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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텀민 Apr 05. 2023

우물을 탈출한 개구리

우물 밖에 또 우물이 있네

 나는 공대를 졸업했다. 공학을 전공한 경우 타 전공보다 취업문이 넓은 것은 사실이지만 취업의 분야가 넓은 것은 아니다. 갈 수 있는 직장과 업종은 정해져 있는 대신에 그 분야들에서는 많은 머릿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취업문이 넓은 것일 뿐이다. 동문들이 취직한 회사를 보면 같은 회사끼리 묶어 분류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거기서 거기다.

 나도 그 회사들 중 한 곳에 취직했고 이 분야에서 11년째 일하고 있다. 게다가 공학 전공자들 중 전공을 버리고 새로운 분야에 취직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 주변-학교부터 직장까지-에는 공대생만 드글드글하다. 동호회나 취미 활동을 딱히 하지 않는 경우 주변 사람들과만 어울리게 되고, 그렇다 보니 연애나 결혼도 비슷한 분야의 사람과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첫 직장의 첫 번째 팀에서는 8년 하고도 3개월을 근무하였다. 나는 막연히 사무직이라면 모든 회사와 모든 직업이 다 비슷하겠거니 생각했더랬다. 일하는 방식도, 팀 내 분위기도, 회사 문화도.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나 다른 팀 동기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별 관심이 없었기도 하지만. 물론 그것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모든 걸 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일하는 환경이 다 일거라고 생각했고, 그 외에는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설계팀에서 근무했는데, 설계팀 업무의 특성상 설계에 관해서만 알아도 별 문제가 없다 보니 큰 그림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설계라는 것은 사실 프로젝트의 작은 한 부분일 뿐인데 그때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인줄 알았다. 그걸 깨달은 것은 팀을 한 번 이동한 후였다. 이동한 팀은 인사관리본부에 있는 스탭조직이었는데, 현업보다는 관리부서에 좀 더 가까운 조직에 있다 보니 회사가 얼마나 큰 조직이며 얼마나 다양한 업무를 하는 조직이 있는지 그때 처음 실감했다. 내 세상이 얼마나 좁아터진 공간이었는지, 내가 얼마나 우매하고 그릇이 작은 인간이었는지 그전에는 몰랐다. 우물 속에서 한 번 나온 그 순간에도 나는 조금 더 클 뿐인 우물 속에 있다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직장생활 9년 만에 처음 이직을 했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그때 이직을 하기 싫었다. 9년 동안 만들어놓은, 눈만 감아도 훤한 그 터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 편해진 인간관계를 내려놓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도, 쳇바퀴 돌듯 쉬워진 업무를 두고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것도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수가 드라마틱하게 오르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 그랬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에게 찾아온 기회였고, 앞머리만 있고 뒷머리는 없는 기회라는 놈을 놓치기는 아까웠기에 이직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직을 한 번 하고 보니,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직장과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업무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내내 사무직만 하다 보니 제조업 등의 공장에서 현장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첫 직장도 '현장'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현장직과 교대근무라는 개념, 말로만 듣던 협력업체나 노동조합과의 관계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업무를 하게 되다 보니 어렴풋이 인지만 하고 있던 세상의 한 부분에 대해 '알게' 되었달까. 그렇게 나는 한 번 더 우물에서 나왔다.


 두 번의 우물 탈출을 거치면서 달라진 점은,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런 데다가 '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 살다 보니 다양한 인생사에 관해 접할 일이 별로 없었다. 비슷비슷한 사람과만 이야기하고 지내다 보니 반향실 효과(Echo chamber)로 내가 평소 믿어왔고 알고 있던 세상에만 집착하는 소위 '꼰대'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반향실이란 소리를 반사하는 소재로 벽을 만들어 소리가 메아리치도록 만든 방이다. 어떤 한 믿음이나 아이디어가, 닫힌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증폭되면서 같은 입장을 가진 정보만 지속적으로 수용되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이 반향실 효과이다. 이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 확증 편향을 가지게 된다. 이 확증 편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면 최근에 이슈 되고 있는 JMS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 속에서 닫힌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JMS에 대한 믿음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범법, 비윤리적 행위들에 대한 지지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것이다. 나는 두 번의 우물 탈출을 거치며 그 작은 반향실에서 빠져나왔다(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나의 관점에서만 보곤 했는데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보려고 노력한다.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은 내가 아는 만큼만 이해하여 받아들이다 보니 내가 모르는 부분은 그냥 흘려보내곤 했는데 사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내가 모르는 부분들에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으면 좀 더 세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수반된다.


출처 @ the secret truth of life


 인생을 살아가는 매 순간은 우물에서 나가기 위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우물에서 두 번 나왔지만 나는 지금도 어떤 우물 속에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아직 아이가 없기 때문에 아이가 있는 세상에 대해 모른다. 이런 경우 내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한 번 더 우물에서 나가며 부모의 마음에 대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기 때문에 자영업이나 사업, 혹은 프리랜서의 삶에 대해 모른다. 만약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다면 또 한 번 더 우물에서 나갈 수 있을 테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길을 가 볼 수는 없다. 모든 직업을 가져 볼 수도 없고 모든 선택을 해 볼 수도 없다. 그러니 반향실 속에 갇히지 않으려면 무던한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 인간관계가 좁거나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특히 그렇다. 나에게는 이직이나 팀 이동이라는 사건이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내가 반향실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는 사실이 더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이직을 고민한다고 하면 이왕이면 해 보는 것을 추천하는 편이다. 꼭 이직이 아니더라도,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가 있다면 해 보는 것이 좋다. 환경변화에 대한 스트레스가 결코 작지 않지만 인생을 살아나감에 있어 우물 탈출을 한 번쯤 해보는 것은 나를 둘러싼 외피를 한층 더 크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외피의 확대는 나에게 인생의 재미를 알려주는 요소 중 하나이다. 내가 있는 우물의 바깥 우물은 어디일지 지금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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