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렌체장탁 May 11. 2024

사원 간담회에서

설레는 보라돌이

 

 금요일 오후, 곧 퇴근과 동시에 불금과 꿀 같은 주말을 꿈꾸며 설레는 시간.


 탁의 회사 본사 사무실은 왠지 평소 때보다 더 분주했다.  

화장실은 오후가 되어 찌들어버린 메이크업을 고치기 위해 슬금슬금 모여든 여직원들로 인해 장사진을 이루었다. 몇몇 남자직원들은 커다란 박스를 연신 주차장으로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표정에는 짜증보다는 설렘이 묻어나고 있었다.

싱글벙글 활기가 넘치고 들떠있는 분위기.


 그렇다. 오늘은 '직급 별 사원간담회' 날이었다. 탁의 회사에는 조직 팀워크 향상을 위한 여러 행사가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직급별 간담회라는 명칭의 1박 2일 워크숍이었다. 사원들은 사원들끼리, 대리, 과장 등등 각 직급별 인원이 모여 친목을 다지는 날. 일 년에 한 번 각 지역 별로 흩어져 있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이었던 것이다.


- 아 귀찮아. 무슨 토요일까지 껴서 간담회를 간다고 난리야..


- 야! 네가 아직 잘 모르나 본데 이거 꽤 재밌어. 맨날 일처리로 통화만 하던 애들 실물로 보면 얼마나 웃긴 줄 알아? 통화할 때는 빨리 일처리 안 한다고 큰소리치던 애들이 막상 만나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도 많다니까! 그리고 은근 C.C 도 많이 나온다!


- C.C는 무슨... 난 그냥 집에 가서 캔맥주 하나 따서 마신 다음 드러눕고 싶다.


- 회삿돈으로 한 박스 마셔! 그 캔맥주.


 - 어차피 진짜 사원들끼리만 가는 것도 아니잖아. 팀장님, 부장님 다 따라가는데 뭔 흥이 나겠냐. 결국 젊은 사원들 모아놓고 자기들 놀려고 하는 거지, 뭐.


- 됐다! 난 이왕 가는 거 즐기련다. 소문에 이번에 파주에 잘생긴 신입들 많이 들어왔대.


  탁은 이런 선배들의 대화를 옆에서 조용히 들으며 립스틱을 고쳐 바르고 있었다. 탁에게도 이번 사원간담회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미 대리님, 과장님들이 안 가는 것 만으로 살짝 신이 나는 중이었다. 게다가 아닌 척했지만 잘생긴 신입이 많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녀는 유명한 '얼빠' 였기 때문이다.


'이왕 가는 거 그 소문이 진짜이길...'

 그리고 탁은 사실 회식이나 워크숍에 호의적인 편이었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자유로운 주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왕 뺏긴 시간 맛있는 거나 먹고 공짜술도 즐기자는 마인드였다.


 그렇게 각자 차를 나눠 타고 그녀의 팀원들 중 사원들은 워크숍 장소를 향해 출발하였다.

 

 전국에서 다 모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수도권이라는 명목 하여 서울, 경기권의 팀에 있는 사원들이 모였다. 강화도의 어느 시골마을. 커다란 잔디밭과 운동장, 조그만 풀장, 그리고 큰 독채 펜션이 두 개 정도 있었다.  

 

 운전하는 선배의 옆 조수석에 앉아 졸지 않기 위해 겨우겨우 허벅지를 꼬집아가며 도착했던 탁이었다. 그러나 저 멀리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가슴은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슬쩍 손거울을 꺼내 다시 한번 눈곱과 콧속, 그리고 메이크업을 점검했다. 업무포탈에 올라와있는 자신의 증명사진과 실물이 너무 차이 나지 않길 바라며 차에서 내렸다.


'침착하자.'


  그리고 이내 침착해졌다.


'뭐... 별 인물이 없는 것 같네. 술이나 왕창 마시고 가야겠다.'



---------------------------



 어색함을 풀기 위한 야외 활동 및 게임, 각 팀장님들이 직접 구워주는 바비큐 파티, 실내로 들어가 다시 한번 자기소개 및 자유대화시간.(음주타임)  사원 간담회의 프로그램 구성이었다.

 

 먼저 각자 다른 팀에서 온 인원들을 섞어서 게임을 위한 조를 편성했다. 탁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평소에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팀 선배들은 다 다른 조로 뿔뿔이 흩어졌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그녀들을 붙여놓으면 안 된다는 진행자의 의도적인 배치였다.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한순간 광채가 돌았다가 사라졌다. 보라색 브이넥 티셔츠를 입은 한 남자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쟤는 누구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그 남자는 탁의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날 온 사원들 중 가장 준수한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갸름한 턱선과 적당히 큰 키, 우뚝 선 콧날과 반듯한 이마와 눈썹, 아나운서 같은 이미지의 단정한 이목구비, 짙은 구레나룻과 도톰한 입술.

 피부는 약간 가무잡잡해 보였는데 곱상한 이목구비에도 불구하고 남자다운 느낌이 물씬 났다. 그리고 보라색이 무척 잘 어울렸다.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귀여운 외모의 전 남자친구와 오래 사귀었던 탁의 눈에 꽉 차는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신경은 쓰일 정도의 존재감은 있었다. 그녀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조금은 그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티는 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러 게임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클래식한 게임들. 코끼리코 10바퀴 돌고 신발 던지기, 의자 뺏기 등등.


 그러다가 '눈감고 짜파게티 먹이기' 게임 차례가 되었다.


멍 때리고 있던 탁. 그런데 갑자기 조장 선배가 그녀를 지목했다.


"이번에는 탁 씨가 나가봐. S 씨랑 같이 나가면 되겠다!!"


"네? 저요? 저 잘못할 것 같은데...."


"잘못해도 돼. 왠지 탁 씨가 나가면 웃길 것 같아. S가 후배니까 편하게 해. 편하게."


"아.. 네. 알겠습니다!"


 보라색 브이넥 티, 그가 S였다.


같은 조가 됐지만 의식만 했지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게임 파트너로 출전하게 되다니...


 그것도 짜파게티 먹이기.... 라면....


 남자사원이 앞에 앉아있으면 여자사원이 눈을 안대로 가리고 그 뒤로 가서 백허그에 가까운 자세로 뜨거운 짜짜로니 컵라면을 마구 먹이는 게임이었다.


 뒤에서 안는 자세도 부담이고 먹이다가 얼굴에 묻히고 쏟는 것도 걱정이었다.


그렇지만 까라면 까야지.. 탁도 S도 신입사원 아니던가.


 그녀는 설렘보다는 걱정으로 게임에 출전했다. 이왕 하는 거 잘해서 일등이나 하자!

그러나 그녀는 더럽게 못했고 결국 S의 입에 잔뜩 짜장만을 묻힌 채 게임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아.. 저기... S 씨? 미안해요. 많이 묻었죠? 옷은 괜찮아요? 내가 너무 못해서 고생만 했네."


"아니에요. 선배님. 재밌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이따가 보게 되면 술이나 한잔해요!"


"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는데 눈치 없는 선배 하나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 야야, 잘생긴 후배랑 게임하니까 좋냐?


- 잘생긴 거고 뭐고. 미안해 죽겠네요.


- 왜 왜, 그래도 게임도 같이 했는데 친해져 봐. 쟤가 그 파주에서 일하는 잘생겼다는 걔야.


- 아, 그래요? 난 근데 별로. 옆 팀 K 가 더 잘생긴 거 같음.


 탁의 주특기가 튀어나왔다. 마음에 들면서 안 드는 척하기. 잘생긴 사람 보고 못생겼다고 하기! 일종의 방어기제 및 센 척이었는데 관심을 들키기 싫고 끌리는 마음을 진정해 보려는 탁의 습관이었다.  


 - 그래? 그래도 저 정도면 괜찮지. 우리 사무실 생각해 봐라.... 캄캄하다.


 '그건 그래요'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탁은 남은 게임에 집중했다. 눈앞에서는 각 팀장님들이 자기 팀 소속 여직원들을 한 명씩 안고 앉았다 일어났다 를 하는 게임이 한참 펼쳐지고 있었다. 키 174cm의 여사원을 안아 들고 선방을 하는 한 팀장님을 중심으로 응원과 환호가 이어졌다. 여사원은 얼굴이 빨개져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었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팀장님의 얼굴도 뻘겋게 달아오르고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2024년이라면 상상도 못 할 게임.


 그렇게 온몸을 던져 게임을 한 후 바비큐 타임이 지나갔다. 그동안 고생했던 사원들을 위해 팀장들이 주방장 복장으로 갈아입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사비로 호텔 주방장 복장을 사서 입고 온 팀장님이나 소금, 후추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팀장님 등 모두가 진심인 가운데 사원간담회의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탁은 술을 좋아했다. 그리고 주량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주는 술, 안 주는 술 다 모아 모아 들이켜고 있었다. 평소 회식 때는 잔심부름 하느라 엉덩이 붙일 새가 없었는데 오늘은 사원들을 위한 날이라고 팀장님 및 선배들이 더 신경을 써주었다.


 '술맛 좋네.'


 가끔 저어기 다른 테이블의 보라색이 눈에 어른거리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실내로 들어가 삼삼오오 술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탁의 곁에 누군가 다가왔다.


"선배, 아까 우리 술 같이 마시기로 했잖아요!"


"아.. 그랬지? 어서 와요.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저는 파주 건자재팀의 S입니다. 선배는 이름이 뭐예요?"


"나는 장탁이예요. 수도권 2팀."


  어느 정도 술기운이 올랐던 탁은 아주 활발해진 상태였다. 아까의 어색함과 미안함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S도 술을 좋아했고 그 자리에 둘러앉은 모두가 주당이었다. 술 먹는 템포는 빨라지기 시작했고... 주량을 뽐내던 탁의 혀도 점점 더 꼬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녀의 흐릿한 기억 속에는...........


 복층이었던 공간에서 2층에 있던 보라돌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해맑게 웃으면서 "선배애애애애애!!!! 일로와!!!!!!!"라고 외치던 모습... 그거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하아........ 기어이 회사에서도........... 사고를 치는 거냐.'


 그녀는 불안했다. 다른 게 불안한 게 아니라 그 보라돌이가 불안했다. 술에 취해 혹시나 자신이 그에게 호감을 표하거나 들이댔을까 봐 그게 그렇게 불안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뭔가 엄청 친밀했던... 그런 기억이 났다.


 친한 선배나 동기들에게 물어볼 수 도 없었다. 기억이 없을 만큼 마신 건 다들 마찬가지였을뿐더러 인원이 워낙 많아서 다들 각자 노느라 서로 관찰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진실을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 바닥에 토만 안 했으면 됐어.


라며 누군가가 위로를 건넸다. 다들 난리였어서 그런지 탁의 행적은 어느 정도 묻힌 것 같았다. 저 멀리에 S가 보였지만 그녀는 그와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시간 내내 슬슬 피해 다녔는데 밥을 먹는 그녀에게 그가 다가왔다.


"선배, 해장해야죠? 괜찮아요? 저도 어제 엄청 많이 마셔서 기억이 잘 안 나요."


"나도 기억이 잘 안나. 빨리 집에 가서 자야겠다."


"알았어요. 조심히 잘 가고 우리 또 봐요! 저 집은 서울이니까."


"그래.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봐."

 

   속으로 다음 기회는 없을 거라고 다짐하는 탁이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가라앉힌 채 집에 가기 위해 차에 몸을 실었다. 기억에도 없고 다들 별 말 없고 본인도 별 말 없으니 괜찮았나 보다.. 라며 마음을 놓는 순간.

 옆 자리에 운전하던 선배가 한 마디 툭 날리는 것이었다.


 "탁! 너 어제 그 파주에서 온 애랑 엄청 둘이 붙어있던데? 장난 아니던데. 둘이 뭐 있었어??" 


아....

그래... 그럼 그렇지................ 아무 일도 없었을 리가 없지..

불안감이라는 게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니까.


 붙어있고 친해지고 다 좋았다.

문제는 목격자들은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둘은 아무 기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S와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 하나..


그렇게 선배의 질문을 외면한 채 창가로 고개를 돌린 탁의 시름과 숙취는 깊어져만 갔다.


이전 01화 인기 많았던 신입 사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