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표 2장 주세요!
택시에서 내린 곳은 논현 영동시장의 한 조개구이집이었다.
탁은 초조하고 복잡한 마음을 숨긴 채 S가 있는 테이블을 찾았다. 이미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S가 그녀를 반겼다. 탁과도 절친한 양선배가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S는 이미 혀가 꼬여있었다.
"왜 이제 왔어. 선배. 얼마나 기다룠는데에에 에."
"미안. 근데 선약 있다고 했었잖아. 공연 보다가 어떻게 중간에 나와."
"그래도 왔으니까 됐어. 결국 나한테 왔잖아."
그녀가 자기에게 달려온 것 만으로 S는 만족한 듯했다. 그러나 탁은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 혼자 기다리는 줄 알고 무리해서 모범택시를 타고 달려왔는데.. 양선배랑 잘 놀고 있었네.. 저렇게 취해있는데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는 오늘도 틀렸구나'
양선배는 이미 질렸는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집에 가겠다고 했다.
"이제 너 왔으니까 난 간다? 쟤 진상이야. 계속 너 언제 오냐고 징징대고. 암튼 잘해봐라!"
아니.. 선배님... 방금 진상이라고 이야기해 놓고 잘해보라는 심리는 또 뭡니까.
이런 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S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온 것이 너무 신난다면서 연거푸 안주와 술을 다시 주문해 댔다. 타탁타탁 소리를 내며 타들어가는 조개껍데기들이 꼭 자기 마음만 같았다.
탁은 기대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소주잔을 들었다.
' 내 팔자에 무슨 연애냐. 그냥 술이나 마시자. 나랑 술이 너무너무너무 빨리 마시고 싶었나 보지.'
탁은 오래 고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즐기기로 마음먹고 나서는 그냥 별생각 없이 S와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탁의 혀도 금방 꼬여갔고 둘은 팔짱을 끼고 조개구이집을 나왔지만 그뿐.
아직도 그들은 같은 직장의 친한 선후배..
변하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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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토요일 오전.
탁은 친척조카의 돌잔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친한 이종사촌 언니의 아들.
언니는 경상도 진주에 살고 있었다. 원래라면 먼 거리를 핑계로 가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워낙 친하기도 하고 마침 진주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큰 축제기간이라 놀러도 갈 겸 가족대표로 참석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기 위해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그 무렵 탁과 S는 거의 매일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나 이제 고속터미널 다 와가'
'아. 우리 집 앞이네? 잠깐 나갈까?'
'아냐. 뭐 하러.. 나 밥 먹을 시간도 없어. 바로 버스표 끊고 내려가야 돼.'
'주말 내내 못 볼 건데 잠시 얼굴이라도 보러 나갈게. 10분이면 감.'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나 못 놀아준다고 분명 이야기했다?'
'알았어. 터미널 내려서 연락해!'
굳이 얼굴을 보러 나온다는 S가 반갑기도 했지만 혼란스러웠다. 요즘은 늘 그런 기분이었다.
좋고 설레고 행복하면서도 혼란스럽고 답답한 마음. S가 너무 좋지만 확실히 하기엔 용기는 안 나고 그렇다고 이 관계를 그만둘 수는 없는 그런 마음. 탁은 하루 24시간 중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S 생각만을 했다. 심지어 혼자 고민을 하느라 잠 못 드는 밤도 수두룩 했다.
고속터미널에서 S를 기다리는데 편한 캐주얼 차림의 그가 나타났다. S는 집 앞에 나올 때도 늘 단정하게 옷을 입었다. 스타일이 다양하진 않았지만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을 깔끔하게 입을 줄 알았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옷을 살려주는 것 일수도.
" 선배. 그런데 어디 간다고 했었지?"
" 아. 나 진주에 친척조카 돌잔치가. 우리 엄마아빠 고향이야. 남해에서 가깝고 작은데 엄청 아름다운 도시!"
" 오. 나 처음 들어봐. 도시 이름 예쁘다! 나도 가보고 싶다."
"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가보자. 우리 친척들 다 거기 살아서 난 어릴 때 매년 갔었는데 도시 중간에 남강도 있고 지리산도 가깝고 남해바다도 가까워서 놀러 갈 데도 많아."
"알겠어. 혼자 가기 심심하지 않아?"
" 한숨 자면 금방 가. 게다가 좀 자야 함. 지금 거기에서 '남강유등축제'라고 엄청 큰 축제 기간이거든? 돌잔치 갔다가 축제 가서 친척동생들이랑 놀기로 했어. 체력보충해야지!"
"오,, 축제??"
S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탁은 미처 보지 못하고 매표소로 향했다.
" 진주행 성인 1장 주세요."
그 순간 갑자기 탁의 뒤에서 손이 쑥 나와 매표소 창구로 카드를 내밀었다.
"어어억?"
"나도 선배 따라갈래. 나 같이 가도 되지?"
너 지금 맨 몸이고, 가서 잘 곳도 없고, 거기 가면 친척들 한가득이고 안 되는 이유 수십 가지가 탁의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녀는 그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한 번도 S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늘 우유부단하고 애매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걱정이 많은 그는 이런 즉흥여행을 떠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박력 있고 과감한 행동은 뭐란 말인가. 단지 그녀와 함께 가고 싶어서 갑자기 표를 2장 산다는 건.. 그리고 툭 치고 나오는 "아니 2장이요" 이 인터넷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장면을 실제로 겪고 있다니 탁의 심장은 그야말로 가슴살을 찢을 듯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제대로 반했다. 탁의 이성 따위는 마비된 지 오래였다.
"너 진짜 괜찮겠어?"
"응. 나 선배랑 같이 그 축제 가보고 싶어."
그리고는 S는 태연하게 편의점에 들러 칫솔과 속옷 등 급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 우리 계란이랑 귤도 살까? 간식 뭐 먹고 싶어?"
어느새 탁도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정해져 있던 약속처럼 자연스럽게 그들은 같이 버스에 올랐다.
"나 사실 태어나서 이런 짓 처음 해봐. 막상 버스 타니까 실감 나네. 떨린다.."
"나도 떨려. 근데 너무 신나!"
"서울 말고 이렇게 멀리 가보는 것도 처음이야."
"완전 서울촌놈이었구먼. 근데 돌잔치 때는 어디에 있을 거야?"
"아. 나 그냥 선배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야. 거기 우리 이모, 이모부, 삼촌, 할머니 온갖 친척 다 있는데 괜찮겠어? 우리 부모님만 빼고 다 있을 텐데, "
"난 괜찮은데.. 선배가 좀 불편하려나?"
"아냐. 일단 언니한테 연락은 해놓을게. 뭐 별 일이야 있겠어."
이럴 때는 또 단순함의 극치를 달리는 둘이었다. 이것도 궁합이라면 둘의 궁합은 아주 잘 맞는 거였다.
귤도 까먹고 달콤한 과자도 나눠먹으며 설렘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진주에 도착했다. 탁은 진주가 이렇게 가깝다고 느낀 것이 처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왜 그리도 순식간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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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남자를 데리고 온 조카를 보며 이모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뭔데? 탁이 남자친구 있었나?
- 아이다. 그런 말 없었는데. 쟈는 누고?
- 근데 억수로 잘생깄네. 서글서글하니 인사도 잘하고.
조카와 무슨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모들은 갑자기 나타난 청년의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가족들 모임장소에 데리고 온 걸 보니 특별한 사이겠거니 짐작하면서 청년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청년도 웃으며 가족들을 잘 따랐다. 어색할 만도 한데 잘 웃고 잘 대답하며 잘 먹고 인사성도 밝은 것이 조카의 짝으로 딱이다 싶었다. 이렇게 S는 탁의 가족들 속으로 너무나도 자연스레 스며들고 있었다.
탁도 그 모습을 보며 내심 흐뭇했다. 아직 사귀진 않지만 이 정도면 거의 확실한 관계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가족들에게는 그냥 회사에서 제일 친한 후배라고 소개했다.
" 우리 회사 후배인데. 엄청 친해. 유등축제 와보고 싶다고 해서 겸사겸사 데려왔어요."
" 안녕하세요! S입니다. 제가 선배 좋다고 맨날 졸졸 따라다녀요."
" 잘했다. 이따 밤에 가서 재밌게 놀고 가. 언니 집에서 자면 된다."
숙소를 따로 잡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친척언니의 쿨한 배려로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친척들도 자연스레 잘 받아주었고 돌잔치도 무사히 잘 끝났다. 순간 이모들이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 전화할 것이 걱정이 되었던 탁이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남강은 온통 불빛으로 덮여 있었다.
여러 조명들을 활용해 만든 거대한 조형물들이 강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각 나라에서 출품했다는 작품들은 탁과 S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까만 밤과 눈앞에 반짝이는 조명들, 길게 늘어선 장터와 먹거리 포장마차. S는 이 모든 경험이 처음이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탁을 따라나섰지만 탁의 가족들도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고 이 축제 또한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것은 또 있었다.
바로 디스코 팡팡 타기.
탁을 지켜주려고 했지만 미처 그녀를 붙잡아주지 못했다. 자신도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혼자였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짜릿한 일탈이었다. 오랜만에 소리 내서 깔깔 웃었고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싶은 행동을 했다.
이 모든 시간이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매번 함께 있을 때마다 마음이 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즐겁고 재미있는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오늘도 축제에서 먹거리와 술을 잔뜩 마신 후였다.
축제의 하이라이트 불꽃놀이가 시작되자 고백하기에 너무 로맨틱한 분위기였지만 그녀가 매번 하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네가 술 안 마시고 맨 정신에 고백해야 받아줄 거야.'
그래서 그는 목구멍까지 이젠 제대로 함께 하자는 말이 올라왔지만 겨우겨우 삼켰다. 서울에 올라가자마자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도 이 한 마디만은 참을 수 없었다.
"나 있잖아. 지금 너무 행복해. 너랑 같이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고마워."
"나도.. 나도 네가 함께 있어서 좋아."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헤어지기 전 들른 카페에서 S는 아주 맨 정신에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술 덜 깬 거 아니지? 내일 또 기억 안 난다고 그러는 거 아니고?"
탁은 정말 미칠 듯이 기뻤지만 괜히 퉁퉁 대며 말했다. 사실 그녀는 S가 '성인표 2장이요' 하며 그녀를 따라나섰을 때부터 이미 반쯤 그의 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사귀기도 전에 일가친척들한테 눈도장을 찍게 한 것도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진작부터 그에게 기울어있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몇 번이고 확인받고 싶었다.
"응. 이거 봐. 이거 술 아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그동안 애매하게 굴어서 미안해. 잘 만나보자. 내가 잘할게."
" 나도 잘할게... 고마워.."
대낮이었고 맨 정신이었다.
탁과 S가 그렇게 2달간의 애매했던 사이를 끝내고 정식 연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동안 마신 수 많은 소주병이 아깝지 않은 결말이자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