 꽤나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 경매에는 'S와 저녁 먹고 영화 보기'가 걸려있었다. 결국 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선임이 낙찰자가 되었다. 그 선임의 남편도 같은 회사의 과장님이었다.


 S는 탁이 기분 나빠할까 봐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업무 포탈의 비밀번호를 공유하던 사이였기에 탁은 곧 머지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S가 급히 부탁한 일을 처리하려고 로그인한 순간 팀 내 은밀히 공지된 단체 메일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단순히 재미로만 진행한 게 아니라 실제 데이트 후 인증 사진까지 찍어서 공유하라는 메일이었다. 탁은 그 메일을 보고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이 회사에 정이 떨어진 것은 이제 S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자꾸만 벌어지고 그런 걸 개의치 않아 하는 사람들이 상사였고 동료였다. 둘의 관계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의 연애는 다른 사람들의 심심풀이 식 화젯거리나 스캔들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탁은 둘의 연애를 공개한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둘의 관계가 진실되고 깊은 관계라고 말해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왜 남들한테 증명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발악하는 사이 그들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내연애, 공개연애....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서로 하는 일을 잘 알기 때문에 도와줄 수도 이해해 줄 수도 있다는 점. 가끔 같은 공간에서 마주칠 때 은밀히 주고받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짜릿함. 공유할 수 있는 인간관계와 생활 패턴이 투명하다는 점 등등.


 그러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크게 느껴졌다.

심각한 사생활 침해...


이제와 뼈저리게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었고 그저 이런 상황들에 져서 소중한 사랑을 놓치지는 않겠다고 조용히 결심하고 또 결심하는 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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