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제일 예뻤어.
더럽게 바쁜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었다.
탁은 바빴고 그녀의 동료들도 바빴다. 월요일, 산처럼 쌓인 업무로 복귀한 그들에게 지난 주말의 여흥은 잊힌 지 오래였다.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 아, 겨우 금요일 반나절 일 덜 했다고 난리도 아니네. 교수님들 다 열받으신 듯.
- 나 아침 8시에 앉아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일어나고 전화만 받았어. 실화냐. 오후 3시다. 3시.
이상한 헛소문이 퍼지는 건 아닐까 주말 내내 전전긍긍했던 것은 기우였다. 그렇게 탁은 사원간담회에서의 실수를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아주 가끔 그녀에게 친한 척했던 그 보라돌이 신입사원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녀와 S는 업무적으로 겹치는 부분도 거의 없었다. 근무 지역도 달랐고 사내행사도 일 년에 한두 번일 테니 그와의 접점은 없을 예정이었다.
'다시 볼 일도 거의 없을 텐데. 뭐'
왠지 모르게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외면하는 탁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그녀의 회사 사내포털에는 개인 방명록 같은 시스템이 있었다. 직원의 이름을 검색하면 프로필 및 연락처가 뜨면서 그 밑에 안부인사나 짧은 글을 적을 수 있는 페이지가 나왔다. 예전 싸이월드 방명록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곳에 사내 친한 동료들끼리나 선후배, 혹은 상사에게 축하 인사나 안부글을 적는 문화가 있었다.
바로 그 방명록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낯선 이름이었지만 그녀는 금방 그 이름을 알아볼 수 있었다.
S가 올린 글이었다.
'어? 내 이름을 기억했나 보네..'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출 틈도 없이 그가 남긴 글을 읽었다.
탁은 바로 그의 이름을 검색하여 S의 방명록을 살펴보았다. 남겨진 글이 거의 없었다. 그는 방명록을 평소에 전혀 활용하지 않는 듯 보였다. 혹시 형식적인 안부인가 싶어 그날 술자리에서 같이 있었던 몇몇 다른 사원들의 방명록도 검색해 보았다.
S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탁에게만 남긴 것이었다. 평소에 그 방명록을 전혀 이용하지도 않던 사람이 굳이 그녀의 이름을 검색하여 글을 남긴 것이었다. 밥을 사달라니 다시 보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그냥 단순히 밥을 사달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프러포즈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쿵쿵 쿵쿵.
탁의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혼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들킬까 싶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 화장실로 갔다.
'아싸!!!!!!! 신난다! 아.. 이놈의 인기란... 밥 한번 먹어줘야겠구먼. 별 수 없지 흠흠'
화장실 칸에 숨어 쾌재를 부른 뒤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후에야 탁은 자기 자리로 복귀할 수 있었다. 너무 빨리 답글을 남기면 신난 게 티가 날까 봐 일부러 그날은 답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루쯤 지난 뒤에 남겨야지...라고 생각하며 업무에 집중하려는 데 이번에는 노트북 화면 하단에서 사내메신저의 주황색 알림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 선배! 저 S 예요. 제가 쓴 글 봤어요?'
- 오! S 씨. 아직 못 봤는데? 저한테 글 남겼어요?'
안 본 척…..
- 네. 진작 남기고 싶었는데 처음에 이름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겨우 찾았어요.'
- 그래도 기억했네요. 지금 확인해 볼게요.'
- 아.. 별 내용 없어요. 밥 먹어요. 선배.'
- 밥 좋죠. 근데 저 야근을 맨날 해서... 그래도 조만간 시간 맞춰봐요.'
- 네,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네네. 연락 줘서 고마워요! 파이팅!!'
싱글벙글. 이제는 빨개진 얼굴도 새어 나는 웃음도 감출 생각이 없는 탁이었다.
- 아니, 탁 씨. 무슨 좋은 일 있어? 아까부터 왜 이렇게 혼자 실실대?
옆 자리 남자선배가 물었지만 탁은 별말 없이 씩 웃기만 했다. 쓸데없는 소문은 만들고 싶진 않았다. 조용히 밥만 먹어야지... 밥만.
—————-//——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았다.
탁은 처음으로 미친 듯이 바쁜 자기 팀에 원망이 들었다. 매일 야근에 주말 출근까지. 그놈의 밥 한번 먹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 뒤 몇 번이고 시간을 맞춰보려고 했지만 늘 사과를 하며 미루는 것은 탁이었다. 그녀는 이러다가 타이밍이 지나 약속이 무효가 될까 봐 초조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무실 막내가 약속 있다면서 먼저 나갈 분위기가 도저히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그녀의 가족들은 이번 추석에는 부모님의 고향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서울에서 긴 연휴를 맞이하게 된 그녀는 비슷한 상황의 친구들을 만나 오랜만에 실컷 회포를 풀었다.
그러다가 S 생각이 났다.
그도 집이 서울이라고 했으니까 연락이나 해볼까?
연휴에 둘이 만날 사이는 아닌 것 같아 선배 하나를 소환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메세지를 보냈다.
'S 씨, 연휴인데 뭐해요?'
'선배!!! 저 그냥 있죠 뭐. 심심해 죽을 뻔.'
'아 그래요? 서울?'
'네네. 우리 집 반포예요.'
'오, 그럼 우리 만날래요? 나 강남역 사는 양선배랑 술 마시기로 했는데.'
'아 진짜요? 좋아요! 언제? 어디서요??'
'내일 오후에 강남역 근처에서 만날 것 같아요. S 씨 친구 있으면 같이 불러도 돼요. 여러 명 모여서 놀면 더 재밌으니까'
'좋아요. 그럼 저도 좀 알아볼게요. 잘됐다! 내일 봐요. 선배!'
그렇게 드디어 약속을 잡았다!
다음날 강남역, 오후 6시. 6번 출구 앞.
아직 '꾸안꾸'라는 말이 없었을 무렵이었지만 탁은 꾸미지 않은 듯 꾸미기 위해 오전 내내 시간을 보냈다. 특히 그녀는 피부가 좋아 보이는 데에 신경을 썼다. 메이크업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순수 쌩얼이지만 예쁜 거다라는 느낌으로 어필하고 싶었다. 반면 양선배는 집 바로 앞을 나오는 건데도 색조화장까지 완벽하게 마친 모습이었다. 회사 후배와 술을 마시는 자리라기보다는 2:2 미팅을 앞둔 기분이었다.
저 멀리 나타난 S는 친구를 한 명 데리고 왔다.
사적인 자리에서 처음 보는 S는 새삼 잘생겼다고 탁은 생각했다. 깔끔한 캐주얼 차림의 그는 셔츠도 다려 입은 듯했고 머리를 공들여 세팅한 모습이 꽤나 신경을 쓰고 나온 듯했다. 그가 데리고 나온 친구도 얼굴이 하얗고 잘생긴 친구였다. 심심하기도 했지만 후배의 부탁으로 어영부영 나왔던 양선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강남역 한 술집으로 향했다. 각각 개인룸으로 되어 있는 술집이었다.
어쩌다 보니 남자 둘, 여자 둘 짝을 맞추어 만나게 된 그들이었다. 자연스레 남녀 섞어서 앉게 되었는데 S의 옆자리는 탁이 차지하게 되었다. 살짝살짝 닿는 어깨와 팔에서 시원한 남자 향이 풍겨 나왔다.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설렜다. 입사하고 그래도 꾸준히 여러 사람과 데이트는 했었는데 이런 설렘을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날 조짐이 보였다.
자기소개를 하다 보니 네 사람 모두 동갑이었다. S가 1월 생이라 한 학년이 높게 학교를 나오긴 했지만 다 같은 연도 출생이었다. 술 몇 잔이 들어가자 넷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양선배와 S의 친구도 죽이 잘 맞아 보였다. 기대보다 훨씬 더 신나는 술자리가 이어졌다.
꽤나 많이 마신 자리였다. 1차가 끝나자 양선배가 탁에게 눈을 찡긋 댔다.
"야, 난 간다! 어지럽네. 많이 마셨나 봐."
" 엇?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S의 친구가 냉큼 양선배의 팔을 잡으며 나섰다.
"우리 집 엄청 가까운데?"
"에이, 그래도 여자 혼자 밤길 보낼 순 없지. 내가 바래다줄게."
둘은 S와 탁을 배려한 건지 아니면 진짜 둘이 눈이 맞아버린 건 지 알 수 없었지만 대답할 새도 없이 후다닥 저 멀리 밤거리로 사라졌다.
드디어 둘만 남게 되었다. 탁은 내내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용기 내 꺼냈다.
" 저기 너 왜 나한테만 글 남긴 거야? 연락도 나한테만 하고."
" 선배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니까 왜?"
S는 취한 것 같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탁의 눈을 바라보며 또렷한 발음으로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