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술메이트?
S는 회사가 정말 싫었다.
이제 막 입사한 지 3개월쯤 지나고 있었지만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회사였다. 남자라는 이유로 다짜고짜 연고도 없고 먼 파주로 발령 낸 것도 그렇고 맡은 업무도 생전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는 건축자재를 구매하는 일이었다. 팀장이라는 작자는 파주 사무실에서 가장 높은 직급이라는 이유로 '파주왕국'을 건설하여 왕놀이에 푹 빠져든 듯 보였다. 도무지 존경할 만한 사람은커녕 친해지고 싶은 동료도 없었다.
대기업이라는 이유 하나로 제일 먼저 합격한 이 회사에 입사했지만 이제는 정말 이직하고 싶은 마음밖에 남지 않았다.
' 이 지긋지긋한 파주 구석에서 빨리 벗어나야지.'
그리고 이 놈의 회사는 왜 이리 회식이나 행사도 많은지.
금쪽같은 주말을 희생해서 간다는 '사원간담회'에서 그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말이 조직 활성화를 위하는 행사지... 이건 뭐... 대학교 때 술 퍼마시러 가는 MT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를 만났다.
처음에 그녀는 눈에 전혀 띄지 않았다. 사실 그의 눈에 들어올만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회사가 싫었고 빨리 나갈 생각만 하던 그는 행사 내내 반쯤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짜파게티 먹기 인가 뭔가 하는 게임에 나가라는 선배의 성화에 게임에 참가했다. 가만히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그랬는데....
'앗! 뜨거워!!!!! 뭔 놈의 짜짜로니가 이렇게 뜨거워. 그리고 뒤에 있는 이 사람 뭐 이렇게 둔하냐. 자꾸 어디다가 젓가락을 들이대는 거야!!!!'
뜨겁고 더럽고 짜증이 났다. 사실 같이 게임을 하는 선배가 누군지도 관심이 없었다. 이 사람도 시키니까 하는 거겠지 싶어 짜증을 참아내며 그녀와 인사를 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연신 사과하는 그녀는 성격이 좋아 보였다. 좀 과할 정도로.... 착한 건지 착한 척을 하는 건지. 어쨌든 그렇게 눈도장을 찍고 나니 한 번씩 시선이 갔다.
그녀는 잘 꾸밀 줄 모르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맵시라고는 없는 헐렁한 운동복 차림. 키는 좀 큰 편이고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는 갸름한 얼굴형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고 있었다.
'어라? 근데 웃는 얼굴이 좀 예쁘네. 눈웃음... 치는 스타일이구나. 계속 웃네. 계속. 그러고 보니 이목구비도 꽤 괜찮게 생겼네. 성격도 털털해 보이고...'
조금은 호기심이 생기는 것 같았다. 자꾸 보다 보니 화장을 떡칠하고 얌전 떨며 몸매를 강조하는 듯한 트레이닝 복으로 멋을 낸 다른 여자들보다 오히려 수수한 그녀가 더 예뻐 보였다.
그녀와 좀 더 대화해보고 싶었다.
저녁식사 후 술자리가 얼큰해지자 얼른 빠른 시선으로 그녀가 있는 곳을 스캔했다. 그리고 그녀 옆으로 갔다.
그녀는 말을 재치 있게 잘하고 술도 제법 잘 마셨다. 사람들 사이에서 평도 꽤 좋은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웃겼다. S는 그 자리가 진심으로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무언가를 하는 동안 진심으로 즐겁다고 생각한 첫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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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가 끝나고 탁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다.
S와는 연휴 때의 사적인 술자리를 계기로 아주 친해진 것 같았다. 다만 이게 선후배로서의 관계이자 친구 같은 느낌으로 발전됐다. 술기운에 그녀에게 제일 예쁘다고 말했던 그는 그런 말을 한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탁은 이 관계에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학교 때 만났던 전 남자친구와 사귀게 된 과정과 너무 비슷한 흐름. 잘생긴 후배와 행사를 통해서 만나고 그 후배가 밥을 사달라며 사적인 만남을 제안하고... 그리고 밥을 먹고 친해지고.
이 패턴이라면 S와도 썸을 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그랬듯 티를 내진 않았다. 그냥 친한 후배를 대하듯 그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의 사랑이 그리 좋게 끝난 건 아니었으니까 비슷한 패턴으로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겁이 났다. 게다가 C.C 라면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잘생기고 술 잘 마시고 나를 잘 따르는 후배. 그 정도가 딱 적당하리라.
그렇게 S에 대한 설렘과 호감을 가슴속 깊이 갈무리 한 채 탁은 다시 자기 좋다고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남자들과의 데이트를 시작했다. 그 남자들 중 회사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식으로 사귈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데이트를 즐겼다.
친한 여자선배들이 주최하는 다른 기업 사람들과의 단체 미팅에도 꾸준히 참석했다. 연애를 꼭 하고 싶다기보다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었다. 일에 파묻혀서 젊고 예쁜 시절을 다 날려 보낼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런 자리에 나가 분위기 메이커나 폭탄처리반 역할을 자처했다. 탁으로서는 맛있는 음식과 술도 실컷 먹을 수 있으며 인맥도 늘어나고 게다가 선배들과의 관계도 돈독해지는 것 같아 나쁠 게 없었다.
아니 사실 심히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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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씨는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케케케켁. 네????"
스테이크 한 조각이 갑자기 목에 걸리는 것 같았다. 탁은 본사에 갔을 때 몇 번 마주쳤던 대리님과 저녁식사 중이었다. 본사에 회의 참석 하러 갔을 때와 등산 갔을 때 마주쳤던 것뿐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데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메시지를 보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다.
탁은 두 가지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첫째, 그는 키가 크고 헬스로 잘 단련된 근육질 몸매의 소유자였다. 회사에서도 훈남으로 나름 인기가 있는 편이었고 평판도 좋았다.
둘째, 그는 S와 같은 팀 직속 선배였다. 이 사람과 데이트를 하면 자연스럽게 S에게 소식이 전해지겠지... 이 몸이 이렇게 인기 있다는 걸 그가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탁 씨가 에이스라고 너무 유명해서 누군지 궁금했었는데 등산 가서 건배제의 하는 거 보니까 너무 씩씩한 거예요. 전 이런 여자후배는 처음 봤어요. 그리고 너무 멋진 것 같아요."
"저야말로 대리님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는걸요. 맛있는 거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많이 먹고 즐겁게 시간 보내요. 우리."
그렇게 나름 좋은 분위기로 식사를 즐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결혼 이야기를 툭 꺼낸 것이었다. 26살이었던 탁은 '결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 적도 없었다. 물론 탁한테 결혼하자고 한 건 아니지만 그 단어를 꺼낸 것만으로도 심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 전 아직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비혼은 아니죠?"
"네...."
"그럼 됐어요."
아니.. 되긴 뭐가 됐다는 겁니까.
여엉부영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찍 집에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겨우 헤어진 후 급하게 소주가 당기는 탁이었다.
' S, 뭐 해?? 어디야?'
'어. 선배. 나 집이야. 왜?'
'술 한 잔 하자. 나 반포까지 20분이면 감.'
'아. 그래? 알았어. 그럼 집 근처 와서 전화해! 바로 나갈게.'
그렇게 탁은 택시에 몸을 실어서 S에게 향했다. 갑자기 콧노래가 나왔다. 택시 안에서 급하게 거울을 꺼내 피부결을 정리하고 립스틱을 발랐다. 그리고 이전에 S와 가본 적이 있던 그의 집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 앞에서 내렸다. S는 해맑게 웃으며 기다란 팔을 휘적휘적 흔들며 다가왔다.
"아니, 선배. 또 어디서 놀다가 지금 전화했어? 나는 2 차용이야?"
"아.. 그게 아니고. 술이 모자라서. 네가 마침 가까이 살고."
"나야 뭐. 선배가 부르면 언제든지 콜이지!"
탁은 언제부터인지 누구랑 데이트를 하든 단체미팅을 하고 나서 든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라면 S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 보통 약속이 강남쪽이었기 때문에 자리가 끝나고 S의 동네로 넘어가는 데에는 금방이었다. 게다가 그의 동네에는 조용하고 분위기 있는 맛집이 제법 많았다.
그녀는 그와 함께 술 마시는 시간이 좋았다. 우선 그녀가 부르면 거절하는 법이 없이 매번 나와주는 그가 좋았다. 그날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면 재밌게 들어주는 것도 좋았고 소주도 사케도 그와 마시면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주량도 비슷해서 누구 하나 빼는 사람 없이 마음껏 마실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안주 취향도 제법 잘 맞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술에 조금 취하면 다정한 말을 계속해서 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살포시 어깨에 손을 올리는 등 그의 표현이 적극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선배, 그거 알아? 선배는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이 회사에 있기는 아깝다니까? 그리고 보면 볼수록 너무 예뻐. 선배 내가 선배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알아. 잘 알지. 수십 번 이야기했잖아. 아니 술 깨고 고백하면 받아준다니까?"
"에이. 나 술 취해서 하는 말 아니야. 나 진짜 선배 좋아한다니까!"
"알겠다고. 나도 너 좋아해. 그러니까 술 깨고 다시 이야기하자고."
"나 좋아한다면서 맨날 다른 사람하고 데이트하고 와서 나한테 오냐. 너무한다."
"너무하긴. 내일 되면 또 다 기억 안 난다고 할 거면서..."
그렇게 애써 취중에 흘리는 그의 고백을 무시하면서도 탁은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이기를 바랐다.
정말로 그가 맨 정신에도 용기를 내준다면... 그렇다면 탁도 기쁘게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술이 깨고 난 다음날이면 S는 일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잘 들어갔느냐, 어제 재밌었다, 다음엔 이 가게에 가보자 등 통상적인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반대로 탁도 그에게 다시 묻진 않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기에는 아직 탁은 사랑에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방어적인 마음이 강했다.
'지금 관계도 나쁘지 않아. 꼭 뭐 사귀어야 하나. 그리고 헷갈리게 한다는 자체가 그만큼 날 좋아하는 건 아닌 거겠지'
그러던 중 S와 같은 팀 대리에게 또다시 연락이 왔다.
탁이 지난번 식사 중에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뮤지컬표를 예매했으니 같이 보러 가자는 제안이었다. 솔직히 탁은 그 대리님을 다시 만난다는 게 부담이 되었지만 무려 '캣츠'의 내한공연이었다. 그녀가 뮤지컬의 입덕하게 된 계기였던 작품. 도저히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그녀는 공연을 보러 나갔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한 후에 뮤지컬을 보고 있는데....
그녀의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무음모드로 해놨지만 액정에 뜨는 발신인의 이름에 탁은 더이상뮤지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인터미션이 되자마자 화장실로 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무슨 일이야?'"
"너 지금 어디야?????????"
"어어? 나 지금 H 대리님이랑 밥 먹고 뮤지컬 보고 있는데?"
"아니 네가 그놈이랑 뮤지컬을 왜 봐!!!!! 당장 나와. 나 OO에서 너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빨리 와"
"어떻게 지금 가. 끝나고 가던가 할게."
"아.. 몰라. 빨리 와. 나 기다린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기에 그의 전화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우긴 적도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를 한다고 화낸 적도 없던 그였다.
'역시 같은 팀 선배라서 신경 쓰이는 건가....'
탁은 당장이라도 S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겨우겨우2부를 끝까지 보았다. 그리고 한 잔 더 하자는 대리님을 거절하며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한 후 택시에 몸을 싣었다.
부재중은 10 통도 넘게 더 찍혀있었다.
'나 지금 가고 있어.'
문자를 보내고 택시 안 창 밖을 보면서 탁은 생각했다. 어떤 자리에 가서도 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얼굴도..그래서 참지 못하고 불러내면 달려나와주던 사람도 그였는데....다른 확신의 말이 꼭 필요했던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