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바로 나예요!
우렁찬 그녀의 목소리가 파티션 사이를 뚫고 100명가량의 직원들의 귀를 관통했다.
- 아니..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 여자 인턴 맞음?? -_-
이른 아침 모닝커피타임으로도 깨지 않던 졸음에 시달리던 K-직장인들의 귀가 번쩍 뜨이고 잠이 확 깨는 인사소리였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몇몇은 자기 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스트레칭을 하는 척 일어서 힐끗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치마 정장, 앞머리를 스프레이로 싹 올려 고정시키고 깔끔하게 묶은 똥머리.. 속칭 승무원 머리를 한 키 큰 여자애 하나가 멀뚱멀뚱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예쁘냐?
미모부터 체크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한 노총각 대리가 사원 2년 차 후배에게 물었다.
- 잘 안 보이는데..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 나쁘지 않은 건 뭔데... 이따 저 팀 한대리한테 뭐 물어보는 척하면서 슬쩍 가봐야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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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은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준비한 거에 비해서 나름 큰 규모의 대기업에 운 좋게 입사했기 때문일까.
꼭 나만 빼고 모두가 엘리트처럼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본 인사, 큰 목소리, 밝은 표정 등의 태도를 좋게 하는 것 밖에 없겠구나 싶어 큰 소리로 인사했는데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바로 후회하며 빨개지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그래. 아주 씩씩한 신입이 왔구먼. 너 마음에 든다! 잘해보자!!! 꼭 우리 팀 정식사원이 되길 바랄게!"
인턴기간은 2개월이었다. 큰 실수가 없다면 정직원이 되는 인턴이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가을날, 여의도의 쌍둥이처럼 똑같이 생긴 어느 빌딩 32층에서 탁의 신입인턴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 소풍으로 오던 빌딩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설렘도 잠시.
탁은 바로 직속선배의 차를 타고 근무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현재 가장 바쁘다는 고객사.. 한양대 서울 캠퍼스.
도착하자마자 담당 교수님들을 배정받았다.
"장탁씨는 아직 잘 모르니까 일단 그냥 전화만 받아주세요. 전화받아서 어느 교수님 연구실인지 확인하고 문의 사항 체크해서 선배들한테 전달해 주세요."
'인턴기간에는 실무는 안 하는 거 아니었나요? 그냥 사수들 옆에서 배우면서 최종 피티 준비하는 줄 알았는데요...'
라는 말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그러기에는 선배들 모두 너무 바빠 보였다.
전화기 8대가 번갈아가며 울려대는 통에 도대체 내가 입사한 회사가 대기업 구매팀인지 콜센터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여자 선배의 눈치로 탁도 울리는 전화를 하나 건네받았다.
뭐라고 받아야 되지?
"여보세요...?"
선배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탁을 향했다.
- 아니 쟤 뭐 하는 애야.. 여보세요??
다행히 누구세요?라고까지는 하지 않았고 현재 담당자가 부재중이오니 메모를 남겨주시라는 임기응변에 가까운 응대로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를 시작으로 퇴근시간까지 포스트잇 몇 십장을 채우고서야 하루가 끝났다.
아니.. 나 도대체 어디에 입사한 거야....
오후 6시가 지나자 드디어 선배들이 탁의 눈을 마주쳤다.
"많이 놀랐죠? 여기가 지금 막 파견돼서 난리도 아니에요. 하루 종일 너무 바쁘고 사람은 모자라고. 오자마자 정신없었을 텐데 제대로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그래도 좋은 소식은 우리는 인원이 무조건 필요하기 때문에 탁 씨는 그냥 인턴기간 없다고 생각하고 바로 일해주시면 돼요. 현장평가는 당연히 만점일 거고 피티 발표 결과와 상관없이 정직원 전환될 수 있도록 우리가 다 조치할 거예요. 그냥 빨리 일 배워서 일해주시면 됩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탁 씨 엄청 유명하던데요? 그룹 신입사원연수 가서 전체 1등 했다면서요? 우리 계열사에서는 처음 나온 성적이라 사장님, 부사장님 다 엄청 좋아하셨다던데. 대박이다!!! 이런 인재가 우리 팀에 오다니!! 환영합니다!"
한양대 사무실의 보스 격인 과장님이 별안간 탁을 칭찬했다. 과장님을 제외하고는 3개월, 6개월 터울의 남자 선배 2명, 고객서비스 담당 여직원 2명 다소 단란한 구성이었다. 탁은 정신이 없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들에게 진심으로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턴이었지만 다음날부터 12시까지 야근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출근해서 자리에 앉기 무섭게 전화벨을 울리기 시작했다.
탁이 일하는 부서는 구매팀이었다. 다만 일반 기업의 구매팀과는 달리 여러 고객사들의 요청을 받아 협력사에게 발주를 하는 이른바 구매대행 업무였다. 탁이 배치받은 곳은 한양대학교 교수 연구실들의 구매를 담당하는 부서였고 1,000개가 족히 넘는 각 교수님 연구실들에서 앞다투어 문의가 들어오다 보니 콜센터와 다름없는 풍경이 된 것이다. 반대로 협력사들에게서도 끊임없이 전화가 왔다.
탁은 그때부터 중간.. 역할을 싫어하게 된 것 같다.
같이 합격한 다른팀 입사동기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팀장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티타임, 현업 견학 한답시고 고객사나 협력사 방문, 길고 긴 점심식사, 그리고 피피티 만들기 등을 하다 보면 하루가 끝난다고 했다.
하루에 커피랑 티를 너무 많이 마셔서 배가 터질 것 같다고 불만을 토해내는 동기들의 뒤통수를 쥐어박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일은 고됐지만 재미있었다. 정직원이 될 거라는 의심을 하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해도 되는 환경도 나름 마음에 들었다. 차라리 일만 집중해도 되는 거였으면 좀 나을 뻔했다.
탁은 남들과 좀 다른 유별난 신입사원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세 가지 실수를 했다.
첫 번째, 그룹연수에서 1등을 해버린 것.
두 번째, 술을 잘 마신다는 사실을 감추지 못한 것(feat. 건배사).
세 번째,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
그룹 차원에서 새로운 시도로 각 계열사 1등들을 뽑아 '신입사원 합창단'을 구성하였다. 일 년에 한 번 전체 계열사가 모이는 그룹행사에서 합창 공연을 하기로 정해지고 매 주말마다 팔자에도 없는 합창 연습을 하러 가게 되었다.
첫 번째 팀 회식에서 탁은 새벽 4시까지 붙잡혀있고서도 8시에 멀쩡히 출근을 했다. 그때부터 팀장, 과장, 선배들 할 것 없이 술자리에서 탁을 찾기 시작했다. 잘 놀고 잘 마시고 빼지 않았기 때문에 꼰대들의 예쁨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탁은 목소리가 컸다. 아주 컸다!!!!
건배사를 시킬 때마다 타고난 성량으로 우렁차게 식당 전체가 울려 퍼지게 멘트를 외쳤다. 게다가 탁은 작가 지망생이었기 때문에 나름 멘트가 센스 있었다. 뭐랄까..... 즉흥적이긴 했지만 적절했고 남달랐다고나 할까.
그녀의 건배사는 점점 더 유명해져 갔다.
절정은 '신입사원 합창단'의 공연을 마친 전체 그룹사 뒤풀이 자리였다. 그녀의 건배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부사장님은 각 계열사 테이블마다 탁을 데리고 가서는 건배사를 시키기 시작했다.
"이번에 우리 회사에 아주 물건이 들어왔습니다!"
탁은 판 깔아주면 피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올라갔다. 그리고 외쳤다!
"아름다운 이 밤, 불꽃같이 타오르는 우리 그룹 모든 청춘들의 건승을 위. 하. 여!!!!"
그런 데다가 일을 꽤나 열심히 했다. 그러자 이미 회사 어르신들과 담당 상무님의 예쁨을 받는다는 소문이 심상치 않게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팀 선배들도 자신들의 부담스러운 역할을 기꺼이 나눠진 신입사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쁨은 받았지만 회사에 모든 걸 바쳐야만 했고 칭찬과 사랑도 받았지만 질투와 험담도 함께 받아야만 했다. 다행히 비슷한 처지의 몇몇 선배들과 친해져서 고충을 나누기는 했지만.... 탁의 입사 첫 1년은 건배사를 한 200번쯤 하면서 정말이지 정신없이... 지나갔다. 탁은 일 년 내내 목이 쉬어있었다.
웃기게도 그 와중에 어르신들에게 받는 예쁨과는 별개로 탁에게 남자들의 대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입사동기인 L, 같은 팀 선배였던 Y, 다른 팀 대리였던 H, 또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던 과장님까지.
그야말로 고백 러시였다.
탁의 생애 이런 시기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호감을 표해왔다.
게다가 탁의 외모는 나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나쁘지 않았다.
키 169.8cm에 취업 준비 중 승무원을 지원하느라 극한으로 다이어트를 했었던 몸매, 어깨까지 오는 갈색 단발에 깔끔한 치마 정장 차림, 그리고 살포시 짓는 눈웃음까지.
초 미녀는 아니지만 제법 호감 가는 신입사원이랄까. 그 와중에 어른들은 맨날 칭찬하지... 심심치 않게 소문이 들리지... 한 번 같이 술 마셔보니 재밌지... 일도 잘한다고 하지....
사내커플을 꿈꾸거나 적당히 결혼할 여자를 찾던 그들에게 탁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었다.
"탁 씨.. 탁 씨는 정말 제가 꿈꿔온 이상형이에요."
탁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상형이라는 소리도 들어봤다. 그래서 열심히 자기 좋다는 사람들을 만나서 데이트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들이 사주는 비싼 밥도, 심혈을 기울여 짜둔 데이트 코스도 그녀의 마음을 전혀 설레게 하지 않았다.
' 그냥... 고마운데... 근데.. 그 이상은 아니네..?'
탁은 취업 전에 정말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을 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 사랑은 뜨겁지만 어렵고도 아픈 것, 또 그만큼 치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적당한 호감, 기분 좋은 데이트, 그럭저럭 맞는 성향... 따위는 그녀의 연애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었다.
인생 최고의 전성기, 혹은 인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였지만 그녀는 전혀 신나지 않았다.
그래서 탁은 기다렸다.
다시 내 심장을 뛰게 해 줄 사람을!!!
- 쿵쿵쿵 쿵쿵쿵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쓰는 형식을 소설 비슷하게 바꿔봤습니다.
나중에 소설을 쓰고 싶어서.. 그냥 습작이랄까요? 어설픈 거 알지만 재밌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구 남자 친구 다이어리_직장 편 스타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