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말 한마디 보다 최고인 것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
“오는 길에 사고 나서 그냥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뭐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
아는 오빠가 와이프에게 저런 말을 들었다며
같이 쌍욕 하면서 의아해했던 적이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보통사람이 저런 악랄한 말을 내뱉기까지
도대체 결혼이라는 게 뭐길래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걸 막상 해 보고 나니
분노조절 부분이 망가지면 저런 말이 뿜어져 나올 수도 있는 거 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 말을 들은 사람 그리고 저 말을 뱉은 사람
둘 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 당시에는 듣는 사람 입장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죽했으면 저 말이 튀어나왔을까?' 하고 말하는 사람의 입장이 헤아려진다.
부부 사이란 정말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걸 실감한다.
폭언 폭격기가 된 나 자신을 구하라!
결혼한 지 일 년 남짓,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의 도덕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일어나자마자 콜라를 마시지?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인간과 살고 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콜라로 목을 적시고
자기 전 눈 감기까지 콜라를 달고 사는 그를
처음엔 쫓아다니면서 콜라를 못 먹게 하기도 했다.
“그만 먹어.”
어리석게도 그렇게 막으면 그게 고쳐질 줄 알았다.
콜라를 줄이면 무언가를 해주겠다는 거래도 해봤다.
자라온 환경이 워낙 달랐기에 사소한 것에 부딪히는 건 당연했다.
어릴 때 몸에 안 좋다는 이유로 탄산음료를 못 먹고 자란 나이기에
이 광경은 해방감이 들면서도 온몸으로 저지해야 할 나쁜 일 같았다.
어쩌다 보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만해~하지 마~자꾸 이러면 나 한국 갈 거야 가 되었다.
뭘 못하게 하는 부정적인 말은 듣는 사람도 힘들지만 하는 사람은 더 힘들다.
짜증은 항상 기본 장착되어 있고 그 말을 뱉을 때마다
내 마음이 마구 구겨지는 기분이다.
도덕 선생님은 나의 착각이고 나는 폭언 폭격기가 되어있었다.
나는 경쟁이 치열하고 열심히 살지 않으면 죄짓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리틀 포레스트나 월든 스타일로 살아가는 게 어울리는 포틀랜드에서
내가 추구하는 건 돈과 명예다.
이 세계관의 불일치가 나를 힘들게 한다.
아직 서울 빠르기로 쫓기듯 살고 있는 나는 남편의 유유자적함을 보면 천불이 난다.
내 기준으론 짐을 등록하면 루틴대로 딱딱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가야 하는데
남편은 한 달에 한두 번 갈까 말 까다.
“그럴 거면 회원권 정지시켜 돈 아깝게.”
남편 기준으론 운동은 기분이 내키는 날 가는 게 국 룰이란다.
그래 다 양보하고 넘어간다 쳐도 담배만은 힘들었다.
임플란트를 3년째 하고 심었던 뼈를 다시 드러내고도
담배를 피우는 인간이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여러 번 전쟁을 겪고 나는 급기야
“그냥 관에 들어가 누워서 피지 왜 앉아서 펴 어차피 죽을 거?”
이런 말이 목 끝에 맺혀버렸다.
‘아니 내가 이렇게 사악한 말을?’
차마 뱉지는 못했는데 이런 악랄한 말이 내 머리에 맴도는 게 싫었다.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나 자신이 무서워졌다.
왜 나는 하루 종일 다그치고 저지하고 짜증을 내고 있는 걸까?
이 말은 듣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의 영혼이 더 더러워지는 것 같다.
그런 나를 구해야 하는데 그걸 구해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는 것 같다.
피아노 치듯 말하면서 달라진 것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나였는데 어느 날 팟캐스트에서 주워들은 말
‘피아노 치듯이 말하면 듣기가 좋아요’
그 워딩에 꽂혀버렸다.
피아노 치듯 말하자라고 생각하고
집안 곳곳 벽에다가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았다.
에세이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을 꺼내어 밑줄 쳐놓은 글을 다시 짚어 봤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의 연주에서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을 인식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피아노 연주하듯이 말한다 생각하니
정말 내 몸을 울려 나오는 소리가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면 했다.
왜냐면 나 자신이 가장 큰 소리로 듣고 있기 때문이다.
콜라를 아침부터 처 마시는 남편을 보고도
“코라 콜라에선 뭐하나 몰라 자기한테 표창장 안 주구, 이렇게 열심히 마시는데.”
이렇게 말하게 됐다.
물론 아직도 분노 조절이 안 되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그만 마셔” “당뇨병 걸리고 정신 차릴래?” 이런 부정의 말을
미사일 쏘듯이 쐈던 내가 달라졌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콜라를 줄여라 어째라 이런 헛된 생각 말고
오늘도 콜라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남편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됐다.
거절은 알렉사처럼
피아노 치듯이 말하기는 정말 효과가 있었다.
말하면서 부드러운 선율을 떠올리게 되고 내 기분은 조금씩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오늘 운동 간다고 말해놓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남편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남편은 혼자 운동 갔다 온 나를 졸졸 따라오더니 눈치를 보며 불을 켠다.
“알렉사~ 턴 온 더 라이트”
인공지능에게 부탁하는 그 말투가 어쩌다 노래처럼 부르듯이 하게 됐는데
남편은 화가 난 나를 웃겨 보려고 똑같은 리듬으로
“현진~ 김 미어 뽀뽀.” 라며 얼굴을 내 입 앞에 들이밀었다.
“뽀뽀도 알렉사한테 해 달라해.”
라고 말하는 나 자신을 보고 정말 놀랐다.
평소 같았으면
“운동 안 가고 거짓말하는 인간은 뽀뽀받을 자격이 없어.”
라며 독을 뿜었을 텐데 그래도 피아노 치듯 말하기가
무의식에 있었던 건지 나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그랬더니 남편이 진짜 알렉사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사~ 김 미어 키스”
그랬더니 세상에~ 알렉사의 대답이
“아이 러브 유 애즈 프렌즈.”였다.
그 말을 듣고 우리 둘 다 빵 터졌다.
알렉사는 거절을 할 때도 피아노 치듯이 듣기 좋게 하는 구나하고 센스를 배웠다.
‘앞으로 거절은 알렉사처럼 해야지 ’
따뜻한 말 한마디보다 더 최고인 건
“그거 유명세라고 생각해요
유명하면 세금 걷듯이 뭔가를 걷어가더라고요
별거 아닌 걸로 기사 내고“
드라마 <그해 우리는>에서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한 말이다.
표절시비에 휘말려 속상한 최웅에게 아이돌인 그녀가 해준 말이다.
내가 최웅에게 너무 몰입을 했는지 그 말이 너무 위안이 됐다.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그녀밖에 할 수 없는 말이다.
왜냐면 본인도 직접 겪어본 위기이기에
진짜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본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말이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사람에게 친구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은 다양하다.
“너 진짜 표절한 거 아니지?”
혹은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믿어 주는 거 등등
다양한 반응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말이 최고다.
내가 영어로 힘들어할 때 외국어로 힘들어 본 사람의 말만이 위안이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콜라 중독이 되어보면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콜라만이 날 살아있게 하는 것 같아.” 이렇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에 떠올라 버렸다.
어머나 세상에!
아침부터 밤까지 남편이 콜라를 달고 사는 것처럼
나는 커피를 달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남편은 단 한 번도 커피 그만 마셔라 끊어라 줄여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스타벅스 포인트가 떨어지면 뒤에서 조용히 충전해 놓았다.
여기서 내가 감동받았던 건 '티 내지 않고'다.
역시 아무리 따뜻한 말 한마디가 최고라도
침묵이 더 최고인 걸까?
‘곁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는 것’
어쩌면 그게 최고의 가치일지도 모르겠다.