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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Jun 07. 2024

비밀 같지 않은 비밀연애

 아침 일찍부터 눈이 저절로 뜨이는 아침이 얼마만일까.

탁의 방은 진회색 암막커튼으로 창이라는 창은 다 가려놓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평소 알람은 10개는 맞춰놓아야 겨우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던 그녀였으나 오늘은 왠지 기분 좋은 설렘과 함께 일찍 눈이 뜨였다.


 모든 것이 같았다. 단 한 가지 사실만 빼고.

오늘은 탁과 S가 사귀기로 하고 나서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같은 사무실도 아니고 회사 그 누구도 그들의 사이가 변했다는 것을 알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탁은 들뜬 마음으로 출근을 하고 주변을 쓱 한 번 둘러보았다. 탁의 동료들은 가벼운 모닝커피를 손에 들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파티션 바로 앞자리에 앉은 과장님은 어젯밤에도 열심히 달리셨는지 아직도 얼굴이 술톤인데다가 숨 쉴 때마다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눈곱 낀 얼굴로 하품을 해대며 아침부터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팀장님조차도 오늘따라 귀여워 보였다. 단지 좋아하는 사람과 서로 마음을 확인을 했다는 것만으로 온 세상이 바뀌어 보이는 경험은 참 오랜만이었다. 다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줄이야.


'이 사람들 다 내 남자친구가 S 인 걸 알면 기절하겠지. 하하!'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가슴속에 혼자 품고 있다는 것은 짜릿한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다시 한번 결심이 섰다. 이 연애는 당분간 비밀로 해야겠다.


 탁은 이제 겨우 2년 남짓 회사를 다녔지만 그간 수많은 사내커플들의 스캔들을 보고 들어왔다. 엄청난 격무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에게 남의 이야기, 특히 연애이야기란 '가뭄의 단비' 같은 여흥이었다. 사람들은 늘 소문을 듣고 소문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커플들이 입방아에 오르고 때로는 상처받는 모습을 익히 봐왔던 탁이었다. 겨우 찾아낸 소중한 사랑을 그런 남의 심심풀이 소재로 소모시키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탁도 S도 나름 화제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래저래 회사 내 인간들이랑 데이트도 너무 많이 했다. 당장 S와 같은 팀인 H 대리만 해도 둘이 사귄다는 소식을 들으면 속이 부글대서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것이었다. 그와 사귄다고 한 적은 없지만 벌써 몇 차례나 호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도, 값비싼 뮤지컬의 VIP 석도 다 받아먹은 탁이었다.


 그렇다고 헤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고..라고 잠깐 생각하다가 얼른 그 생각은 지워버렸다. 이제 2일 차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니 '퉤 퉤 퉤' 침 세 번 뱉는 시늉을 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조용히 잘 사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S도 탁의 의견에 동의했다. 회사 사람들이 알아봤자 좋을 게 하나 없고 자신은 곧 이직을 할 거니까 조용히 지내다가 자기가 이직을 하고 나서 자연스레 밝혀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둘의 비밀 연애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탁은 서울의 한양대 캠퍼스에서 그리고 S는 파주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주로 같이 지내는 동료들도 크게 친분이 없었기 때문에 둘의 비밀연애는 큰 노력 없이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둘은 첫 여행으로 정선도 가고 크리스마스에 대학로에 가서 함께 뮤지컬도 보았다. 주말이면 예쁜 카페에 가서 같이 책을 보거나 공원을 걸었고 맛집이란 맛집은 다 찾아다녔다. 연인이 되면 어색하진 않을까 했던 걱정도 잠시 둘은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 꼭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평범하고 행복한 커플이 되어있었다.


 그럼에도 신경은 쓰이기 시작했다. S의 팀에 새로 들어온 여자 신입 사원이 예쁘다더라라는 소문을 듣는다던가, 가끔 H 대리 입에서 탁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에는 겉으로 평온을 유지하면서도 움찔거리지 않을 수 없는 둘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탁의 선배들이었다. 탁은 같은 팀 여자 선배 3명과 특히 친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 멤버가 바로 주 미팅 멤버였다. 남자친구가 있다고 밝히지 않는 이상 미팅에 빠질 명목이 없었다. 그전까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그런 자리에 참여해 왔던 전적이 있었고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했던 탁이었기에 선배들은 어설픈 핑계로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선배, 나 오늘 진짜 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

"아시면서 왜 이러실까? 가장 좋은 약은 뭐다? '알코올'이다! 소주 한 잔 들어가면 저절로 컨디션 올라올 거야."


 처음 한 두 번 미리 정해두었던 미팅 약속에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나갔지만 탁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다. 잘생기고 다정한 남자친구랑 보내는 시간도 1분 1초가 아쉬운 판국에 '연구실'에서 틀어박혀 있다가 6개월 만에 외출한다는 계열사 공돌이들의 기쁨조 노릇은 더 이상 흥이 나지 않았다. S에게도 너무 미안한 노릇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미팅이란 것이 남녀의 교제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S도 쿨한 척하느라 처음 몇 번은 이해했지만 거절을 하지 못하는 탁이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단 미팅만이 아니었다. 임원이나 팀장님들이 부르는 회식자리, 팀 회식에서 남자선배들이 늦게까지 붙들어두는 자리 등 사회생활이라는 명목이라고 해도 탁은 그런 자리가 너무 많았다. 자신과 사귀기 전에 이미 그렇게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자친구가 된 이상 좀 자제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연애초기부터 잔소리를 하고 구속하는 남자친구가 되기는 싫었다. 넌지시 자기 뜻을 이야기할 때면 탁은 늘 이렇게 말했다.


"나도 안 간다고 이야기했는데 무조건 오라는데 어떻게 해. 너는 상무님이 부르는데 안 나갈 수 있어? 아프다고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도 힘들어."


 술자리에 불려 다니면서 힘들어하는 탁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들으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은 회사를 다니는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그녀를 불러대는 인간들이 누군지 뻔히 알고 어디서 술을 마시며 회식자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등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그래서 더더욱 화가 났다. 별 시답지도 않은 인간들이 맨날 여직원들을 불러내서 술이나 마시고 있고 그런 자리에 그동안 좋다고 나갔던 탁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고민 끝에 S는 회식 1차가 끝나는 저녁 9시 무렵 그녀를 데리러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자신이 데리러 온다는 걸 알고 있으면 술을 자제하기도 하고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탁은 회식자리를 빠져나오고는 했다. 좀 피곤하지만 안전한 방법이었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도망쳤어. 사람들이 막 남자친구 생긴 거 아니냐고 물어보던데."

"잘했어. 도망치느라 고생 많았어. 술 많이 마셨어?"

"아니, 너랑 더 마시려고 거의 안 마셨지.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이렇게 그들의 데이트는 사귀기 전과 마찬가지로 늘 탁의 술자리에 이어진 2차 술자리가 많았다. 예전과 달라질 바 없는 것 같았지만 이제 그들은 나란히 앉기도 손을 꼭 잡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혹시 누가 볼세라 늘 주위를 둘러보고 동네를 옮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방법들에도 한계는 있었고 점점 S가 탁에게 화를 낼 일이 많아졌다.


"너 무슨 술 접대 하려고 회사 다니냐? 그냥 싫다고 말해, 이젠."

"팀장이 나서서 그러는 걸 어떻게 해. 네가 내 고과점수 책임질 거야?"

"그러니까 그런 걸로 고과점수 좋게 준다는 게  말이 되냐고. 이 거지 같은 회사."

"하,, 그냥 남자친구 있는데 남자친구가 싫어한다고 이야기할까?"


 둘의 다툼이 잦아지자 결국 탁은 친한 선배들에게만 이야기를 하고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혼자 아프다고 핑계를 대는 것보다는 선배들이 커버를 쳐주면 좀 더 쉬워질 것 같았다. 그렇게 몇몇 선배들에게 둘의 관계를 오픈했다. 놀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탁아, 너 지난번에 술자리에서 S랑 M이랑 좀 붙어 앉아있었더니 눈에서 레이저 나가더라. 숨긴 거 맞냐?"


" 노선배가 식당 앞에서 담배 피우다가 너 데리러 온 남자 봤는데 S 닮았다고 이미 이야기했었어. 눈치챈 사람들도 있을걸?"


 아.. 그렇구나. 우리 둘만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다행히 선배들은 그들의 사이를 축하해 주며 술자리에서 탁을 배제해 주는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팀장님이 탁을 불러내자고 말을 꺼내면 요즘 한양대가 업무가 장난이 아니라더라, 맨날 야근하는 불쌍한 애 그냥 놔둬라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대신 대주었다. 그렇게 몇 번 자리에 빠지고 나자 부름의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진작에 이렇게 할 걸 그랬다, 이렇게 쉬운 걸 몇 달을 끙끙댔다고 생각하니 억울해지는 탁이었다.


 다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옛 말은 선조들의 지혜의 정수이자 진실이었다. 가장 친한 몇 명에게만 살짝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둘의 관계는 알음알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었지만 그들의 생각보다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은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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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에 한번 주말 등산을 가는 날이었다.

탁의 회사에는 각종 '사내동아리'가 존재했는데 그중 '산악회'는 등산을 좋아하는 부사장님을 필두로 하여 가장 활성화된 동아리였다. 사원들의 자율성에 기반한다고 하지만 탁은 가입신청을 한 적도 없는데 자동가입이 되어있었고 참석 메일에 답장을 보낸 적도 없는데 늘 참석명단에 올라가 있었다.

 윗사람들의 예쁨을 받는다는 증거였고 전국 유명산을 돌아다니며 산에 오르고 맛집에 가서 뒤풀이를 하는 그 모임에서 그녀는 늘 '건배제의'를 도맡고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등산에 참석한 적 없었던 S 지만 여자친구가 한 번만 같이 가자는 성화에 이번 등산에 참석 신청을 해둔 터였다. 등산이라면 어릴 때부터도 거의 해본 적 없었고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몇 번은 거절했지만 딱 한 번만 같이 가자며 회삿돈으로 좋은 데 놀러도 가고 맛있는 것도 공짜로 먹는 데이트라고 생각해 보자면서 설득하는 탁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탁과 S는 금요일밤 미리 만나 모임장소인 여의도에서 가까운 영등포에서 놀다가 다음날 아침 같이 가기로 했다. 술을 마시러 영등포에 온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이 여자랑 같이 있으면 처음 해보는 일이 참 많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간판이 즐비하고 한낮같이 밝은 거리에는 휘청거리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영등포의 유흥가는 예전에 지나가듯이 들어본 적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화려했다. 게다가 오래된 맛집이 많았다. 꽤나 신선하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둘은 다른 버스에 배치되었다. 전 날 꽤나 과음을 했어서 인지 버스에서 바로 잠에 들어버렸다. 아직도 온몸에 알코올이 가득한 채로 오르는 산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이마와 얼굴에 흐르는 것이 땀인지 알코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탁은 살짝 땀을 찍어서 혀에 대보았다. 어젯밤 마신 소주맛이었다.


 겨우겨우 등산을 마치고 내려온 다음 지역 맛집을 향했다.

오늘의 메뉴는 홍어삼합과 막걸리였다. 야들야들한 고기 한 점과 톡 쏘는 홍어, 적당히 삭은 김치의 삼합이 꽤나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게다가 지역에서만 나온다는 막걸리 맛이 아주 기가 막혔다. 아까 땀으로 소주를 몽땅 배출한 뒤여서 그런지 꿀꺽꿀꺽 또 막걸리가 끝도 없이 들어갔다.


 탁과 S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각자 열심히 마셔댔다. 서로 신경은 쓰여 흘긋흘긋 바라보긴 했으나 절대로 친한 척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술이 좀 들어가자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둘은 어느새 같은 버스에 올라타고 옆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돌아가는 차편에서는 인원수만 확인하지 어디에 타는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기에 둘은 당당히 옆자리를 사수했다. 그리고 다시 잠들었다.


 등산은 탁의 말대로 생각보다 재밌는 경험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정상에서의 풍경도 잔뜩 땀을 흘리는 기분도 유쾌했다. 내려와서 먹은 음식과 술도 마음에 들었다. 그것도 회삿돈으로!


 S는 다음에도 종종 따라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탁은 고정멤버였으므로 자기가 가고 싶은 지역이 공지되면 신청해야겠다라고.


 여의도로 다시 돌아와 버스에서 내린 후 둘은 택시를 타고 다음 데이트를 하러 떠났다.


그리고... 다음날 둘의 사내메신저에는.... 불이 났다.


'선배, S 선배랑 둘이 껴안고 택시 잡고 있었다던데 진짜예요?'


'차에서 둘이 손잡고 잠들었다던데... 둘이 뭐야?'


'너 S 랑 사귀어? 대박대박. 둘이 어떻게 사귀어? 미쳤다!!!!!!'


 망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회사사람들 잔뜩 있는데서 둘이 술을 마신 것 자체가 실수였다.

비밀연애는 무슨 술 취한 탁과 S는 그렇게 치밀한 사람이 되지 못했고 부둥켜안고 택시를 잡고 있는 모습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목격당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렇게 둘의 비밀연애는 6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알음알음 알려지던 사실이 이젠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렇게 월요일 오전 서울과 파주 사무실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 핫토픽은 '탁과 S의 사내연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타탁 타닥 타탁, 타자소리는 끝이 없었고 둘의 노트북 화면 채팅창 알림인 주황빛은 종일 꺼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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